2. 피끝마을
동파는 영남대로(한양과 동래, 부산를 잇는 가장 짧은 길)를 따라 충주까지 내려가 영천으로 틀어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양재동의 주막을 나섰다. 이미 미시(오후1시~3시)를 지난 시점에 길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짧은 겨울날의 낮은 이미 그 꼬리를 보이며 서산 밑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하늘 밑을 두 시진(1시진=2시간 약 네시간)쯤 더 말을 달려 30여 리를 더 가 그 곳의 역에 말을 맡기고 잠자리를 잡았다.
역관의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하나를 얻어 큰 방에 남자들 다와 작은 방에 수빈 하나가 들어가도록 잡았다.
역관의 뒷 채에 우물 가에 항현이 씻으러 나가는 데 수빈이 씻고 들어가던 참이었다.
“씻고 들어가십니까?”
“어머~ 지금 나오셨어요?”
머리의 두건을 벗고 감은 머리가 젖어 흘러내린 수빈의 모습에 항현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서 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 저...... 잠시......”
들어가려는 수빈을 항현은 맹목적으로 붙들었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같이 하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 싶은 맘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말할 꺼리가 없다보니 다급함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았다.
‘뭐..... 뭣 하는 짓이야...... 나란 놈은 .......’
속으로 스스로를 책망하며 머리를 최대한 회전시켰다. 무슨 말이든 찾아야한다는 긴급함에 진땀이 흘렀다.
“무슨 일이신가요? 항현 나으리.”
수빈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팽팽, 돌던 머리가 한방에 멈췄다. 속으로 큰일났다는 생각 뿐이었다.
무반가의 무장이 여인에 음심을 품고 선 씻고 나오는 여인을 멈춰 세웠으니 이 여인이 자신을 어찌 생각할까, 음험한 무뢰한이라 야단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핑계, 핑계가 필요하다! 뭔가 진짜로 필요해서 멈춰 세웠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있는 핑계가.......!’
“저...... 나으리?”
수빈이 의아한 눈으로 항현을 쳐다보자 항현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저........ 그....... 그래.......그....... 새로 들어온 사람 말입니다.”
“광조씨요?”
어쩐지 실쭉하니 수빈의 표정이 삐친 듯한 얼굴이 되었다.
“어.....어떤 사이신지......”
“예~!? 사이는 무슨 사이요! 그냥 언문에 내재된 주술적 힘을 측정하는 데에 같이 잠시......”
잠시 생각하더니 살짝 삐친 듯하던 수빈의 표정이 한층 무거워지며 소리가 매섭게 변했다.
“근데 저..... 이런 것을 나으리께 꼭 말해야 하는 건가요?”
“!”
얘기가 희한하게 전개된다는 느낌에 항현은 다시 당황했다. 이건 여인의 지나간 과거를 의심하는 한심한 소인배의 그림되었다.
‘이게 아닌데! 꺼낼 말이 그것밖에 없었나?’
“아니, 저 그게 아니고......”
“저......옛날에 공통된 일을 한 적이 있는 것이고 크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옵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굳이 꺼내어 할 만큼 지금의 공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그렇지요.......”
“전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쌀쌀맞은 수빈의 대응에 항현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홱~하니 뒤돌아 머리를 털며 들어가는 수빈의 뒷모습에 항현은 하늘을 바라보며 폭발하듯 한숨을 쉬었다.
‘하~~~~~~아~~~~~~~! 우물물에 머리부터 처박고 죽을까? 항현이 이놈아~!’
한심한 자학을 되씹으며 우두커니 서 있다가 힘없이 우물물을 받아다 얼굴에 뿌리는 항현이었다.
다음날은 늦게 출발하여 얼마 못간 전날을 생각해서 새벽 닭이 우는 묘시(새벽5시~7시) 언저리에 바로 일어나 출발했다.
달이 지고 아직 해는 뜨지 않은 여명 전의 어둠을 헤치며 다섯 필의 말이 남쪽으로 뛰어갔다.
“식전에 30여 리 가 놓고 거기의 역 참에서 아침을 드세나!”
“옛!”
“옛! 급한 길에는 그게 상식이죠!”
“......”
“......”
동파의 기승 질주중의 아침 식사 계획 제안에 준모와 광조는 호응을 했지만 항현과 수빈은 묵묵부답이었다.
말위에서 힐끔 둘의 얼굴을 봤더니 항현은 눈 밑이 퀭하니 영~ 상태가 좋지 않았고 수빈은 미간에 내 천(川)자를 그리고 있었다.
‘뭐~ 늘 좋을 수 있나?’
어제 밤 사정을 모르는 동파로서는 두 사람의 어두운 낯색의 연관성을 유추하지 못하고 그저 피곤 때문이려니 생각하며 갈 길을 계속 달렸다.
다섯 필의 기수의 왼 쪽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