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이 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채 한참이나 그대로 있자-
하임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 기척에 지혁은 표정을 단박에 단정하게 한 뒤 가볍게 말을 걸어왔다.
"공연히 시간 뺏어 미안하군- 그럼 작업하러 가- 나도 하던 일, 마저 해야겠군...."
지혁은 미련 없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하임은 그 동작에서 가슴께의 어떤 무엇인가가
움직여 맘의 중심을 불편하게 하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혁은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가 버렸고
하임은 낮은 한숨을 내쉬면서 문을 밀어 닫고 지혁의 집에서 나왔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날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은 마치 양날의 검 같아서,
날 무조건 적으로 기쁘게 하기도 했다. 이 사람이- 낮설정도로 세상에서 떨어져 있던 , 그저 혼자만 있었던
이 사람이 날 원한다. 그게 기쁘기도 했지만- 언제나 이 사람은 내가 다가섰단걸 눈치 채면
내 손을 놓고, 놓치는것이 아니라... 놓고 물 속으로 스르르 돌아간다. 그건 어쩔수 없는 것이라고 하기엔
추억이 너무 따뜻해서-... 그 사람이 가진 추억이 아주 견고하고 따스해서
마치 홀린듯 그 사람은 ..... 결국 추억이나 기억은 과거의 일일 뿐인데도 망설임이 없다.
망설임 없이 그 속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그렇게 그는 돌아가고 난 혼자 남은 내 감정을 어찌하지 못해 망설인다.
하임은 약간은 허탈한 기분을 뒤로-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곤 화장을 지웠다.
리무버에 닦여 나오는 화장품들- 그제야 피부가 숨 쉬는듯 하다
그의 미소가 기억나고-... 평소에 화장을 안 했다는 걸 선명히 눈치 채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생각보단... 나를 찬찬히 뜯어 보고 있구나...
언제나 엉망으로 마주하는데.... 참 대책없다 나도..
그러곤 휴 소리를 내며 화장 솜을 휴지통에 던진다. 내가 그 사람에게 영향력이
있다는걸 확인할때 마다 즐기는 자신이 저렴하게 느껴진다.
언감생심,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 보지도 말랬건만-
나는 끊임없이 그 나무 밑에서... 나무의 높이만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 나무가 나를 덮쳐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임은 픽 숨을 내쉬곤 작업을 하러 돌아갔다.
-
그 시각, 지혁이 잠시 잊고 있던 또 다른 인물인 제이미는 의외의 장소에 있었다.
바로 하민의 집이었다. 어머니의 초대로 오긴 했으나.... 제이미는 맘이 편치 않았다.
하민의 어머니는 제이미의 눈에도 위태위태 해 보였다. 시간이 꽤 지났을 텐데도
하민이는...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랬다. 잊혀지는 아이는 아니었다.
존재감이 , 언제나 분명한 아이였다.
그러나 하민이 자신의 어머니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한다는걸.. 만일 안다면 그 아이의 마음은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었다. 어머니 뿐만이 아니지.. 자신이 사랑한다고 제 입으로 말했던 그 남자.
야생동물마냥- 잔뜩 몸을 움추리고..... 손을 내밀면 그 손을 할퀼 준비가 된 그 남자..
하민이는 .. 그 사실을 알기만 해도 맘이 아릴 것이었다.
제이미가 아는 하민은 강한 여자였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것은 하민이에게
도저히 수용 할수 없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 언제나 그랬다.
차라리 자신이 다칠, 그런 아이였다.
생각에 잠겨 있을때 유난히 하민이의 목소리를 닮은 그 어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어때- 제이미.. 입맛에 좀 맞니? 매운건 안 좋아 할것 같아서... 준비해 봤는데-"
제이미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려깊으시게도.. 달콤한 불고기와 맑은 국- 그리고 맵지 않은 김치 등으로 차린
정성이 느껴지는 밥상-...
한눈에도 정성을 들이신것을 충분히, 아주 충분히 알수 있었다.
"네.. 고맙습니다 , 정말 맛있어요-...."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다 전할수 있으면 좋으련만..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고 있음에도 정작 떠올리고 있는건 하민과 점심시간에 나눠먹은
볼품없는 샌드위치였다.
그 가늘고 작은 손으로 반조각을 내서 내밀던 그 샌드위치....
그럼에도 음식 투정 한번 없이 고상하게 - 음식을 먹던 하민이의 모습도 떠올랐다.
하민의 어머니는 줄곧 수저를 들고만 있을 뿐 제이미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단 듯이 바라보았다.
눈 밑의 애잔함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가 않을 것 같다.
"...... 그 아이는 만나봤다고.. 들었단다- 어떻던.. 요즘은?"
.....
하민이 어머니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그 이야기를 물었다. 벌써 통화를 하신 모양이었다.
제이미는 솔직해야 하나.. 아님 그냥 적당히 둘러 대야 하나 고민하고 만다.
제이미는 가감없이 그냥 솔직하기로 맘을 먹고 말을 꺼냈다.
자신의 한글 실력이 , 어머니께는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 그 남자를 변호 하기를 바라면서..
".... 많이 마른 사람이더군요 아주 사람과 말 한지 오래 된 거 같았습니다.
조금 날카롭구요,
제 언어 실력으론 다 못 말 하겠지만 ,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약간 혼란 이 있는것 같기도 하더군요"
제이미는 사려깊게 단어들을 골랐지만
그 단어 하나하나에 눈이 흔들리는 하민의 어머니를 보니 맘이 정말 편치 않았다.
복잡한 감정을 얼굴에 숨기지 못하고 다 드러내시니 .... 불편함에 제이미는 결국 숟가락을 놓았다.
하민의 어머니는 애써 웃음 지으셨고- 제이미는 하민의 방을 보고 싶단 말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혼자서 하민이와의 기억을 한번쯤은.. 되 짚어 보고 싶었다.
하민의 방은 2층의 끝방이었다. 여자애 다운 방이었다. 하얀 가구들이 하민이 다웠다.
그녀의 향기까지도 품고 있는 듯 했다.
여전히 구두들도 하민이가 아끼던 조그만한 도자기 인형들도 , 마치 하민이가 곧 돌아 오기라도 할듯
그대로였다. 주인이 마치 잠시 외출한듯.... 책조차도 책상 위 그대로였다...
그녀의 손이 놓은 그대로 일 것이다. 책도 ... 연필 한 자루까지도....
하민의 어머니가 과일을 깎아 오시겠다며 따라 오시진 않았기에.. 제이미는 비교적 편하게 숨을 내쉬며
방을 찬찬히 훑어 봤다.
여전히 현실감이 없는 일이다. 하민이가...... 잠들어 있다니 - 그것도 몇년째.
책상위의 수첩이 눈에 띄었다. 뭐라뭐라 한글로 글을 써 둔 수첩이었다. 다이어리라는 것을 아는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공책을 집어 들자 어떤 폴라로이드 사진이 툭 하고 떨어졌다.
제이미는 깜짝 놀랐다. 이게 뭐지?
제이미는 사진을 줍곤 그 기억의 한 조각에
자신의 마음마저 아렸다.
얼굴이 두개 잡힌 폴라로이드였다. 하민이가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옆의 남자는 눈을 감고 하민이의 머리에 얼굴을 파 묻고 있었으나
그래도- 누군진 알수 있었다. 심 지혁, 그 남자였다. 한눈엔 알아보지 못할만큼... 지금과는 많이 다른 인상이었다.
좀더 선이 굵고- 지금처럼 하얗지도 않았다. 지금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감은 눈에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뒷면엔 안타까울 정도로 예쁜 하민이의 솜씨로 글이 써져 있었다.
제이미는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곤 한 글자 한 글자 어렵게 글씨를 읽어나갔다.
"영원히-... 내가 항..상 꿈꾸고...싶은 순간...."
당장에 의미를 알수 있는 글귀는 아니었지만 어떤 마음을 품은 이야긴지는 단숨에 알수 있었다.
제이미는 그 사진을 말 없이 쓰다듬었다.
사진의 젋은 커플은 행복한 순간- 그 속에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