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한 점도 없는지, 밤하늘의 별이 유독 선명히 반짝이는 하늘을 나무 등치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는 바이안의 옆에 언제 다가왔는지 알바트론이 조용히 앉았다.
“매년 이맘때에 늘 여기에 나와 계시는 군요.”
“......”
대답대신 한 번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다시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는 바이안에게 자신이 가지고 온 술을 잔에 따라 건넸다.
“....?”
“술 드실 줄 아는 건 이미 들키셨습니다.”
몰래 숨어서 홀짝홀짝 술을 즐기는 것을 들켜 뜨끔 했지만 코에 닿는 알싸한 알콜의 향에 못이기는 척 받아 들었다.
그런 바이안은 어느덧 16살이 되었고,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지고 있는 체격과 외향을 갖추었다.
“선배님은 어째서 저에게 존댓말을 하시는 겁니까?”
술을 털어 넣고 한숨처럼 알콜의 향을 입으로 뱉어 묻는 바이안에게 작게 웃어주기만 했다.
“그것이 궁금하셨습니까?”
“저는 황족도 뭣도 아닙니다.”
“굳이 대답해 드리자면 제 맘입니다.”
“......”
더 캐물어도 소용없을 것이었고, 딱히 크게 궁금한 것이 아니라서 다시 채워진 잔을 들이켰다.
“대륙...”
한줄기 별똥별이 자나가는 것을 눈에 담다가 사라지고 나서야 알바트론을 마주 봤다.
“대륙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곧 기사 서품을 받으실 터이니 금방 그 기회는 오실 것입니다. 혹, 대륙에 집착 하시는 다른 이유가 이 맘 때쯤에 홀로 나와 계시는 것과 관계가 있으십니까?”
“남쪽의 작은 마을에...”
가볍게 끄덕이며 대답을 하다가 말끝을 흐리더니 더는 입을 열지 않는 그를 굳이 재촉할 생각은 없어서 더 묻지 않고, 바이안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바깥에 나와 계시지는 마십시오.”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을 옆에 두고 알바트론은 제 숙소로 돌아갔다.
바이안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별똥별이 또 떨어지지는 않는가, 행여 라도 놓칠까봐 하늘을 주시했다.
“세나야. 나 약속 지켰다. 내일 모래 진짜 기사가 돼. 얼른 너한테 보고하러 가고 싶다.”
어떤 별이 세이나의 별일지 찾다가 제일 크게 빛나는 별을 향해서 입 근육을 간신히 움직여서 이제는 어색해 힘들지만 작게라도 미소를 그려봤다.
“모래에 하는 기사 서임식에서, 내가 최고라고 멋있다고 해주는 네 말이 제일 듣고 싶어. 세나야.”
‘비록, 너의 기사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 약속 지켰어.’
공백의 기사단에는 사연을 가진 이들이 의외로 많이 들어온다.
그 특성인지, 마치 그것이 장점이 되기라도 하는 것인지 기사들 하나하나가 독했고, 강했다.
알바트론이 단장이 된 직 후에 새롭게 편성된 10사단에 바이안을 대장으로 꾸려진 14명의 젊은 기사들이 특히나 그 사연들이 깊었으며, 가장 눈에 띄었고, 기사단에서 제일 사고를 많이 치는 문제아들 겸, 미래의 신흥 강자들로 구성되었다.
“야. 하일, 오늘도 부탁한다.”
“이것들이 매번 나를 써 먹네.”
“우리들이 막내잖아. 좋은 술들은 다 같이 나눠 마셔야 하는 법. 선배들만 몰래 마시면 불공평하지~”
하일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동료들은 오늘도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훌륭한 도둑놈이 되게 그를 독려함에, 하일은 오늘밤도 은밀히 공백의 기사단 내의 괴도가 되어 한 건 건지기 위해서 움직일 준비를 했다.
“아, 이것도 챙겨가라.”
론은 짓궂음과 사악함으로 무장하고 카드 한 장을 하일에게 건넸다.
퓻하고 날아온 카드를 가볍게 잡아낸 하일은 받아든 카드에 써진 문구를 읽더니 론과 똑같은 얼굴로 변모했다.
「물건은 잘 챙겨가지.
그대들의 월급 잘 마시겠다.
-대 괴도 10사단-
ps. 꼬우면 뺏기지를 마시던가요. 선배님들.」
윗 기수에 대한 하극상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 곳은 실력이 말을 하는 곳이기도 하고,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닌지, 그들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고 이럴 때만 훌륭하게 양심을 갖다 버렸다.
10사단에게 당하는 날엔 선배들은 복수로 대련만 하면 그들을 굴리기도 하고, 찍어 내리 누르기도 해보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당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보려 해보았지만, 하일의 특수한 능력 덕분에 눈뜨고 코가 베일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그렇게 10사단들에게 매번 당하다 보니, 나중에는 숨기는 자, 찾아서 훔쳐가는 자로 나뉘어 경쟁 아닌, 경쟁을 꾸준하게 이어갔다.
“오늘, 3사단 대장의 누이가 귀한 안주 챙겨왔다.”
무미건조한 바이안의 말투에서 나오는 정보에 그들의 표정의 사악함은 제곱에 제곱이 되었다.
“카드 한 장 더 써야겠다. 흐흐~”
카드 두 장을 챙기고 나서야 하일은 그 자리에서 스륵하고 존재감을 지운채로 숙소에서 떠났다.
왼쪽 가슴에 천공을 가리키는 하얗고 푸른 날개의 중심에 검과 방패가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현자의 돌을 상징하는 붉은 보석이 박힌 공백의 기사단을 지칭하는 문양이 세공되어 있는 은색의 풀 메일을 입은 바이안은 동료 기사들과 함께 단장을 따라 황궁, 황제의 집무실 근처의 정원에 도열해 있었다.
정기적으로 현궁의 일을 황제에게 보고하는 일에 단장으로 하여금 바이안이 가끔 한 번씩 황궁으로 따라왔다.
바이안이 휴일이나, 휴가에도 현궁 내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검만 가지고 놀기만 하고 황궁으로 얼굴 한번을 내밀지를 않아서, 바이안이 잘 지내는지 걱정하는 황제와 황후에게 알바트론 단장은 그의 소식을 알려 주기도하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라도 그의 가족에게 얼굴을 비출 수 있게 하기 위한 그의 작은 배려로 바이안을 끌고 다녔다.
집무실의 문 앞에는 두 명만이 황궁의 기사들과 함께 대기 중이었고, 바이안을 합한 세 명은 그 앞의 정원에 적당히 시간을 때웠다.
황후가 멀리서라도 그를 볼 수 있게 단장은 바이안을 그 근처에 대충 던져 놓았기에 하릴없이 누가 멍 때리기를 제일 잘 하는지 셋이서 열심히 경합을 펼쳤다.
하지만 그날 안타깝게도 황후에게 급한 일이 생겨 바이안을 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하는 론은 좀이 쑤셔 미칠 것 같은 마음을 누르며 단장님이 볼일을 빨리 마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 멀리서 자신들에게 가까워지는 인영을 발견하자마자 인상을 잔뜩 구겼고, 그의 입에서 절로 곱지 않은 소리가 나온다.
“아놔, 재수가 없으려니까.”
카이덴은 황태자가 된 뒤로 황제가 하는 일을 하나씩 배우기 위해 작은 일들을 받아 처리하고 있었고, 마침 황제에게 보고할 겸, 업무를 배워나가기 위해 찾아가는 중이었다.
하필 오늘따라 유독 날이 좋아서 평소와 다르게 정원 쪽으로 방향을 잡아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대기하고 있는 공백의 기사단들을 발견했다.
그 역시도 의도하여 만나는 것은 아니어서인지 풀 메일을 입고 서 있는 바이안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아미가 잔뜩 찌푸러져 풀릴 줄을 몰랐다.
세 명도 자신을 발견 한 모양인지 세상에서 제일보기 싫은 바이안을 합해서 자신을 향해 목례를 해보이자, 방금 전까지 짜증스러웠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바이안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행동에 그보다 위에 있다는 쾌감과 오만에 그를 한껏 내려다보는 이 기분을 어찌 표현하면 좋을까, 그리고 더 느끼고 즐기고 싶어졌다.
“네 놈의 꼴이 참으로 우습구나.”
가까이 가 서 보니 자신보다 분명 어릴 텐데도 키가 훌쩍 자라, 자신보다 얼굴 하나정도로 더 큰 것은 조금 불쾌했지만, 비꼬는 시비조로 그를 놀리는 것으로 그 불쾌함을 지웠다.
하지만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과 무 대답에 다시 팍 상한다.
“고개가 높구나. 하찮은 것들이 예의도 모르는 것이냐?”
보고 싶지도 만나고 싶지도 않으면 그냥 지나갈 것이지, 어떻게든 뭉개야 겠다는 카이덴이 자신들의 태도를 질책하는 행동에 론은 바이안을 대신하여 그 시비를 튕겨냈다.
“저희들은 엄연히 모시고 숙일 분은 따로 있습니다. 황족이신 황태자 전하께 하는 예는 방금으로 충분하다 봅니다만.”
너에게 숙일 예는 그 것으로도 과하지, 조아릴 가치도 의미도 없다는 뜻이 내포된 론의 말투가 당연히 뾰족할 수밖에 없다.
카이덴은 분명 자신이 바이안을 노려서 하는 말이었음에도 론이 바이안의 앞을 막으며 녀석의 보호자인 마냥, 나서는 행동에 기가 찼다.
“이름과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는 것들이 꼴에 기사라고 고개를 빳빳이 드느냐? 기사라고 해봤자, 모실 주인도 없는 껍데기들을 하찮다하는 것이거늘, 주변에서 그래도 기사라 해주니 그런 줄 안다니 멍청하구나.”
시비를 떠나서 기사의 명예와 존재의의를 깔아뭉개는 언사에 같이 있던 하일에게 분노가 옮겨갔다.
앞으로 나서려는 그를 바이안은 손으로 가만히 제지하면서 순간의 분노로 불화를 일으키지 못하게 막았다.
황궁과 현궁은 엄연히 다르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되는 사이기도 해서, 작은 불씨도 만들어서는 안 됐다.
그리고 확실히 모실 주인이 없는 실정에서는 공백의 기사단인 자신들이 불리한 것도 맞았다.
자신들은 개인이 아닌, 단체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움직여서는 더더욱 안 되었다.
“세금 낭비로군.”
공백의 기사단을 상징하는 은빛의 풀 메일이 제가 보기에도 세공도 좋았으며, 그 질도 좋아 못마땅함을 폄하해서 말을 지르자, 자신의 말에 주먹을 말아 쥐면서도 화를 참는 모습이 역력한 그들을 보면서 은근히 즐겼다.
저들이 그래 봤자 황태자인 자신에게 어찌 덤비겠는가.
게다가 자신이 황제로 추대되는 후에는 제 밑에 덤으로 낄 것들이니, 그들의 목은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그것은 카이덴의 착각이다.
아무리 공백의 기사단이 현제 황제 밑에 들어 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임시였으며, 그들을 데리고 있다 하더라도 처분은커녕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없는 공간에 위치해 있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런 것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바이안의 양 옆에 있는 녀석들은 일일이 반응이 드러나지만, 정작 바이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바이안은 네 까짓 게 이리 떠들든 저리 떠들든 쳐들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바이안에게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는 카이덴에게는 자신을 깔보는 것 같아 몹시 분했다.
확실히 그 추측은 비슷하게 맞았다.
‘웽 웽 모기 한 마리가 겁나 크네. 귀 간지러.’
바이안은 현궁으로 복귀하면 숙소에서 귀이개로 열심히 귀를 판 후에 소독을 해야겠다고 오늘의 할일을 추가했다.
어떻게 해서든 바이안을 깔고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들고 온 서류더미에 함께 챙겨온 잉크병이 손에 잡혔다.
그리고 더 생각할 필요 없이, 뚜껑을 열어 그대로 바이안의 메일에 쏟아 부었다.
“네 놈의 입장은 이 꼴이 제격이지. 내가 친히 내 손을 더럽혀 꾸며주니, 이제야 보기 좋구나.”
“뭐, 저...”
카이덴의 웃기지도 않은 만행에 당장에 덤벼들어 바닥에 눕히고 다구리를 해도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정작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바이안이 무덤덤하게 자신들을 제지해서 다시 분만 삭여야했다.
기사는 자신의 명예만큼이나 무기나 방어구역시 자신의 신체처럼 갈고 닦았다.
공백의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메일은 보이는 얼굴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서는 현궁 그 자체의 얼굴이다.
그렇기에 카이덴의 방금의 행동은 자존심 뿐만이 아닌 그 명예와 공백의 기사단 전체를 능멸하는 것이라 이래도 참아야 하는가, 막고 있는 바이안에게 눈으로 물어도 그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카이덴은 유치하지만 확실하게 분개할 수 있는 방법을 썼으니 분명 반응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때 바이안과 자신의 눈높이를 확실하게 알려 주려 했지만 자신과 마주친 바이안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을 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마치 돌 벽을 향해서 덤벼든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