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각자의 성격에 맞게 한창 어울리고 있을 중반 즈음에 홀의 다른 쪽 입구, 즉 상석 쪽의 입구에서 시종의 외침이 들려왔다.
“황제폐하, 황후마마 드십니다.”
“황태자전하 드십니다.”
홀에 있는 모두는 하던 여흥을 멈추고 허리를 굽히고 예를 보였다.
그리고 황제의 간단한 연설의 끝으로 다시 분위기가 올랐고, 본격적으로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춤을 즐기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자가 모처럼 뜻 깊은 생각으로 연 연회인데 당연히 와야지요.”
황후는 늠름하게 서있는 첫째가 참으로 기특했다.
황제도 크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황후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서로 편하게 즐기자며 자연히 다른 귀족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기 위한 시간을 가졌다.
‘아들아 부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황제는 귀족들의 사이에서 부드럽게 화답하고 있는 황태자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제폐하, 황후마마”
“대현자도 오셨소?”
황제부부가 나타나자마자 자리를 이동해 둘에게 가까이 갔고, 그러자 귀족들이 자리를 비켜주며 자연스럽게 넷만 남았다.
황후는 세이나와 바이안이 가까이 오자 테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몸을 틀었다.
“오늘은 이 공식적인 자리가 참으로 버겁습니다.”
“황후?”
행여나 주변에 들릴까 작은 목소리로 참기 힘든 이유를 털어놓았다.
“이리도 어여쁜데 껴안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처음으로 둘째가 제가 지어준 옷을 입고 멋지게 서 있는데 어찌 참겠어요.”
“허허허”
당장이라도 둘을 와락 안고 부비부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지 황후의 손가락이 따로 놀며 춤을 추고 있었고, 황제는 그런 황후가 사랑스러워 소탈하니 웃었다.
“황제폐하 이번 가을 추수는 어떠십니까?”
“풍년이 될 듯싶소. 이번에 거둬들이는 것도 다 정리가 되었소이다.”
다른 이들이 듣기엔 그말 그대로의 대화로 들리겠지만 황제와 세이나의 말의 속뜻은 전혀 달랐다.
‘준비 하신 것은 다 되셨나요?’
‘다 되었단다. 이미 주변에서 대기 중이야.’
그런 대화를 나누는 둘은 옆에서 좋아하고 있는 황후에 시선이 가자 서로 쓴 약을 삼키듯 삼켰다.
황태자의 초대에 황제는 황후를 데리고 나오지 않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황후는 좋아하면서 참석하겠다 했고, 황제는 그런 황후에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막내인 에바황녀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바이안.”
황제는 묵묵히 옆을 지키고 있는 둘째아들을 가만히 불렀다.
“예. 폐하.”
이제는 먼저 자신들을 불러주어도 좋겠건만, 아직도 한참 멀었나 보다.
그리고 자신을 아비라 부르지 않고 폐하라는 직함만으로 부르니 부모 된 입장에서 어찌 아프지 않을까.
“지금은 충분히 만족하고 있느냐?”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물어보았고 잠시 부자간의 시선이 엮여갔다.
“충분합니다.”
그리고 작지만 바이안의 입 꼬리가 올라가, 세이나를 소중하게 바라보면서 대답하는 아들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이 위로를 받은 기분이다.
‘그래. 잘 못 끼운 단추는 풀어서 다시 메어야지. 하지만 그 단추가 깨져 끼울 수가 없다면 과감히 잘라 떼어내야겠지. 그런 것이겠지.’
황제는 오늘 있을 일을 지켜보며 황태자의 태도를 봐서 두 가지의 결단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비로서 그 죄를 전부 자신이 짊어질 수 있었으면 하고 한편으로 바랬다.
이동하는 방향 순서대로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던 황태자의 시선에 어느덧 가까워진 세이나와 바이안이 잡혔다.
그리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알바트론경과 노엘경이 서로의 공통적인 이야기를 하며 사이를 돈독히 하고 있을 때, 알바트론경의 몸이 순간 흔들렸다.
“이보게!”
노엘경은 서둘러 그를 부축하자 알바트론경은 애써 그의 부축에서 벗어났다.
“아.. 괜찮소. 갑자기 현기증이..”
몸을 추스르며 고개를 든 그의 시선에 황태자와 대현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가까워지는 모습이 눈에 박히자마자 다시 한 번 몸이 크게 흔들렸다.
정확하게는 황태자의 옆에 서 있는 그의 파트너인 여인의 영향이 더 컸지만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다시금 몸을 가누지를 못하는 알바트론경의 두 어깨를 잡고 천천히 일으켜 세워주던 노엘경은 알바트론경이 고개를 푸욱 숙이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몸을 움칫 경직시켰다.
“틈.... 빈틈.... 죽...”
힘이 들어가지 않는 동작으로 노엘경의 부축에서 벗어난 알바트론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하나 없었고, 빛을 잃어 혼탁했다.
노엘경은 부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고, 서둘러 데리고 나가려 했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을 느끼고 마주보자, 황제는 고개를 저어보임으로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것입니까?’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하달되어 있는 명령의 반대편에 대현자가 따로 움직이는 것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설마 그가 엮여 있을 줄은 몰랐기에 마음이 착잡해져온다.
멍하니 서있는 그를 어쩔 수 없이 놓아두고 곧 있을 움직임의 준비를 위해 노엘경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애써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리고 서로의 독기를 숨긴 두 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자전하의 배려이신데 거절할 수는 없지요.”
서로를 칭찬하며 웃지만 속마음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가득해서인지 둘의 웃음이 어딘지 비어있다.
“아우를 참으로 많이 걱정했었는데, 이리 같이 계신 모습을 보니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태자전하야 말로 잘 어울리시는데요. 소문의 그 분이시죠?”
세이나는 잘 어울린다 칭찬을 하며 여인을 가만히 응시하니 그 여인도 무덤덤하게 같이 응시해왔다.
그리고 황태자는 부끄러운 듯 짐짓 큰 동작으로 어색하다며 웃었다.
크게 한번 휘두른 팔 동작에 의한 작은 바람이 바이안에게 미치자 은근한 향이 그의 코 속으로 들어갔고, 그 순간 몸이 묵직해져왔다.
아주 작게 흔들리는 바이안의 움직임에 황태자는 효과가 있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좀 더 크게 움직였다.
“주변에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알지만, 너무 오랜만인지라 내 아우 한번 안아보고 싶구나.”
이미 몸이 무거워진 터라 바이안은 갑자기 자신을 와락 껴안는 황태자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품에 안겨졌고, 황태자는 곧바로 떨어져 시원하게 웃었다.
갑작스럽고 생뚱맞은 황태자의 행동에 우루루와 세이나는 매우 황당했다.
‘뭐, 이런 병신이 다 있어?’
세이나가 그리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우루루는 그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잡이로 올라왔다.
‘가까이만 있어도 알아서 효과를 볼 터인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행동을 하는 멍청이일 줄이야.’
뻔해 보여도 뻔하고, 그의 얼척 없는 행동에 기가 막혔다.
황태자의 품에서 떨어지고 난 후 바이안은 주변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고 멍멍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것을 애써 버텨보려 했지만, 마른 나뭇가지가 쓰러지듯 풀썩하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모두가 호기심 반 호감 반으로 황태자와 대현자 쪽을 은근슬쩍 주시하고 있었기에 바이안이 쓰러지자마자 혼란은 순식간에 전체적으로 퍼졌다.
“!!!”
느릿하게 다리를 끌며 천천히 다가가던 알바트론단장은 바이안이 쓰러지는 것을 신호로 순식간에 마력을 운용해 그대로 세이나에게 짓쳐들어왔다.
하지만 카앙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몸을 굳히고 자신의 공격을 막은 이를 바라보니 물빛머리가 흔들리며 개구지게 웃는다.
로이에의 등 뒤에서 세이나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흔들리는 알바트론단장을 냉정히 주시했다.
“그러고 보니, 이 패턴 두 번째네. 첫 번째야 반이 막아주었지만, 지금은 다른 기사가 막고 있다는 것이 다른가? 뭐, 이제 그대에게는 내 말소리가 들리지는 않겠지.”
멀리서 주시하고 있던 황제는 바이안의 이상행동을 감지하자마자 주변에 준비하라 지시를 내렸고, 그가 쓰러지자마자 기사들을 움직여 관계없는 귀족들을 홀에서 내보냈다.
우루루는 톤 높이 없이 꺄악~ 한번 해주고 그 혼란스러운 군중들의 사이에 꼈다.
하지만 황궁 기사들의 지휘 하에 곧 빠져 나갈 수 있다 생각한 우루루는 서둘러 다시 몸을 뒤로 빼야만 했다.
언제 있었는지 알 수 없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하일이 그녀에게 검을 휘둘렀기에 피했지만, 자신을 공격한 사람이 다시 눈앞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 것에 눈썹이 꿈틀했고, 그 순간 등 뒤에 나타난 하일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목에 검을 가져가 대며 바닥에 앉혔다.
“쯧”
순식간에 제압이 된 우루루와 홀을 빠져나가는 타이밍을 놓친 몇을 제외하고 비어진 홀 안의 모습에 실패했음을 직감한 황태자는 태도를 고치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려 했지만,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황제의 시선과 검을 들고 다가오는 기사들에 불길한 생각이 엄습하자, 단 한 번도 다른 사람들에게 지어보이지 않았던 잔뜩 구겨진 인상을 보였다.
그리고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단장은 멈춘 상태로 고개를 이상한 각도로 돌리며 갸웃하다 바닥에 쓰러진 바이안을 한번 흘끔 보고 자신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가 없다 다시 판단을 내렸는지, 그대로 로이에를 옆차기로 날려버렸다.
몸을 미스릴로 변질시켜 처음의 공격은 막았지만, 눈치 채지 못 할 정도의 빠르기로 옆으로 날린 발차기에 버티는 중심이 달라서 그대로 날아간 로이에는 공중에서 방향을 꺾고 자연스럽게 땅에 착지했다.
이내, 앞을 막는 사람이 없어지자, 자신을 무심히 올려다보는 세이나를 꽉 쥐어 터트리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다시 한 번 헛수고가 되었다.
바닥에 손을 얹은 론이 세이나의 주변으로 맞춰 그대로 철의 창을 잔뜩 만들어 위로 뻗어 올렸고,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거리를 벌려야했다.
“단장님.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의 저희들,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르륵..”
두 번의 실패에 단장은 이미 머리가 엉켜 사람이 낼 수 없는 소리를 내더니, 침이 턱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아, 젠장.”
그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고 있는 공백의 기사단들은 욕 짓거리가 나오려는 것을 참아가며 처음 세이나에게 하달 받은 대로 세이나의 주변을 에워 쌓다.
그리고 세이나의 곁으로 돌아온 로이에가 자신의 오라버니의 능력에 인상을 쓰며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바닥은 돌인데 거기에서 철창이 왜 나와?”
“돌 밑에 흙 있다. 쇠로 만들어진 물건들도 참 많지. 고로 생각보다 주변에 철은 많다.”
로이에는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뒤로 물리고 주변을 경계했다.
분명히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어야 했는데 아직 못 빠져 나가 웅크리고 떨고 있는 시종이나 귀족들이 몇 있고,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녀가 상단에 서 있으면 황궁 기사들은 황태자와 대치하는 상태, 그리고 벽 쪽에 등을 기대고 보고 있는 할아범 일행들과 대현자를 지키는 자신들이 전부일 텐데 무언가 이질적이다.
그런 대치 상태에도 세이나는 주변에 아랑곳 하지 않고 쓰러진 바이안의 상태를 확인했다.
“오빠. 내 목소리 들려?”
“하, 하하...”
정신은 멀쩡해졌지만, 몸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바이안은 자신의 머리를 조심히 들고 제 무릎에 천천히 올려놓는 세이나를 올려다보며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비참해서인지 눈물이 자연히 흘러내렸다.
“오빠 탓 아니야.”
조심히 그의 눈가를 적신 눈물을 손으로 훔쳐 주며, 주변을 한번 스윽 훑은 세이나는 우루루가 있는 곳으로 고정시켰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날 것 같은데 어쩐다니?”
우루루는 이미 노림을 받은 것으로 자신의 정체는 진즉에 파악이 끝나 있다는 것을 아니, 연기하고 숨길 것도 없어서 평소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이라고는 티끌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와 잡혀있다고는 생각도 않는 덤덤한 태도에 눈이 자연히 가늘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