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퉁 부운 눈으로 자신의 키보다 큰 문을 밀어 방으로 들어가자,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담당시녀가 바이안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황자님 넘어지신 거예요?”
“....응..”
형의 뒤를 쫒다가 넘어져 먼지투성이에 손바닥과 무릎이 까져 피가 배어있었지만 정작 아프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시녀는 덤덤하게 대답하는 바이안이 익숙한지 요리조리 더 다친 곳은 없는가 살폈고, 눈이 붓고 빨개진 눈동자에 넘어져서 울었다 짐작하고 다른 시녀를 불러 약통을 가져오라 시킨 뒤에 바이안을 안아들고 침대에 앉혔다.
“잠시만 계세요. 금방 호~ 해드릴게요.”
“......”
약통을 챙기러 나간지 오래지 않아, 가지고 온 시녀에게 냉큼 받아 들고 토닥토닥 치료를 해주자, 약이 쓰린지 움찔하기는 하지만 아프다는 말이나, 어리광한번을 부리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는 바이안이 너무 안쓰러웠다.
시녀가 낮잠시간이라는 것으로 침대에 억지로 뉘이고서 다른 시녀에게 바이안을 맡겼다.
“잠시 황후궁에 다녀 올 테니까. 부탁 좀 할게.”
그때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시녀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았다.
작은 소리로 한 말인데 말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들은 바이안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기 시작했고, 시녀는 일 났다며 황급히 바이안을 안아들었다.
“하지...마 하지마... 흐어엉~”
“네. 안가요. 안 갈게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을게요.”
바이안은 떼를 쓰듯 울며 시녀가 황후궁에 가지 못하게 옷깃을 꼬옥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애를 쓰다가 살살 달래주는 시녀의 품에서 지쳐 잠이 들었고, 그 후에야 시녀는 간신히 여린 황자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한 번씩 다쳐서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의원을 부르고 황후마마께 보고를 드렸었는데, 바이안은 경기를 일으키듯 거부하고 울어댔다.
몇 번의 반복에 어쩔 수 없이 약통을 따로 구비해 자신이 치료를 해 드리는 것으로 끝냈고, 절대로 황후마마께 아무 말씀도 전하지 않겠다고 안심을 시키는 것으로 일단락은 지어졌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어서 바이안이 잠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한 후 다른 시녀에게 손짓으로 다녀오겠다, 신호를 보내고 조용히 황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많이 다쳤더냐?”
“넘어지신 것이라 살짝 피가 베여계신 정도이옵니다.”
“그렇구나.”
“죄송합니다. 소인이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황후는 고개를 조아리며 어쩔 줄 모르는 시녀의 손을 잡고 다독여주었다.
“그것이 왜 그대의 잘못인가?”
“하오나..”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이안황자가 어디로 사라지지 않게 지켜보아도 한 순간의 틈만 생기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말을 하고 싶지만, 핑계밖에 되지 않기도 했고, 그 뒤에 다쳐서 돌아오면 다 자신의 잘못 인 것 같기에 진심으로 죄송해했다.
그런 시녀의 마음을 아는지 황후는 오히려 괜찮다 말해주었다.
“황후마마 알고 계시다는 것은..”
“그래. 늘 그랬듯이 티도 내지 않고 모른 척 할 터이니 마음 쓰지 말게.”
고개를 숙이고 시녀가 나간 뒤에 황후는 홀로 방에 남아 한 숨만 반복해서 내쉬었다.
그런 황후에게 시녀장이 다가와 조심히 그녀를 달래주자, 황후는 시녀장에게 자신의 답답함을 풀어냈다.
“고작 세 살일세. 세 살. 어미나 아비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마냥 좋다고 뛰어다닐 나이야.”
“네. 압니다. 마마.”
양 손을 올려 들며 소리치듯 뱉어내던 황후는 두 손바닥을 제 얼굴을 감싸며 팔을 세운 팔꿈치를 앉아있는 허벅지에 얹었다.
“처음에 다쳤다기에 놀라서 달려가니, 안 다쳤다며 치료를 거부하다 내 얼굴을 보자 통곡을 하더구나. 하아... 폐 끼쳐서 죄송하다는 말이 세 살 베기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인가?”
후에 다시 다쳤다는 말에 찾아 갔을 때에는 왜 또 말했냐며 입에 거품을 물정도로 기겁을 하기에 오늘처럼 이렇게 몰래 보고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미와 아비에게 가까이 오지도 않으려 하고, 무엇이 가지고 싶다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주어도 싫다, 필요 없다 라니.. 둘째에게 무슨 잘 못 된 점이 있는 것인지, 의원을 불러 이야기 해보아도 나오는 것은 없지 않나, 혹여 주변에 무슨 이상한 것이라도 있나 자세히 살펴보아도 없으니, 이 답답한 어미의 심정을 어찌 풀어야 하겠나.”
“조금 더 성장 하시면 나아질 수도 있다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시녀장의 말은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아~ 나아질 때까지 언제 기다리겠나, 어미 품이 좋을 때이건만, 혼자 있으려 하고 잠도 혼자 잔다며 극구 내 품에서 떨어지는데. 간난 아기 때만 이 품에 안아 본 듯하네.”
“마마..”
더 이상 그녀에게 뭐라 위로를 해줄까, 어떤 위로도 그녀의 마음을 도닥여 주지는 못할 것임에 시녀장은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세일리아라도 있었으면 상담이라도 했을 텐데. 하아~”
4년 만에 황궁에 경사가 터졌다.
예쁜 황녀의 탄생에 갓 태어난 아기를 중심으로 가족내외가 모여 행복한 이때를 즐기고 있을 때, 황후와 아기가 누워있는 침실이 바로 보이는 작은 틈에 조그마한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렀다.
“우와.”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숨어 다니다 보니 우연히 비밀통로를 발견한 후에 비밀통로를 찾아다니는 것이 하나의 놀이가 되었던 바이안이 제 몸에 딱 맞는 어두운 통로 안에서 열심히 방안을 보고 있었다.
한참을 보더니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왼손을 펴 오른손을 아래쯤으로 해서 마주 대었다.
“이쯤 하려나... 작다.”
그러다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고 히죽 웃다가 다시 한 번 안을 본 뒤에 쪼로록 통로를 따라 반대로 나온 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인기척이 멀어지자 힐끔 돌아 본 뒤에 다시 황후에게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볼에 쪽하고 키스를 해주었다.
“왔다 갔구려.”
그러면서 작게 속삭여 주자 황후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 했다.
황녀 에바가 곧 태어날 것이라고 바이안에게도 알렸지만 바이안은 안 간다는 말만 하고 방에 있었다.
물론 그것은 말만 이었고 그도 옆에서 여동생이 보고 싶었지만, 괜히 자신이 있다가 모두 불편해지고 동생이 안 좋아 질까봐 몰래 숨어서 본 것이었다.
황궁에 때 아닌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소규모의 연회가 치러지는 가운데, 카시어스가의 장남이 답답함을 못 참고 홀 안에서 탈출을 감행하여 카시어스백작의 울부짖음이 한차례 울려 퍼졌다.
정작 그 소동의 원인은 희희낙락하며 생각 없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면서 모험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연회가 이뤄지는 궁과 멀리 떨어져 길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멈칫한 것도 잠시였고, 뭐 어떠냐며 더 깊이 안으로 직진하는 대담함에 드디어 모험의 끝을 알리 듯 작은 나무판으로 엉성하게 쌓아 만들어진 집을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 빛냈다.
“우와아~ 비밀기지다.”
비밀기지를 향해서 후다닥 달려가니 이미 그 기지를 점령한 주인이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치잇. 한발 늦었나?”
“......”
갑자기 들리는 소음에 눈을 뜬 바이안은 파란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투덜대는 낮선 침입자에 살짝 놀랐지만, 알아서 투덜거려주는 덕분에 의도를 눈치 채고 미련 없이 안에서 나와 그대로 지나갔다.
“어어?”
론은 자신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냥 가는 바이안의 팔을 서둘러 확 잡았다.
“야. 너 뭐야?”
“??”
“우씨. 왜 그냥 가?”
“..필요 없으니까 너 가져.”
잡힌 팔을 거칠게 뺀 후에 손가락으로 비밀기지를 가리키자 무슨 뜻인지 알아 챈 론은 그대로 바이안의 정수리를 손바닥을 세워서 내려쳤다.
“아야. 왜 때려? 너 준다잖아.”
“저거 네가 만든 거 아냐?”
“그런데 뭐?”
“그럼 네 거잖아. 뭘 나한테 줘?”
“뭐라는 거야? 가지고 싶다며. 그럼 네 거지.”
뭔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은 것 같은 아리송함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금 손날을 세워 머리를 한 번 더 가격했다.
“아야!”
“비밀기지는 막 함부로 넘기고 하는 거 아냐. 우씨. 넌 낭만을 몰라.”
이번에는 바이안이 낭만이라는 단어에 아리송함을 눈에 가득 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다시 만들어. 이번에는 우리 둘만 아는 기지로 다시 해.”
바이안의 다섯 살 인생에서 생전 처음 만나는 또래였고, 성격도 뭔가 막무가내인 론 덕분에 이상하게 말려들어 자신도 모르게 론과 함께 새롭게 비밀기지를 증축하고 있었다.
둘이서 둘이 들어 갈 수 있는 공간을 늘린 후에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그 기지를 내려다보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과 너무 자연스럽게 함께 있는 론이 신기해 물었다.
“근데 너 뭐야?”
“나? 사람.”
“나도 사람.”
좁은 공간에 얼굴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 둘은 서로 마주보다 히죽하더니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아하하. 너 진짜 웃긴 사람이구나.”
“그러는 너는 킥킥”
바이안은 무릎을 모아 고개를 기울여 기댄 자세로 손가락으로 론의 볼을 톡 찔렀다.
“이상하네. 이쯤 되면 불행해져야하는데 넌 아무렇지 않네.”
“응? 무슨 소리냐 그거.”
“별로...”
론이 제 말에 파고들어 오려하자 바이안은 말을 흐리며 무릎에 얼굴을 완전히 묻고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인 론은 양 손을 살짝 오므려 공격자세를 취하더니 그대로 바이안의 옆구리를 공략했다.
“으햐햐 하지마. 간지러어.”
“불어라. 무슨 말이냐”
처음 겪는 간지럼 고문에 금방 항복을 외친 바이안은 자신과 있으면 불행해진다는 말등, 이유를 설명해 주고 은근히 론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히 인상을 찌푸리고 멀리 떨어질 것이라 짐작했지만 론의 반응은 바이안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 반대였다.
“뭐래냐?”
“에?”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진짜로 있다면 이 몸이 다 튕겨 내주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먹 쥔 손으로 제 가슴을 퉁 치며 턱을 치켜세운 론은 지금 자신은 매우 늠름한 어른 같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작 바이안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삐질 땀을 흘리며 다시 제 가슴을 퉁 쳐보였다.
“에헴!”
“......”
“우 우리 아빠 대따 쎄거든? 나도 대따 쎄! 그런 것들 내가 다아 이겨.”
역시나 큰 반응이 없어서 씩씩대며 강함을 어필도 해보았지만 여전히 조용한 바이안이 못마땅해 그대로 꽈악하고 손을 마주 잡았다.
“아무렇지 않다는 거 오늘 내가 보여주면 되잖아. 이렇게 계속 있으면 알게 될 걸?”
“계속?”
“응. 계속. 그리고 아무렇지 않으면 쭉 친구하기다? 내가 친구 해줄게.”
“친구... 비시시시”
잡히지 않은 반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바람이 입에서 세어 나오듯 웃었고, 이내 서로 수다를 떨었다.
물론 거의 대부분 론이 떠들고 바이안이 듣는 것 이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재미있다 느끼는 날이었다.
해가 기울어 가도 나타나지 않는 아들에 뒤늦게 무슨 일이 났구나 하며 카시어스 백작은 그제 서야 허겁지겁 론을 찾아다녔다.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기도 하고, 늘 사라져 어딘가에서 놀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알아서 나타나던 아들이라 사라졌을 때, 아주 잠깐 울부짖고 난 뒤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 실책이었다.
이 곳이 거대하고 웅장한 황궁이었고, 그렇기에 길을 잃기도 쉽다는 것을 너무 간과했음에 자신의 자식에 대한 무심함을 자책하며 이리저리 찾았다.
그런 그를 목격한 황제는 기사들을 풀어 직접 도와주었고 조금 기다리니 기사한명이 다가와 황제에게 읍했다.
“폐하. 찾았습니다.”
“그러한가?”
“예. 카시어스 영식이 2황자 전하와 함께 계십니다.”
“바이안이랑?”
기사를 시켜 카시어스 백작을 데리고 가라 명령을 내리려다가, 뒤에 들려온 바이안의 소식에 생각을 고치고 백작과 함께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황궁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곳, 구석 수풀에 엉성하게 만들어진 작은 판자 집에서 서로 손을 잡고 머리를 기댄 채로 잠이 들어 있는 바이안과 론을 부드럽게 내려다보면서 황제는 자신의 옆에 서있는 그를 불렀다.
“카시어스 백작.”
“예. 폐하.”
“궁에 자주 오게. 거의 매일 오게. 그것이 어렵다면, 자식이라도 내 놓게.”
“예. 예?”
“아. 말이 미끌어 졌나보군. 허흠! 자주 오.게.나.”
말을 딱딱 끊어가며 손으로 아이들을 가리키니 그 말뜻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기에 허리를 숙이며 황제의 말을 받았다.
그 후부터 거의 매일 바이안을 찾아 놀러오는 론 덕분에 요즘 바이안의 얼굴에 어색하나마 웃음이 많이 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