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포옥 들어가 히데아의 잠 시중을 받고 있을 때 가까이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주군. 하일입니다.”
“옹?”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워 머리맡의 벽에 몸을 기댄 후에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심장부근에 오른손을 가져다 댄 하일을 맞아주었다.
“일주일간 고생했어.”
그의 노고를 치하해 주며 곧바로 하일의 보고를 받았다.
“황태자는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비슷한 일과만을 보냈습니다.”
하일의 입에서 황태자에게 기본적으로 대우해야할 단어를 완전히 뺀 채로 보고했다.
이미 황태자를 주인의 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인지 은근히 그를 까는데 망설임이 없다.
“아무것도?”
“다만, 성격이 이중적이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그 성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혼자서 성질 낼 때 반 씹지 않던?”
“네. 바이안경을 생각할 때만 온갖 분풀이를 했습니다.”
하일은 그림자에 숨어서 황태자의 행태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말 같지도 않은 분풀이를 해대는 소리에 기가 막혔고, 동료를 있는 대로 씹어 대는 것에 화가 치밀었기에 지켜보는 동안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황족인 바이안의 과거를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덕분에 그 정도를 더 깊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저런 놈이 황제가 되었을 때의 앞날이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래도 의심스러운 부분은 찾았나보네.”
세이나의 말에 하일은 작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혼자 잘도 떠들어 주어서 생각보다 편히 들었습니다. 상당히 어렸을 때부터 바이안경을 내치기 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듯합니다.”
“누군가?”
“죄송합니다. 이름이나 조직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고, 황태자는 그들이라고 표현을 하여 자세히는..”
“그들? 흐음.. 조직이 맞네. 그리고 적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겠고.”
하일의 말을 잘랐던 세이나는 마저 보고하라고 했다.
“확실히 그런 듯합니다. 조만간 주군을 뵐 계획을 짜는 듯한데, 인형이라 지칭한 인물을 위해 빈틈이 어쨌다 하면서 무언가를 궁리했지만 그 소리는 작아서 자세히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 그거면 됐어. 인형? 빈틈? 아! 그래서 그랬구나.”
“예?”
“인형이라고 표현해주니까 딱 떠오른 것이 있어서 그 부분은 내일 모두 모이면 말해줄게.”
손뼉을 짝 치며 활짝 웃었던 세이나는 궁금해 하는 하일에게 배시시 웃어 보여주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반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알겠지만, 이 것으로 적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 완전 확신이 되어버렸어.”
세이나는 기운차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후에 황제폐하와 황후마마가 받을 쇼크와 상처를 생각하면 그 속은 가볍지 못했다.
“황태자의 옆에 있는 여인이 그와 대화할 때는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여 많은 부분은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은밀에는 하일을 따라올 자가 없는데, 그가 가까이 가지 못했다는 말이 신기해졌다.
“하일경이 가까이 가지 못했다고?”
“죄송합니다.”
“엥? 그게 왜 죄송한데? 아무튼 그래서?”
“떨어진 곳에서 지켜본 바로는, 이성의 사이가 아닌, 거래를 하는 사이같이 보였습니다. 마주한다 하더라도 대화를 거의 하지 않고, 마치 주변에 보여주기 위해 만나는 듯했으며, 대화를 할 시에는 말을 서로 섞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일은 하나하나 세세하게 보고하려 애쓰며 계속해서 입을 떼었다.
“그리고 처음에 가까이 있었던 짧은 순간에 들었던 말은 그녀는 황태자를 당신이라 표현한 것과, 황태자가 네 인형이 멍청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도뿐입니다. 후에 그 여인이 제가 숨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급히 몸을 빼었습니다.”
“하일경. 잘했어. 고생 많았어.”
그의 노고를 다시 한 번 칭찬해 주고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고 있을 때 히데아가 조용히 물 잔을 건네주었다.
“세이나님. 밤이 많이 늦었어요.”
“고마워. 조금만 더 있다가 잘게.”
세이나가 물 잔을 받아 들자 히데아는 하일에게도 물 잔을 건네주었다.
하일은 세이나가 물러가도 좋다는 말이 없어서 처음 자세 그대로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대기했다.
“난 질질 끄는 것은 딱 질색이란 말이지. 그냥 짧게 끝내버리자. 그래야 나도 이 답답한 감금에서 해방 될 테니까.”
가벼움 속에 숨긴 지혜와 판단력을 보여주는 세이나를 마주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해도 주군의 코앞까지 다가오지 못하게 꼭 지켜드리리라 하일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산처럼 쌓인 업무에 사인을 하던 황제는 봐야할 서류가 많이 남았음에도 도중에 펜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놀랍군. 그대가 들어와서야 눈치를 채다니.”
“이런 식으로 폐하를 뵙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폐하. 대현자이신 세이아나님의 직속 호위단의 대장을 맡고 있는 마힐튼 하일이라 합니다.”
황제의 지척에서 작게 목례를 해 보이는 하일을 황제는 새삼 경탄하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마힐튼가.. 그렇군. 그대의 집안의 능력은 한번 들어본 적이 있지. 오늘 몸소 체감을 하니 한편으로는 무서운 능력이야. 아무리 짐이라 하여도 잘 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겠어.”
황제의 솔직한 발언에 하일은 다시 한 번 목례를 해 보였다.
“그대가 이런 방식으로 짐을 본다는 것은 세이나, 아니. 대현자가 아무도 모르게 짐에게만 전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인가?”
“예.”
황제의 생각이 맞다 긍정을 하며 하일은 자신의 품에서 서신을 꺼내어 황제에게 건네주었고, 황제는 그 서신을 냉정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다 읽은 후에 바로 불에 태워 없애버렸다.
“후우... 그 아이를 믿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니지만...”
서신의 내용을 파악한 황제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세상 모든 근심을 한 번에 떠 맡은 표정으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주군께서 따로 전해드리라 한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죄송해요. 너무 아파하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라고 하셨습니다.”
“하아~~ 알겠네. 그만 가보게.”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또 언제 나갔는지 모르게 하일은 황제의 집무실에서 사라졌고, 홀로 남은 황제는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게 한 뒤에 창밖을 응시했다.
“다 내가 부덕해서 그런 것이야. 다 내 잘못이다. 어디서부터였느냐... 무엇이 그리... 허....”
황제는 세이나를 믿고 있지만, 세이나가 보낸 서신의 내용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읽고 나서야 과거의 상황들이 납득이 되었고, 그것을 보지 못한 자신을 질책했다.
“여봐라.”
황제가 큰 소리로 부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 한명이 들어와 그에게 부복했다.
“노엘경을 부르거라.”
“충.”
기사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인 뒤, 빠르게 나갔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노엘경이 도착했다.
“폐하. 노엘입니다.”
“모두 물러가거라.”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물린 황제는 소파에 대충 앉아 노엘을 올려다보았다.
“노엘경... 오늘은 신하가 아닌 친구로 있어 주겠는가?”
황제의 말에 노엘경은 예의를 차렸던 자세에서 고개만 끄덕이며 앉으라 명령이 나오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황제의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이리 근심어린 표정을 보는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노엘경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친우를 대하는 말투가 나왔다.
“있지.. 검이 심장을 뚫은 것도 아니건만, 이리도 심장이 찢기는 기분은 처음일세.”
“트로벤... 자네 괜찮은가?”
황제의 이름을 부르며 곧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를 걱정했다.
“이자리가 무어라고, 황제가 무엇 이길래. 사랑하는 가족하나도 헤아려 주지도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고 서 있어야 하는 것이 너무 싫네.”
노엘경은 자리에 일어나 그의 오른편의 소파로 자리를 옮겨 황제와 가까이 앉고 가만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 때 즈음에 하일이 돌아와 보고를 마친 후 세이나는 몸을 틀어 자신의 옆에 서있는 바이안에게 살풋이 기댔다.
“내가 생각해도 나 참 잔인하다.”
바이안은 자신을 책망하는 세이나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황제폐하도 나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나도 싫어. 위에 서 있는 이는 개인적인, 사적인 것 어느 하나도 인간적으로 내비치지도 못하고, 그것이 잔인할 지라도 선택하고 결정지어야 하잖아. 자신의 살을 도려내더라도 말야. 그리고 고고하게 만인을 내려다 봐야겠지. 위에 있는 자일수록 그 자신이 무너지게 되면 밑에 있는 이들까지 영향이 끼치게 되거든. 그렇다고 숨겨서도 안 되고 외면해서도 안 돼.”
방안에 있는 하일과 론, 바이안 그리고 히데아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각자 생각에 잠겼다.
“황제, 대현자. 그 자리에 있기에 해야 되는 책임과 의무. 그 것은 타인이 짊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당사자야. 폐하께서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알면서도 아셔야 하니까 알려드렸어. 가족만을 보기에는 이 세상에 있는 생명들의 무게가 더 무겁거든. 그런 자리에 서 있으니까. 폐하나 나, 둘 중에 한명이라도 잘못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거야.”
상당히 무거운 이야기지만 틀린 말은 아니기에 세이나와 황제가 이번에 움직이는 것이 잘 못 되지 않도록, 자신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안타까웠다.
“그 개새끼는 날 너무 만만하게 봤어. 나 그렇게 안 착해. 착하기만 하면 이 자리에 못 있지.”
그러면서 세이나의 입 꼬리가 진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녀가 지칭한 것은 이번에 노릴 황태자가 아닌 그 뒤의 누군가일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