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의 보수 건으로 오랜만에 일을 하던 세이나는 문득 한 가지가 떠올라서 하일을 불렀다.
한동안 보지 못한 할아버지들의 안부였다.
“외할아버지랑 할아범은?”
“그..”
평소라면 즉각 대답을 하던 하일이었건만 이상하게 말끝을 흐린다.
“뭔데?”
“후... 황궁에 놀러가셨습니다.”
“......”
영혼이 짐 가방을 발로 뻥 차면서 밖으로 나와 잠깐 가출을 하고 돌아온 세이나는 발광했다.
“아니. 두 분은 황궁에 보물이라도 숨겨놨어? 이제는 아주 두 분이서 사라지네. 손녀딸을 볼 생각은 안하지?”
거의 매일을 황궁에 출근하는 두 분을 잡으러 자리에 일어나 갈 채비를 하려는 세이나를 하일이 허겁지겁 말렸다.
“찾아가셔도 못 뵈실 듯합니다.”
“왜 못 봐?”
“그... 황족 전용 온천에 몸 지지러 가신다고....”
“......”
“네...”
다시 혼이 가출가방을 집어 던지며 빠져나가려는 것을 애써 붙잡고 있는 세이나의 앞에서 론은 배를 잡고 대성통폭을 했다.
“푸하하하하 아이고 배 찢어진다. 두 분의 손녀딸 맞긴 맞나보네. 크히히힉~ 똑같네, 똑같아.”
말이 무에 필요할까? 세이나의 손가락 하나에 바이안은 늘 그렇듯, 자연스럽게 마력으로 론을 벽에 날려버렸다.
바닥에 끙끙 앓는 론을 보고 만족한 세이나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하, 참~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땅에 있을 건 다 있네.”
할아범에게 외할아버지를 소개시켜 드렸을 때, 다행히도 둘은 마음이 맞는지 금방 친해지셨고, 오랜 죽마고우처럼 많은 것을 함께 하시기 시작해 한편으로 안도했었던 것도 잠시, 단지 그 마음이 맞는 것이 과했다.
“보나마나 폐하께서 초대하신거지?”
“네.”
“황제라는 자리가 내 예상보다 한가한 자린가보네..”
진지하게 그 자리를 고찰하는 세이나의 주변에서 모두는 좌우로 거세게 붕붕 저으며 힘껏 부정했다.
지옥 적으로 일이 많은 자리지, 절대로 한가한 자리가 아닌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현궁의 구석에서 블론드빛의 여인이 중년사내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운을 떼었다.
“너의 주인이 누구더냐?”
“우루루님이십니다.”
만족 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나른할 뿐이었다.
특수한 방법으로 머리색을 바꾸고 궁 안으로 들어온 우루루는 무릎을 꿇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내의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바싹 가져다 대었다.
“빈틈이 보이면 바로 죽여라.”
“...네.”
명령을 내릴 때는 길 필요가 없이 짧으면서 전달만 잘 되면 되기 때문에 다른 추가적인 명령은 필요가 없었다.
사내가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에 다른 볼 일을 보기 위해서 그를 두고 자리를 떠나는데, 몸을 숨길 필요가 없는지, 당당히 궁을 거닐며 자리를 벗어났다.
현궁엔 대현자를 알현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넘쳐났기 때문에 간간히 돌아다니는 귀족들이 보였고, 귀족적인 그녀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분도 완벽히 준비가 되어 있어서 그녀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장소를 바꾼 우루루는 이번에는 전혀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인물과 얼굴을 맞대었다.
“오랜만이로군. 두 번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찾아 왔는가?”
“요즘 심기가 상당히 좋지 못해 보이십니다.”
“...좋을 리가 없지 않나? 그 자식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무덤덤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우루루에게 그는 분노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원하시는 모든 것을 다 가지시지 않았나요? 저희들의 계약에 문제라도 있을까요?”
“없다. 그저, 그 자식이 좋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날 뿐이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분위기를 조성하고 누군가를 특정지어 분노하게 키워냈지만, 우루루는 질투와 시기에 눈이 먼 이를 경멸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화를 내든 말든 그녀에겐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다.
“계약의 대가를 받으러 왔습니다.”
“...무언가?”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자신에게도 좋을 일이라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 분노를 푸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나의 분노를 풀어라?”
“예. 늘 하시던 일이 아니신가요? 그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을 부수기만 하는 간단한 일이지요. 아니면, 그자의 그 자체를 없애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고요.”
고찰을 하는 그에게 우루루는 간단하게 일러주었다.
“저의 인형이 움직일 것입니다. 스푼만 얹으시면 되는 간단한 일이기도 하지요.”
자신의 할 말만을 했을 뿐이지만, 우루루는 볼 일은 끝났다고 자리에 일어나 나가기 직전에 다시 운을 떼었다.
“결과는 제가 지켜볼 겁니다.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길..”
인사도 예도 없이 우루루는 그렇게 그를 놓아두고 헤어졌다.
우루루가 방에서 나오자, 한껏 예쁘게 꾸미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들이 있었다.
우루루가 서있는 자리는 맞선자리였기 때문에 시종들의 안내를 받으며 한명씩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만나기 위해 통지를 날렸고, 의심 없이 만나기 위해서 그가 맞선자리를 만든 결과였다.
“쯔.. 이런 하찮은 방법밖에 생각하지 못하다니..”
그의 하나하나가 전부 마음에 안 든다.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어.”
그가 정말 싫은지, 아주 미세하지만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작게 잡혔다.
황궁 안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곳, 그림 같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의 중심에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뜨끈한 온천 속에서 옷을 벗고 가슴 밑까지만 몸을 푹 담그고 마음은 이미 천국에 가서 세상만사 별거 없다를 부르짖어가며 술을 마시는 세 명이 있었다.
“끌끌끌끌”
“허허허허”
“허허허허”
황제는 감탄스런 표정으로 할아범의 몸을 기탄없이 칭찬했다.
“어르신 몸이 상당히 좋습니다.”
“끌끌~ 그러는 폐하야 말로 좋습니다. 그랴~”
“어이쿠. 저만 말라깽이네요. 허허 저도 두 분을 본 받아서 늦었지만 운동을 좀 해야겠습니다.”
“말라깽이라니요. 연세에 비해 피부가 상당히 곱지 않습니까? 허허허”
서로 신체의 장점을 칭찬하며 분위기는 무르익어간다.
“어르신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이미 범인이 아니시라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오랜만에 투기가 끓더군요.”
“끌끌끌끌”
“말이 나온 김에, 두 분께서 이참에 한번 대련해보심은 어떤가요?”
세이나의 외할아버지인 하이론 남작은 이미 파지직 투기에 몸이 근질거리는 둘을 붙였다.
“두 분의 무예를 저는 나무 그늘에서 간식이나 먹으며 즐기렵니다.”
하지만 투기가 그 이상 세 지지는 않자, 그는 하나를 내놓았다.
“이기시는 분께는 레이디 50년산. 어떠십니까?”
남작이 하고 있던 사업이 주조업이라서인지, 이번에는 둘에게 완벽히 먹혀들었다.
세이나의 외할아버지는 가문 대대로 내려온 주조업, 할아범은 대륙에서 주조의 대가였으니, 둘의 만남에 어색함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 맞잡은 손을 틀어쥐고, 불꽃을 튀기는 둘의 손 위에 남작이 약속의 증인으로 한 손을 얹음으로 결정이 났고, 간단하게 날이 정해졌다.
“이제, 저희가 모인 진정한 이유를 들어봅시다.”
황제의 주체로 모인 셋은 이번에는 심각히 머리를 맞댔다.
“후.. 저는 두 아이가 꼭 결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끌끌끌 이미 약혼까지 한 사이고, 서로 좋아하는데 무에 그리 어렵답니까?”
“이보게. 이 곳은 그게 그렇지가 않으이~”
남작은 할아범에게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황제는 그 말에 씁쓸하게 웃어가며 어려운 이유를 덧붙여 설명했다.
“단순히 법을 바꾸면 된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르신. 세이나, 그 아이가 대현자가 되므로 이미 약혼도 무용지물이지요.”
“끌끌끌 천공의 땅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천국 같은 곳에서 산다고만 생각혔는디, 참으로 어렵게 사는 구먼~”
태연한 할아범과는 다르게 천공의 땅에서 사는 둘은 틀도 많고 꽉 막힌 그들의 삶에 동시에 한 숨을 내쉬었다.
“법으로 규제가 되어있다면 차라리 낫겠지요. 아주 그냥 힘으로 콱! 후....”
황제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입에 힘을 주다가 금세 풀고 고개를 떨궜다.
“그 자리가 아주 특별하고 특수합니다. 역사책에서도, 그 어떤 기록을 뒤져보아도 그 자리에 앉은 이가 결혼을 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대현자라는 자리를 설명하다 황제는 하필, 세이나가 그 자리의 주인이라는 것에 아쉬워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많은 이들의 보호 안에서 한평생을 현자의 돌을 유지하고 컨트롤 하는 일에만 힘을 쓰는 곳이 그 자리입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고부터, 지금까지 쭉 모두가 그러했듯이 온전히 홀로 그리 살지요. 인간들의 법이 아닌, 하늘의 법인가 싶습니다.”
다시금 황제와 남작, 둘의 한 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에 할아범은 더 깊게 웃었다.
“끌끌끌~ 이미 둘이 딱 붙어 있고, 서로 알콩달콩 한디, 지금 와서 굳이 결혼을 하든, 하지 못하든 뭐 어떱니까? 저는 젊은 것들이 알아서 잘 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랴~”
속 편한 할아범의 말에 작은 위로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세이나가 대현자라고 하더라도, 바이안황자 역시 그녀의 기사로서 옆에 늘 함께 있었고, 결혼이 안 될 뿐이지, 연예는 자유지 않은가? 서로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늙고 죽는 것에는 차이가 없으리라 싶어지자,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된다.
하지만 황제의 오랜 소망이라 포기가 안 되었다.
“둘이 결혼하여서 손주 얼굴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 꿈이었거늘.. 꼭 채우고 싶었던 제 욕심이지요.”
“끌끌끌끌~ 그건 쇤네도 아쉽습니다.”
“허허허... 증 손주.. 후우~”
역시 이럴 때는 술이라 셋은 잔을 부딪치며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래도 역시, 저는 포기 않고 둘을 맺어줄 방법을 계속 찾을 겁니다.”
강하게 다짐하는 황제를 응원하며 셋은 다시 잔을 들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원 샷 했다.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끌끌끌끌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