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루가 도망친 지도 시간이 꽤 지났지만, 황제 측의 기사들이 홀 안에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고 있어서, 안에는 아직도 현궁의 기사들과 황궁의 기사들 그리고 황제와 세이나 뿐이었다.
중간에 충격으로 잠시 혼절했었던 황후가 깨어나자, 황제는 눈물범벅으로 혼란해하면서 힘들어하는 황후를 조심히 안아 어르고 달래서 에바에게 그녀를 부탁해 데리고 나가 쉴 수 있게 했다.
현제 홀 안에 있는 이들이 자신들 뿐이라 황제는 공개적으로 보일 때의 예를 지우고 세이나를 편히 대했다.
“이제 어찌 하실 건가요?”
“어찌 할 무언가가 있겠느냐? 내 자식이라고 예외를 둘 생각은 없단다.”
황제는 자신이 걱정스러워 묻는 세이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애써 어색하게라도 웃어주었다.
그런다고 해도 역시 좋지 못한 감정을 숨기기엔 이번은 너무 힘이 드는지, 세이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 듯 손을 얹은 채로 옆에 같이 서있는 바이안에게 방향을 돌렸다.
“지금은 괜찮은 게냐?”
자신을 걱정하는 황제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조아렸다.
“괜찮습니다. 폐하.”
“그렇구나... 후..”
바이안이 기사의 길로 가겠다고 선언한 뒤로부터 단 한 번도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아니하는 그의 말투에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주 가끔 만날 때, 사람들이 없는 사적인 공간에서라도 부를 수도 있건만, 바이안은 철저하게 벽을 치고 완벽한 타인이 된 듯 딱딱해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세이나가 나타난 뒤로 한 번씩 만나는 날에 세이나의 옆에서 간간히 짓는 미소와 편한 모습에 다시 예전의 밝았었던 그때처럼 좋아 질 것이라 기대를 했지만, 호칭도 여전했고, 태도 또한 여전하여 뭇 서운하다.
“이제는 그만 하여도 되지 않겠느냐?”
무엇을 지칭하는 질문인지 따로 물어 보지 않아도 알아들은 바이안은 여전히 딱딱함을 유지했다.
“시작한 것이 없을 진데, 그만 할 것이 있겠습니까.”
완벽한 거부 의사에 다시금 그 이상 대화를 이을 수가 없게 되었다.
황제는 둘째가 비록 멀리 돌아갔지만, 그 아이가 있었던 제자리로 찾아 올 것이라 믿었었다.
세이나가 돌아오면서 대현자로 자리를 잡고 처음 내린 명으로 황족으로서의 권위를 돌려받았고, 특히나 오늘 황후가 디자인과 의상을 제작하는 이들과 함께 열심히 만들었던 옷을 입고 황족의 문양이 새겨진 망토를 두른 아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복받쳐 올랐는지, 옆에서 함께 보았던 황후는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그렇기에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믿었건만, 그러지 못한 듯 해 황제는 입을 굳게 다물고 덤덤히 서있는 아들을 안타깝게 보았다.
“반.”
“응?”
바이안이 볼 수 있게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여러 번 까딱이며 부르자 바이안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세이나와 시선을 맞췄다.
“에라이~”
무슨 말을 하려나 귀를 기울이던 바이안은 까딱이던 세이나의 손가락이 휙 하고 자세를 바꾸더니 중지와 엄지에 힘을 빡 주고 그대로 튕겨 그의 코를 때렸다.
바이안은 갑자기 들어온 세이나의 폭력에 얼얼한 코를 부여잡고 울먹였다.
세이나가 생전 처음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충격이 상당히 크게 왔던지라 코가 많이 아팠다.
“뭐가, 시작한 것이 없을 진데, 그만 할 것이 있겠습니까야? 응?”
코를 살살 쓸며 히잉 대는 바이안에게 보란 듯이 눈에 힘을 빡 주고 목소리를 확 내려 저음 톤으로 바이안과 똑같이 따라하다 성을 냈다.
“완전 개 무게 잡는 거거든?”
그러면서 중지와 엄지를 다시금 모아 힘을 주고 바이안을 노리며 하는 으름장에 바이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오해 살 말투 쓰지 말랬지?”
이제는 강렬히 위아래로 흔들어 보이며 세이나의 손가락이 다시금 코를 향해 점점 다가옴에 움찔 했다.
“그냥 단순하게 이제 와서 호칭을 바꾸는 거나, 태도나 다 어색해서 어렵다는 의미잖아. 처음부터 가족이었는데 이제 와서 가족이 아니라고 한 적 없습니다. 이런 말을 왜 그렇게 하니? 응?”
열심히 위아래로 흔드는 고갯짓이 한참을 이어지자 단정히 정리했던 머리가 흐트러졌다.
확실히 바이안이 한 말에 처음부터 가족이었으니 가족으로 생각지 아니한 적이 없기에 가족으로 불러 달라 부탁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지만 말주변이 없어도 너무 없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알아들어도 다른 사람들은 어렵다고. 나한테는 말 잘하면서 왜 그러니 이 오빠야.”
“알아듣는 구나.”
세이나에게 혼나고 있는데도 그녀만 알아 들어준다는 말에 무언가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며 특별한 사람인 듯해 자신도 모르게 히죽였다가 방심해서 손의 방어가 풀린 틈을 놓치지 않고 짓쳐들어온 세이나의 손가락 어택에 다시 코가 찡하고 얼얼해졌다.
자신의 앞에서는 말도 잘하고 예쁜 짓만 하는 바이안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그 잘하던 말도 제대로 못하고 늘 딱딱하니 그런 그가 귀여우면서도 폭폭했다.
언제 왁왁 댔었냐는 듯이 황제가 서있는 쪽으로 몸을 틀고 자세를 바로 잡은 세이나는 생긋하고 급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합니다. 폐하.”
“허허허허허”
단 한방에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던 분위기가 사라져버렸고, 세이나가 알아서 뜻풀이를 해주니 무거웠던 짐 하나가 쉽게 털어졌다.
한결 부드러워진 공기에 모여 있는 모두도 흐뭇함을 즐기고 있을 타이밍에 부스럭 거리며 기절해 있었던 황태자가 눈을 떴고, 모두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의식을 차린 황태자는 자신을 보는 주변의 시선이나 자신이 처한 상태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어필이라도 하려는지, 단 한사람을 향해 악의를 가득 담아 쏘아 보냈다.
바이안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와는 정 반대로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이아안.”
어찌하면 저렇게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상반 되는 둘의 감정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마주치는 시선에, 어느덧 주변에는 오롯이 카이덴과 바이안 단 둘만이 남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21년 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정리하지 않아도 부드럽게 찰랑이는 그 머릿결은 윤이 났다.
잿빛의 머리색은 그의 아름다움을 죽이고 있었지만, 외모가 커버를 하고 있기에 그의 자태는 신비롭다.
“우루루.”
“예. 주인님.”
그의 전용인 듯, 큰 의자의 팔걸이에 팔을 대충 걸치고 한 쪽 팔을 세워 턱을 괴고 다리하나를 꼰 오만한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서 느른하게 올려다보면서 명을 기다리는 우루루를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위에 있는 것들은 이제 필요가 없으니, 전부 처분하고 남은 아이들은 내려오라고 해라.”
정확한 부분을 뺀 명령이었지만 우루루는 그 말 속에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성공 하셨습니까?”
“아~”
“축하드립니다.”
그녀의 축하에 기분이 좋은지 입 꼬리를 진하게 말아 올렸다.
“그렇더라도 아직 조금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가 좋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도록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조용히 나가려고 일어나던 때에 그가 다시 우루루를 불러 세웠다.
“너는 어찌 생각이 드느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그 어떠한 악의도 없는 이에게, 뒤틀린 정의나 악의를 심어주었을 경우, 어디까지 어리석어 질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드느냐? 특히나 어린아이였을 때부터라면 말이다.”
생뚱한 질문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그의 표정을 보니 재미있는 장난이 생각이 나서 즐거워하는 아이의 그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악의를 쏘아 보낼 특정적인 인물을 하나 세워 둔다면, 글쎄요. 어디까지 추락할지는 저도 궁금하네요.”
어깨를 으쓱하며 그래서 뭐? 라는 듯한, 우루루의 행동에 그는 피식 실소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산다는 위선에 찌들어 그 누구보다도 고귀하게 서 있는 황족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움직이겠습니다.”
단순하게 그가 자기 생각만을 보인 말이라도 우루루는 그 말뜻을 알고 바로 그리 움직이겠다 대답한 뒤, 그의 방에서 막 나가려던 때에 다시 자리에서 멈춰야했다.
“우루루. 그러고 보니 네가 나와 함께 한지가 얼마나 되었지?”
“삼백년 조금 넘었습니다.”
“늙었군.”
마지막 단어는 조용히 중얼대듯 한 말이라도 아주 잘 들려버린 지라 우루루의 이마에 작은 힘줄이 톡 튀어 나왔다.
“주인님만 하겠습니까?”
나른한 표정으로 획하고 고개를 돌리며 쏘는 우루루의 거친 말투에 삐졌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나왔다.
그리고 그 것이 사실이라는 듯, 문을 세차게 닫고 나가는 그녀 덕분에 턱을 괴고 있던 얼굴이 삐끗하고 아래로 곤두박질 칠 뻔했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방안 가득 자신의 웃음소리로 채웠다.
황후궁 바로 옆에 가까이 붙어있는 작은 궁의 주인인 어린 황자 카이덴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대며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보다 작아 공중에 떠있는 다리를 아래위로 힘차게 흔들었다.
“셈. 아가는 언제 나오는 거야?”
“그렇게 기대 되세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웃어주는 셈은 카이덴의 바로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시종이었고, 카이덴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응. 빨리 태어났으면 좋겠어.”
“하하. 빨리 나오라고 한다고 아가는 예하고 나오지 않아요.”
셈의 말에 심술이 나서, 두 볼을 잔뜩 부풀리고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인 카이덴은 작은 목소리로 그걸 누가 모르나라며 뾰로통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달래주고 싶은 생각보다는 조금 더 놀려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남동생일까? 여동생일까? 히히 둘 다 좋다.”
“그건 아니지요.”
곧 태어 날 거라는 동생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사이에 갑작스럽게 톤이 바뀌며 위화감이 드는 셈의 목소리에 카이덴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니, 셈은 늘 한결같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주고 있어 착각 이었구나 하면서 작게 안도했다.
눈을 내리깔고 휴우 하고 있던 카이덴의 얼굴 바로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다시금 올려보니 셈의 얼굴이 바짝 다가와 차가운 눈으로 카이덴을 내려다보았다.
“..셈?”
“황자전하. 여동생이라면 좋겠지만, 남동생이 태어난다면 좋지 못합니다.”
“응? 무..무슨..”
“전하. 황후마마께서는 연약하신 분이시죠? 헌데 이번에 아이를 가지시면서 건강이 많이 악화 되신 것은 아십니까? 다 그 아이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뒤에서 말을 하더군요.”
“하 하지만. 어마마마도 아바마마도 좋아..”
“전하.”
“..으응?”
카이덴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너무 이상했다.
항상 자신에게 지어주는 미소도 똑 같은데 오늘의 그가 왜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는지, 이상한 느낌에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보았다.
“게다가 만일 아들이 태어난다면, 이번에 태어날 아이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 질 것입니다.”
“무슨 말이야?”
“이미 아들로 황자님이 계시온데 또 아들이 나온다면 그 아이는 황자님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황자님의 모든 것을 뺏어갈 겁니다. 황후마마께서는 마음이 곱고 여리시니 그저 바라만 보시겠죠. 마음에 상처를 입으신 상태로 말이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하는 셈의 차가움에 의문을 제기하기에는 카이덴은 너무 어리기도 했지만, 엄청 좋아하는 셈이 너무 무서워 카이덴은 제대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카이덴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던 지라 셈은 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카이덴의 귀에 이런저런 좋지 않은 말들을 늘여놓았다.
숙였던 상체를 들어 올려 바닥만 보고 있는 카이덴을 내려다보고 있는 셈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며 입 꼬리만을 움직여 음산하게 웃는다.
만삭인 뱃속의 아기씨는 이미 아들이라 판명이 되었고, 황후의 건강이 악화 된 것이 아닌, 임산부들이 가지는 단순한 고질병 외에는 없으며,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그런 악의를 가질 감정이 있지도 않을 것이지만, 굳이 카이덴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고, 그것은 셈의 속에서만 이루어지면서 비웃음으로 끝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