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는 요즘 소란스러운 궁의 분위기에 의기소침해져 혼자 정원을 거닐었다.

　 그때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책을 안고 복도를 걸어가는 카이덴을 발견하자마자 밝아지며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오라버니~”

　 달려가는 것에 방해가 되는지 치마를 잡아들고 뛰어오는 에바를 본 카이덴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에바야. 혼자 놀고 있었어?”

　 “웅.”

　 늘 상냥하게 웃어주고 잘해주는 카이덴의 물음에 씩씩하게 대답하던 에바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인정 많은 웃음을 짓는 카이덴의 얼굴을 보자마자 뒤로 주춤하고 두 걸음 물러나버렸다.

　 그런 제 모습에 조금 놀라 카이덴의 얼굴을 유심히 봤지만 늘 한결같이, 자신에게 상냥하게 웃음 짓는 모습이었다.

　 “에바야? 왜 그래? 어디 아파?”

　 “우..웅. 그런가바. 나 드러가서 실래.”

　 카이덴이 보기에도 에바의 안색이 좋지 않아서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주고 얼른 들어가서 쉬라며 보냈고, 다시 자기 볼일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에바는 천천히 자기 방으로 걷다가 카이덴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 후다닥 달려 방안의 침대로 다이빙한 뒤, 엎어진 상태에서 배계를 머리에 누르듯 양손으로 꽈악 잡아당겼다.

　 어린 에바의 눈에 비친 카이덴의 미소에 다른 점은 없었다.

　 하지만 카이덴의 눈동자를 보게 되었을 때, 그의 눈동자엔 아무것도 비쳐있지 않았고, 계속 바라보다가는 허우적거리며 빠져 죽을 것 같았다.

　 그것이 에바에게 영문 모를 공포로 다가왔다.

　 “무서워. 오라버니 무서워.”

　 엎어져서 한참을 덜덜 떨다가, 어느새 지쳐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세일리아는 의자 두 개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가까이 놓고 바이안을 불러 그 중 하나에 앉게 했다.

　 두 다리를 얌전히 붙이고 양 손을 무릎위에 놓고는 고개를 들지 않고 바닥에만 집중하고 있는 바이안을 한 번 유심히 보다가 세일리아도 앞의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마주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없었다.

　 바이안은 조용한 분위기에 더 위축이 되어 어깨를 움츠러트렸고, 조금 거칠지만 부드럽고 하얀 손이 그런 바이안의 작은 손 위를 가만히 덮었다.

　 움찔 한 것도 잠시, 여전히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손을 감싸고 부드럽게 잡아 천천히 손등을 쓸어주기도 하면서 살짝 잡아 올렸다가 다독이듯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상냥하게 만져지자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작은 호선을 그리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세일리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생각도 하지 못한지라 화들짝 놀라서 다시 고개를 숙여 눈을 아래도 두자 ,제 손을 잡고 있던 손이 하나가 사라지더니 이내 머리를 쓸었다.

　 “참 잘했어요.”

　 “에?”

　 칭찬 받을 행동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데 자신을 칭찬해주니 무슨 영문인지 의아해 할 때, 세일이라가 바이안의 손을 잡은 제 손에 힘을 조금 더 주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볼까? 이모랑 눈 마주치기 연습.”

　 “눈..이요?”

　 “그럼~ 전혀 어렵지 않아요. 괜찮아.”

　 우물쭈물하는 바이안을 살살 달래니 작지만 고개가 다시 들렸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직시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도르륵 굴려서 피하니, 자신의 손을 잡은 그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가 마치 괜찮다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가는 눈을 애써 고정시키며 세일리아와 마주 보았다.

　 하지만 다시 금방 눈을 피해서 고개를 숙여버렸고, 세일리아는 용기를 낸 바이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잘했어~ 3초나 마주 봤네? 거 보렴. 전혀 어렵지 않지?”

　 혼나는 것은 아닐까했던 것과는 다르게 또 다시 들리는 상냥한 칭찬에 부끄러웠지만, 조금 용기가 난 바이안과 세일리아의 눈 마주치기 연습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점점 반복 할수록 별거 아닌 것 같고, 따뜻한 손의 온기에 마음이 풀어졌다.

　 또 한편으로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 있는데도 주변에 위험한 일이나 나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에도 안도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급하지 않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아이에게 부담이 적고 중요하기에 세일리아의 ‘눈으로 말해 봐요. 예~’ 만 하고 바이안을 풀어줬다.

　 마침 끝나는 타이밍에 늦잠을 거나하게 치루고 일어난 세이나가 튀어나왔고, 잠을 못이기는 딸을 데리고 씻겨주고 머리를 빗겨준 뒤에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다.

　 놀러 나갈 채비를 마치고 들떠 있는 세이나의 옆에 바이안이 어색하게 서 있으니, 세이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 있으려면 세 가지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한단다.”

　 이제 생각났다는 듯 짐짓 진중하게 꺼내는 세일리아의 말에 잔뜩 긴장한 채로 그 의무가 무엇인지에 걱정이 들 때, 세일리아는 세이나에게 손을 펴 뻗고 물었다.

　 “어린이의 의무 세 가지 복창!”

　 “잘 먹는다! 잘 논다! 잘 잔다!”

　 “흐흥~”

　 두 모녀는 양 손을 허리에 얹고 어떠냐? 하며 똑같은 포즈로 바이안에게 씨익 웃어 보였고, 어벙벙한 그의 표정에 둘은 깔깔 웃었다.

　 “지금 시간이면 뭐다?”

　 “논다!!!”

　 경쾌함이 담긴 세일리아의 물음에 세이나는 바이안의 손을 다시 잡아서 번쩍 위로 올리며 엄마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크게 외치자, 허리를 꼿꼿이 펴 한 손을 허리에 얹고 검지를 세운 손을 문가를 가리키며 세일리아도 씩씩하게 외쳤다.

　 “출동하라!!”

　 “다녀오겠습니다~~”

　 자신보다 작은 손에 이끌려 달려 나가 본 밖에는 푸른 녹음이 어우러져있는 가운데.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었다.

　 냇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귀에 대고 시원한 노래를 부를 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코러스를 넣었다.

　 멀리서 들리는 새 소리들은 합창을 하면서 지저귀고, 그 사이를 비집고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들의 인사소리와 말소리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했다.

　 인사해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주는 세이나를 뒤따라가며 바이안은 문득 생각했다.

　 ‘요정님이 데려와준 요정들의 세상인 것 같아.’

　 자신을 돌아보면서 햇살처럼 웃어주고,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이끌어주는 소녀가 좋았다.

　 앞서 가면서 마을을 하나하나 소개해주고 사람들과 인사를 시켜주며 즐거워하는 작은 요정이 좋았다.

　 늘 어두웠던 곳에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하고 있는 자신에게 손을 뻗어 밝은 곳으로 나오게 해 준 이 작은 소녀가 바이안은 무척 좋다.

　 요즘 카이덴은 무언가 하나가 빠진 듯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충실한 매일을 보내는 데도 어딘가 이상했다.

　 “나 어디 아픈 건가? 저기 있잖아 셈.”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누군가를 부르다 멈칫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 맞다. 셈은 갑자기 병이 생겨서 그만 뒀지.”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공허하고, 바람을 쐬러 산책을 나가봐도 재미가 없었다.

　 늘 옆에서 상냥하게 웃어주는 셈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라고 생각을 해 보기도 했지만, 왠지 그건 아닌 것 같고, 마치 커다란 구멍이 가슴에 뚫긴 것 같았지만, 왜 그런지는 아무리 고민을 해보아도 알 길이 없었다.

　 “후 정신 차리자. 아바마마도 요즘 많이 바쁘신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내가 열심히 안하면 안 되지.”

　 마음을 다지며 잠시 밀어놓았던 책을 펴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의 공부에 방해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의 수발을 들어주는 시종이나 시녀들, 어느 한명도 그의 옆에 없이 고요했다.

　 요즘 알은 몇일 동안 계속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이유는 세이나가 데려온 바이안이라는 녀석 때문이었다.

　 다 같이 놀면 노는 것인데도 노는 둥 마는 둥 어정쩡해서 무척 걸리적거렸다.

　 오늘도 바닥에 그림을 그려 터치 놀이를 하는 중간에도 근처에서 앉아 멀뚱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가, 세이나에게 끌려와 놀아도 적극적이지도 않고 마치 억지로 노는 것 같은 바이안과 같은 편에 선 애들이 우르르 져버려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알은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성격이 강해 더는 참지 못하겠다며 바이안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끌고 나무들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다.

　 “놀라면 놀고, 말라면 말든가. 어정쩡하게 있지 마.”

　 거칠게 밀며 화를 내도 바이안은 별 말도 없이 가만히 서서 듣기만 했다.

　 그 것이 오히려 알의 성질을 돋궈버렸다.

　 “네가 뭐, 인형이냐? 왜 말을 안해? 너 그러는 거 짜증나.”

　 큰 소리를 치며 두 손으로 거칠게 미니 바이안은 그대로 뒤로 콰당 넘어졌다.

　 마침 어제 비가 와서 땅은 질척였고, 바이안은 흙 웅덩이가 생긴 곳에 넘어진 터라 철벅이며 온 몸이 순식간에 더러워졌다.

　 바닥을 짚었던 팔을 들어 보니 얼룩 투성이로 흙물이 뚝뚝 떨어졌다.

　 ‘세일리아 이모가 주신 옷인데...’

　 세일리아 이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옷이 더러워지자 혼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 끼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혼합 되서 올라오더니 무언가 부들부들 하며 치밀어 올랐다.

　 “야! 그런다고 미냐? 나도 밀 줄 알거든?”

　 벌떡 일어나 알의 팔을 잡아 당겨 자신이 넘어진 웅덩이가 있는 곳으로 넘어뜨리고 씩씩 성질을 내니, 알도 덩달아 바이안을 잡아끌어 바닥에 엉켜 왼쪽으로 구르고 오른쪽으로 구르며 싸웠다.

　 숨이 찰대로 차서야 싸우는 것을 멈추고 둘은 그대로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킥킥킥. 뭐야 화 낼 줄 아네.”

　 “뭐?”

　 자기는 아직도 화가 나 죽겠는데 알은 뭐가 좋은지 키득키득 웃기만 하는 것에 바이안은 황당했다.

　 “화가 나면 화내는 거야. 노는 거면 노는 거고. 봐 좋잖아.”

　 “......”

　 손으로 바이안의 볼을 쿡 찌르며 개구쟁이 특유의 웃음을 보이자, 알을 가만히 지켜보던 바이안도 처음 화내고 싸운 것이 퍽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크크크 아하하하”

　 “하하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히 웃음이 나왔고, 그래서 더 크게 웃었다.

　 알도 따라서 크게 웃어댔고, 이번에는 웃다가 지쳐서 멈춘 뒤에 알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응.”

　 내밀어진 손을 맞잡고 일어나 나란히 걸어가니 자신들을 기다리는 세이나가 보였다.

　 자신들이 오는 것을 알아챘는지, 세이나는 손을 붕붕 흔들면서 맞이해주었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세이나 쪽으로 우다다 달려갔다.

　 하지만 활짝 웃고, 마주 손을 흔들면서 달려간 둘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주 느리게 얼굴을 들어 올린 곳에는, 한 덩치를 자랑하시는 알의 엄마가 팔짱을 끼고 무섭게 치켜뜬 눈으로 두 문제아를 훑었다.

　 “아아알”

　 “아...어 엄마? 안녕? 잘가.”

　 바이안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알은 바이안과 함께 뒤로 돌아, 왔던 길로 되돌아 가려했지만 뒷목이 채인 상태로 질질 끌려갔다.

　 물론 알의 엄마의 양 손에 하나씩 알과 바이안이 잡혀있었다.

　 “놀더라도 얌전히 놀 것이지,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온 몸에 흙탕물로 목욕을 해? 엄마 고생하는 거 안보여?”

　 지금 무슨 상황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서 멍하게 하늘만 보면서 질질 끌려가는 바이안과는 다르게 알은 안타까운 울부짖음을 터트렸다.

　 “목욕 싫어어~~~”

　 “시끄러!”

　 말썽의 중심인 자신의 아들과 바이안을 커다란 통에 옷을 벗겨 퐁당 퐁당 집어넣고, 벅벅 씻긴 후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서야 알의 엄마의 얼굴에 뿌듯함이 올라왔다.

　 바이안은 제 옷보다 조금 큰 옷을 만져보면서 주변을 휘 도니, 알의 집안에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세이나도 세일리아도 합류해 자연스럽게 저녁파티 준비에 모두가 웃고 있다.

　 함께 알몸을 공유해버린 알은 바이안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씨익 하고, 가지런한 치열을 자랑한다.

　 “다음에는 내가 이긴다.”

　 “네가? 나거든.”

　 “킥킥”

　 “큭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