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틀과 체계로 잡힌 정점에 서있는 무인이라면, 할아범은 어떤 틀도 없이 사선에서 터득한 자유분방한 무인의 강함의 정점이었기에, 서로 상극이라 승부가 어디로 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황제는 자신의 검을 고쳐 쥐고 지금의 대련에 아이처럼 들떴다.
“이번에는 제 차례 입니다.”
“끌끌~”
오른발을 어깨넓이로 앞으로 벌리고, 검을 정면을 향해서 곧게 뻗어, 힘 있게 발을 굴러 가속을 붙인 채로, 그대로 치고 들어오는 황제의 검을 할아범이 검 면을 정면으로 세워 막자, 황제는 순식간에 잡은 손에서 휙 하고 정면을 향하던 검의 방향을 뒤로 하여 잡은 뒤에 몸을 틀어 횡으로 그어 올렸다.
치고 들어오는 방향에 맞추어 할아범은 검 면을 살짝 틀어 들어오는 황제의 검의 방향으로 날이 향하게 막았고, 챙 하며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처음으로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하아~”
너무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던지,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숨을 내쉬는 기사들이 몇 있었다.
몇 번의 합이 이루어졌다 기에는 순간이라 숨 쉬는 것도 잊은 것이다.
“빠르다..”
“잘 못하면 놓치겠어.”
“난 눈알 빠지겠다.”
눈에 힘을 너무 빡 쥔 기사는 손가락으로 눈 주위를 문지르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기사들이 각자의 고충을 따로 만들고 있을 때, 황제와 할아범은 이번에는 쉬는 틈 없이 긴 공방을 이어갔다.
황제의 검이 정면에 찌르고 들어온다 싶으면, 어느 순간에 뒤로 가 베다가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이동된 검이 다시 찌르고 들어오기도 하고, 발바닥에 힘을 어떻게 두냐에 따라서 순식간에 방향을 자유롭게 트는 황제와 함께 거대한 검의 장점을 살려서 땅에 박고 몸을 틀기도 하고 그대로 검과 일자로 물구나무서듯이 한 손으로 버텨 공중에서 공격을 피하기도 하면서 아주 냅다 검을 집어 던져 황제가 옆으로 피한 틈을 타서 그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팔 뒤꿈치를 무기로 몸을 틀자 황제 역시 바로 같은 방식으로 틀어 마주 공격했다.
그리고 서있던 방향이 바뀌자 던져 놓았던 검을 어느새 어깨에 걸치고 다시 달려온 할아범은 그대로 휘두르지 않고 검 손잡이를 거꾸로 잡더니 검만큼 크고 긴 손잡이 부분으로 찔러 넣었다.
찔러오는 손잡이를 검 면에 손을 대고 가중시킨 힘으로 막은 황제는 할아범의 공격을 옆으로 흘리자마자 그대로 정면으로 찔러 들어갔다.
할아범은 허리를 뒤로 휘어, 손바닥으로 땅을 짚더니, 뒤로 점프하자마자 바닥에서 그대로 휭 하고 그었고, 황제는 몸을 옆으로 틀며 공중에서 회전을 해, 땅에 착지할 때 바닥에 원을 그리듯 다리하나를 땅에 고정해 중심을 만들고서 다른 다리로 땅을 그으며, 검신도 따라서 원을 그려 할아범을 노렸다.
낮은 자세로 들어온 황제의 검이 어느 순간 할아범의 가슴께에 닿았고, 할아범의 거대한 검 날은 황제의 왼편에 닿아있었다.
그 후에 둘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고, 장내에 있는 이들 역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승부. 무승부.”
남작의 외침이 장내에 울리고서야 여기저기에서 탄성과 감탄이 터졌다.
맹수처럼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둘도 언제 살기를 드러냈냐는 듯, 여유롭게 검을 물렀다.
“허허허허”
“끌끌끌끌”
무승부라고 하여도 그 결과에 만족을 하면서 서로 호탕하게 웃던 중에 황제는 짐짓 진지하게 할아범에게 물었다.
“이리 되면, 상품은 어찌 되는 것인가요.”
“승자에게 준다고 혔으니, 무승부면 없는 것 아닙니까.”
할아범 역시 입맛을 다시며 상품의 제공자인 남작을 애처롭게 보자, 남작은 그렁거리는 황제와 할아범의 눈빛에 상품인 술을 들고 연병장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서로가 패자고, 승자인데 함께 즐기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병을 두 사람 앞에 들어 올려 말하는 남작의 명안에 눈을 반짝였다.
“참으로 명 판결입니다. 남작.”
“옳구나~ 끌끌~”
이번에는 셋이 함께 호탕하게 웃어대면서 그대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들의 움직임에 모여 있던 이들은 셋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승부의 여운을 느끼느라 바빴다.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구경하던 중간에 황후와 에바는 망원경을 내려놓고 집중한 뒤였지만, 무인이 아닌지라 전부를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흥분이 될 정도로 대단했지 않니, 오히려 이것이 방해가 되었구나.”
황후는 손으로 챙겨온 망원경 탓을 했다.
“그러게, 가까워서 필요 없다니까요.”
세이나는 둘의 아쉬워하는 모습에 상큼하게 태클을 넣다가 뜨거운 열기의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저 말도 안 되게 거대한 검이 저리도 빠르게 치고 들어올 수 있다니..”
“꽤 긴 합이 맞물렸지만, 승부가 난 시간은 짧아서 아쉽다. 쩝.”
“으아~~ 근질거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야. 너 있다가 나랑 붙자.”
“어쭈? 그래 함 붙자. 현궁 대 황궁 아주 좋네.”
황제와 할아범의 대결에 마약처럼 취한 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옆에 있는 이들에게 서로 대련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워메~ 뜨거버라~”
아뜨 아뜨 하면서 기사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근처로 옮기자 자신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던 히데아를 대련이 시작했을 때, 마력이 없는 그녀가 곤란하지 않게 슬쩍 도와주고 있었던 론이 마침 그녀를 챙기고 있었다.
“괜찮나?”
“네. 감사합니다. 카시어스님.”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주근깨가 점점이 박힌 핑크 했던 두 볼이 조금 더 진해져 드물게 들떠 있는 히데아에게 작게 미소를 띄워주었다.
“재미있었나 보군.”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래?”
얼굴을 똑바로 들고 론에게 힘 있게 말하던 히데아는 그의 가지런한 미소에 아차! 하더니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어머나. 죄송합니다. 제가..”
“아니다. 나도 좋았다.”
세이나는 둘의 모습과 대화에 눈이 땡글 거리며 절로 손이 입을 막았다.
엥? 설마요. 내가 생각 하고 있는 그것이 맞나요? 헤~ 언제? 호옹~ 뭐지요? 저 귀족같이 무게를 잡으며 짐짓 근엄한 미소를 짓는 저 인간이 귀족이 맞... 그렇군요. 맞군요. 백작이긴 했지요. 눈을 있는 대로 휘어가며 세이나는 음흉함을 플러스해서 크크 웃었다.
그러다 크게 기지개를 쭉 피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오랜만에 들떠있는 바이안을 불렀다.
“좋았어?”
“응. 좋았어.”
“반도 저들처럼 막 한판 하고 싶지 않아?”
승부욕에 불타오른 기사들을 가리키며 묻는 질문에 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괜찮아. 할아버님의 무예를 뵌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겼어.”
물론 투기가 끓어오르고 있던 것은 맞지만, 오롯이 세이나가 먼저인 지라 바이안은 진심으로 충분했다.
“알바트론경.”
“예. 주군.”
세이나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장인 그를 부를 때마다 그가 왠지 날개달린 거대한 말대가리로 변신할 것 같을까?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서인지 단장의 이름을 가끔 틀리게 알바트로스로 부른 적도 있었다.
“오늘만큼은 다들 하고 싶은 대로 풀어줘도 좋을 듯싶어. 폐하와 할아범의 여파가 쉬이 가시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럴 때는 한번 풀어내야지.”
세이나의 의도를 눈치 챈 단장은 그러하겠다, 대답했다.
“언니 언니. 우리도 가자.”
“그럴까? 모처럼 이니까 우리들도 뒤풀이 정도는 해야지.”
세이나의 허락에 황후와 에바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황태자에 시선이 갔다.
“태자저하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러자 황태자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아닙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제가 낄 수는 없지요. 부디 재미있게 보내다 가십시오.”
사람 좋게 웃는 황태자의 배려에 그러겠다며 자리를 옮길 때 거의 들리지 않은 소리가 미세하게 스쳐 지나갔다.
“쯧.”
앞서가는 황후와 에바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세이나와 바이안은 혀 차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소리와 동시에 바이안은 짧게 굳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세이나는 바이안의 뒤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황태자를 슬쩍 흘겨봤지만 들떠서 신나있는 에바의 재촉에 생각을 일단은 뒤로 밀었다.
많은 사람들을 활활 불태웠던 당사자들은 황궁의 1응접실에 모여 시종들이 내온 안주들을 아그작 잘근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떠들었다.
“끌끌~ 늙어서 그런가, 얼마나 뛰었다고 삭신이 쑤십니다.”
“자네 엄살이 심하구먼.”
남작이 할아범을 즐거이 힐책하니 황제도 긍정한다.
“허허 어르신께서 그러시면 저는 어찌합니까.”
“끌끌끌”
“오늘 어르신과 한 번 검을 맞대어 보니, 전성기 때의 어르신과 붙었으면 제가 분명 졌을 것입니다.”
황제는 할아범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마력도 없는 사람이 가지는 신체의 차이도 분명 있을 진데, 지상인인 할아범이 이정도의 무예를 이루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결과이기에 존경심마저 떠올랐다.
“어르신 덕분에 많은 업무에 그동안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갔습니다.”
진심으로 개운한 표정이 된 황제는 좀 전에 있었던 대련을 떠올리니 술맛도 절로 좋았다.
“어이구~ 또 한 번 붙자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늙은이 죽습니다. 그랴~”
그리 말하며 허리를 과장되게 통통 두드리자 황제는 시원히 웃었다.
“나는 들지도 못할 것 같은 거대한 검을 나무 몽둥이 휘두르듯 하는 사람이 할 말인가?”
남작은 부러 몸을 부르르 떨며 질렸다는 행동을 해 보이니, 보답으로 할아범은 어깨를 통통 두드려 엄살을 강조했다.
소탈한 황제와 할아범과 함께 즐기던 남작은 새삼 지금의 시간이 마냥 꿈같았다.
처음의 남작은 자신이 정점인 황제폐하와 이리도 가까이 지낼 날이 올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황제는 그에게 편히 하라고 하였고, 지금은 술도 편하게 마시는 사이까지 오게 되었다.
출세 아닌 출세를 한 듯, 잘 못하면 콧대가 하늘높이 올라 오만해질 것 같아 오히려 그것이 염려될 정도다.
그동안 손녀딸에 대해서 황후마마께 얼추 소식은 들어왔지만, 현궁에 들어오고 보니, 자신의 손녀인 세이나가 황제폐하와 황후마마의 신뢰와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음을 몸으로 실감했다.
사람의 욕심은 본의 아니더라도, 하나가 채워지면 또 하나가 늘 듯, 현재 세이나도 정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더라도, 실상 당연하게 모두가 누리는 것도 못하는 대현자만 아니었더라면, 원래대로 2황자인 바이안이 황태자 자리에 올라 세이나가 황태자비가 되었을 것이며, 나중에는 황후의 자리에 있어, 예쁜 아가들을 낳았을 것을 생각하니 그것이 너무 안타깝게 다가왔다.
갑자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씁쓸하게 술을 연거푸 마셨다.
“술로 2차전 들어가려고 그러는겨? 주량도 평범한 사람이 왜 이리 마셔댜? 끌끌”
할아범은 남작의 속내를 읽었는지,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면서도 걱정해주었다.
“허허 내가 그리 했는가? 천천히 마셔야지. 허허허.”
황제도 남작에게 동질감을 느껴 다른 이들에게는 하지 않는 생각을 입에 올렸다.
“지금의 태자가 부족하다 생각은 하지 않지만, 둘째인 바이안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어려운 말을 할 듯하자, 둘은 황제의 말을 경청했다.
“황자임에도 그 아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많은 것을 하지 못하며 지냈지요. 다 제가 부덕하여 생긴 것이지만, 황제라는 자리가 무엇인지... 주변을 보니라, 더 엄히 대하기만 하였지, 그 아이의 마음고생을 그 어느 하나도 헤아려 주지도 못했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오로지 황후와 자신만이 안고 있는 이야기였다.
“의욕도 욕심도 없었고, 늘 혼자만이 자신의 세상인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던 그 아이가 대륙에서 세이나와 만난 뒤에 처음으로 눈빛이 바뀌었더군요. 그 뒤로 무척 밝아지니, 본래 그 아이의 성격이 이러했었구나를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끌끌끌”
할아범은 평소의 즐거이 웃는 웃음소리가 아닌 안타까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무엇이든 바이안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자 결심하면 무엇 합니까. 후~ 두 분도 알고 계시지요. 그 일이 있고 세상을 다 잃은 듯 처음으로 돌아가 버리더군요. 그나마 다행인 것이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 하나가 남아있다는 것이지만, 감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끌끌 지금은 다시 좋아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예. 세이나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살아있어 주어서 얼마나 고맙고 예쁜지... 허나, 그러면 무엇 합니까? 앞으로도 계속 고생할 두 아이를 생각만 해도, 아비로서 마음이 아픕니다.”
대현자의 목숨을 노리는 보이지 않는 적의에 대해 자신 역시 이리저리 조사를 해보아도 뚜렷이 나오는 증거가 없기에, 적이 어떻게 밀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그 내용은 애써 삼키며 그렇게만 말을 마무리 했다.
할아범과 남작은 하나 뿐이 없는 자신들의 손녀를 어찌하여 이리도 아껴주는지 알게 되는 대목이었기에 더 숨겨진 내용은 듣지 않더라도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황제가 고마웠다.
그렇게 서로 여러 생각을 술과 함께 삼키며 밤이 깊어지도록 계속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