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안은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없어서 늘 밖에 있는 비밀기지에서 노는 것이 일상이라, 오늘도 땅에 나뭇가지로 낙서를 하기도 하고 돌멩이겨루기 놀이도 하면서 놀다가 문득 떠오르는 하나의 문제에 이제야 생각이 났다며 고개를 쳐들고 론을 불렀다.
“야.”
“왜?”
“그러고 보니까 너 이름 몰라.”
“아! 나도.”
함께 논지 어언 한 달이 흘렀지만 둘은 이름도 모른다는 것에 어떠한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여 상당히 크게 놀랐다.
“풋”
“푸훗”
황당한 감정이 이제 웃기는 감정으로 바뀌어 서로 배를 잡고 깔깔 한참 웃어댔다.
“흐하하. 나 네가 황자란 것밖에 몰라.”
“난 백작 아들.”
확실히 주변에서 그리 부르니 그 외에는 알 수 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나. 로트론.”
“나는 바이안.”
“......”
“......”
“우리 이름 자주 불러주자.”
“응.”
다짐 하듯 주고받다가 다시 신나게 웃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기겁을 하며 후다닥 빠른 걸음을 내딛는 바이안의 뒤로 분홍 드레스를 깜찍하게 입고 아장거리는 예쁜 인형 같은 에바가 따라왔다.
“오바아”
두 팔을 쫘악 펼치고 앞으로 나란히 자세로 도다다 달리는 걸음은 그를 놓칠까 필사적이었지만, 바이안은 아직 뒤뚱이는 에바가 행여 넘어질까 뒤를 힐끔 거리면서도 보폭을 넓혔다.
그리고 역시나 아직 걷고, 달리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덕분인지 보란 듯이 그대로 딱딱한 바닥에 십 점 만점에 십 점의 슬라이딩을 해주었고, 바이안은 더 기겁하면서 쩔쩔맸다.
“거 거봐 나 따라오니까 다치잖아.”
“....끄응..”
달려가서 일으켜 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오히려 에바를 다그쳤다.
에바는 멀뚱히 그런 바이안을 보다가 양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엉덩이를 한껏 세워 끙차하며 일어나 먼지를 툭툭 털고 당황하는 바이안에게 후다닥 달려가 옷깃을 꽈악 쥐었다.
“오바”
자신을 향해서 빵끗 웃으며 올려다보는데 너무 예뻐서 손으로 만지려 하다가 흠칫 놀라, 에바의 손을 뿌리치고 멀리 떨어졌다.
“우... 우우... 우와앙~”
넘어져 다쳐도 울지 않았던 에바가 거칠게 뿌리쳐진 손에 서러워져 왕왕 울어대자 바이안은 주변을 휘휘 돌아보며 조심히 에바에게 가까이 갔다.
“우.. 울지마. 미안. 내가 잘못했어. 응?”
두 손을 싹싹 빌며 안색을 살피는 바이안 덕분에 에바는 언제 울었냐며 다시 빵끗 웃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자신의 정수리를 보였다.
“응?”
움찔하기만 하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바이안에게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앙증맞은 손으로 제 머리를 툭툭 쳤다.
“쓰...쓰담?”
“히히”
에바가 원하는 바를 알았지만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어 죄지은 사람마냥 주변을 돌아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손바닥을 펴, 들어 올린 제 손과 에바의 머리에 시선을 주면서 망설이다가도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에 흠칫 놀라며 후다닥 도망칠 준비를 했지만,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제 여동생을 한 번쯤은 만져보고 싶다는 욕심에 엉성한 자세로 조심히 톡하고 건드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만져지는 에바의 머릿결이 손에 가득 담기자 걱정했던 기분이 한결 편해져 이제 살살 쓰다듬어주었고, 그러자 에바가 더 예쁘게 웃어 보여주었다.
“헤헤”
“히히”
둘이 서로 마주 웃고 있을 때 멀리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더니 에바를 확 끌어 당겨 안고는 다른 손으로 강하게 바이안의 가슴을 밀어 넘어뜨렸다.
“더러운 손으로 누굴 만져.”
“아....”
카이덴은 에바의 여기저기를 훑어보다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뭐야? 다쳤잖아. 역시 네놈 때문이구나.”
카이덴의 윽박지름에 고개를 푸욱 숙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에바는 자신을 쫒아오다가 넘어져서 다쳤으니 다 자신 때문이 맞아, 차마 변명할 수가 없었다.
“미...미안. 가까이 안 갈게.”
“하? 이게 아주 웃기네.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 뒤로는 할 거 다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다시 한 번 더 에바한테 가까이 오기만 해봐.”
카이덴의 무서운 표정과 큰소리에 에바는 빼액하고 울어댔고, 그런 에바를 안아들고 너 때문이야 라고 다시 강조를 한 뒤에 그 자리에서 서둘러 사라졌다.
바닥에 볼품없이 앉아있던 바이안은 제 손을 내려다보며 손을 쥐였다 폈다 해보였다.
“역시... 욕심내니까 그래. 내가 욕심 부려서 에바가 다쳤고, 우는 거야.”
멍하니 제 탓을 하다 인기척에 벌떡 일어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서둘러 자신의 도피처 중 한 곳인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엎어졌다.
또 다른 방에서는 카이덴이 인상을 팍 쓰고 바닥에 발을 구르며 성을 냈다.
“짜증나 짜증나.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또 뒤에서 손을 뻗어?”
그의 모습을 뒤에서 흐뭇하게 보던 셈은 느긋하게 다가가 카이덴의 두 어깨를 살짝 감싸듯 손으로 잡아 달래주었다.
“역시 제 말이 틀린 것이 없죠?”
“응. 전부 셈말대로야. 지치지도 않고 뒤에서 움직이더라.”
“싹은 미리 잘라내야 한답니다. 그것이 용이하지 못하면 더 자라지 못하게 눌러야죠.”
“응. 그래야지. 어마마마랑 아바마마가 슬프지 않게 하려면 그럴 거야.”
셈은 자신이 바라는 정답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 카이덴을 칭찬하며 그의 머리를 상냥하게 쓸어주었다.
“지금까지 정말 잘하고 계신 겁니다. 황자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싹을 누르세요. 뒤는 다 저에게 맡기 시구요.”
“응. 계속 욕심내면 계속 뺏어 줄 거야.”
“정말 믿음직하세요. 아!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 특히 폐하와 마마가 계실 때에는 절대로 티를 내셔서는 안 됩니다.”
“걱정하시니까?”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말도 잘 듣는 카이덴을 다시 칭찬을 하며 그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후에 방에 나와 다음 일을 하러 움직였다.
“당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여도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더 어리석어지세요. 당신에게 좋지 않은 모든 것은 다 2황자 전하의 탓입니다. 지금은 그것이면 됩니다. 후후후”
황자에게 자신의 본심을 전하지 않아서인지 그의 독백은 점점 더 진득해져갔다.
아침을 알리듯 바이안의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들이 그의 아침 단장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제일 지위가 높은 그의 담당 시녀가 남색의 깔끔하고 단정한 옷을 꺼내어 가져왔다.
“황자님 옷 갈아입으셔야죠.”
아주 조심히 다가오는 시녀에게 대충 시선을 두다가 팩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거. 안 입을래.”
“어머. 갈아입으셔야 놀러 가죠.”
“어마마마께서 주신 거잖아. 나 옷 많아. 돌려드려.”
돌아도 보지 않고 단호하게 꺼내는 바이안의 말에 시녀는 이번에도 실패했나싶어 혀를 작게 차며 성공할 거라 믿었던 자신의 작전실패의 아쉬움을 표했다.
새 옷임을 보이지 않게 일부러 방안을 어둡게 하는 철저함과 새 옷을 미리 꺼내 몰래 다른 옷들과 대충 섞는 치밀함, 아이들이 아침잠에 힘들어하는 딱 그 타이밍에 입혀드릴 원대한 계획이 바이안의 눈썰미에는 효용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단 하나. 어르고 달래며 설득하기를 시전하기 위해 바이안의 눈이 향하는 곳으로 가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황자님. 그간 입으셨던 옷들은 너무 많이 낡았어요. 황후마마께서 챙겨주셨는데, 매번 이리 하시면 걱정해주시는 황후마마께 죄송해져요.”
“....받는 게 더 잘못이야..”
“네?”
뭐라 말을 한 것 같지만 너무 작은 말소리에 물어보자, 바이안은 움찔하며 상체까지 틀어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꿔 시녀를 외면했다.
하지만 이걸로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라 의지를 불태우는 시녀는 다시 바이안의 시야에 맞춰 자리를 잡고 그의 시선에 들어갔다.
하지만 바이안의 고집이 보통이 아닌지라 계속 반복되는 공방에 앉았다가 일어나 자리를 옮겨 쭈그리기를 여러 번 반복한 시녀의 허벅지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고,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바이안을 가만히 보다가 한 가지 방법이 떠올라 마지막 힘을 짜 울어재끼는 허벅지를 애써 무시하고 바이안의 앞으로 가 앉았다.
“황자님. 새 옷만 아니면 되는 거죠?”
“...응?”
드디어 작지만 반응을 보이자 바이안의 눈이 닿지 않게 주먹을 말아 쥐고 한번 꽉 쥐었다가 생긋 웃으며 새 옷을 들어보였다.
“새 옷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우시면 헌 옷을 받으면 되지요.”
“헌 옷?”
헌 옷이라 주장하는 시녀의 손에는 역시 좀 전에 보았던 새 옷이라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
“보세요. 이렇게 하면...”
시녀는 옷의 소매를 바닥에 조심히 문대기 시작했고, 바닥이 거친 덕분에 소매 단에 쉽게 작은 구멍을 내었다.
하지만 그 구멍은 상당히 작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섬세하게 낸 구멍인 만큼, 바이안이 잘 볼 수 있도록 구멍 난 부분을 잡아 가까이 들어보였다.
“뜯어졌네.”
“그죠? 이걸로 이 옷은 헌 옷 이예요. 이제 황후마마께도 못 돌려 드리겠죠?”
“그치만..”
넘어갔다 싶었는데 작전이 살짝 얕았나보다.
부드럽고 고운 천에서 나는 윤을 무시하지 못했는지 망설이는 모습에 시녀는 조금 더 강하게 가보자며 한 숨을 쉬고 어쩔 수 없다는 연기를 시작했다.
주인이 없는 옷이니 버려야겠다며 터덜터덜 걸어 나가다 그대로 바닥에 흘리듯 떨어트렸고, 다시 주워들으니 바닥의 먼지가 묻어나왔다.
“어머? 여기에 버려진 옷이 있네?”
과장스러운 몸짓과 말투를 선보이며 바이안을 흘끔 보니 자신을 빤히 보고 있음에 마지막 승부처를 발견하고 바로 찌르고 들어갔다.
“이 옷이 이제 주인이 없어요. 어떻하죠? 게다가 이렇게 먼지투성이라니...”
“응. 그러네.”
“옷이 너무 불쌍해요~”
“그런가?”
나름 긍정적인 반응이 생기자 신이 나서 시녀는 생글거리며 다시금 바이안에게 그 옷을 가져왔다.
“우리가 대신 입어줘요. 불쌍하잖아요. 네? 네? 네?”
눈에서 별가루가 흘러넘칠 것 같은 시녀의 눈과 바싹 가까이 다가온 옷을 번갈아 보던 바이안은 먼지에 반짝이던 옷이 가려지자 저 정도면 괜찮을 거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여줬다.
시녀가 된지 어언 8년으로서 한 건을 해낸 그녀는 황족의 귀한 옷에 구멍을 내고, 땅에 떨어뜨려 버린 옷을 주웠다 말을 하면서, 조금 너무 간 것은 아닌지 뜨끔했고, 게다가 그 옷을 바로 황자님께 입힌다는 것이 양심이 양단이 나는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프로다.
일단 허락을 받은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옷에 먼지가 언제 묻어있었냐며 깨끗하게 털린 옷은 처음 그대로의 자태를 뽐내며 제 주인을 찾아 기뻐하면서 햇빛에 반짝이니 시녀는 하늘 아래 자신의 눈앞에 요정이 나타났다며 감격했다.
궁 밖 정원에서 론과 놀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던 바이안은 한결 편한 기분으로 반짝이며 빛을 내는 꼬까옷을 입고 신나게 달려 나갔고, 그 뒤를 뿌듯함에 취해있는 시녀를 필두로 3명의 시녀들이 따라 나섰다.
조금 걸어 나서다 마침 지나가고 있던 황후와 거사를 치룬 시녀의 눈이 맞자, 황후는 조용히 엄지를 들어 올려 그녀를 칭찬했다.
시녀는 허리를 숙여 예를 보인 후에 서둘러 바이안을 뒤따라가면서 괜히 코 밑이 간지러운 척, 검지를 펴 옆으로 눕힌 후에 콧잔등을 스윽 하고 훑었다.
바이안이 자신이 준 옷을 아무렇지 않게 입은 모습에 황후는 방으로 돌아간 즉시 큰일을 해낸 시녀에게 보너스를 두둑이 챙겨주는 일을 절대 빼먹지 않았고, 그 다음의 월급날에 비명과 함께 그 시녀는 그대로 졸도해 작은 소동을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