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나는 무려 한 달 만에 할아버지들의 얼굴을 마주 할 수 있었다.
“어째, 금술 좋은 부부들 보다 두 분이 더 깨가 쏟아지네. 누가 마누라야?”
“예끼! 이늠이. 할애비들에게 못할 말이 없어?”
“허허허. 나?”
남작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세이나의 농을 받아주었다.
“끌끌끌~”
현제 세이나는 할아범의 방에 놀러온 참이었고, 할아범은 손녀딸에게 웃어주면서 자신의 짐을 뒤적이다가 손때가 가득하고 낡은 거대한 검을 꺼내어 들었다.
“우와~ 오랜만에 보네.”
“그쟈? 할애비도 오랜만에 꺼낸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그 검을 한번 횡으로 긋자, 세이나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던 기사들이 움찔했다.
“뭐.. 뭐냐? 방금 순간적으로 엄청난 위압감이 스친 것 같은데.”
“큭큭 이제 알아보냐?”
론은 자신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흠칫 놀란 동료들에게 실실 쪼갰다.
“할아범. 왜 갑자기 몽둥이는 꺼내 든 거야?”
세이나가 할아범의 반려 같은 존재인 검을 몽둥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거대함에 있었다.
검신의 길이는 거의 할아범의 키 만했으며, 그 검 면의 두께는 손바닥과 맞먹었고, 크기가 크기인지라 날은 무딘 듯 뭉툭해 보였지만, 검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검의 손잡이는 어마어마함을 자랑하며 대충 천으로 둘둘 말려 있었다.
검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저 검으로 사람을 베는 것이 아닌 두드려 패는 용도인줄 알 것이다.
“끌끌끌 오랜만에 휘두르니, 팔 빠지긋네. 나도 이제 늙은겨~”
할아범은 그리 말을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다시 한 번 휘두르며 그대로 어깨에 가볍게 걸친 후에야 세이나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쓸 일이 생겨서 꺼냈지. 끌끌~”
세이나의 옆에서 차를 홀짝이던 남작이 부가 설명을 해주었다.
“저번에 온천에서 폐하와 대련 내기를 하셨단다. 허허 내일이 그 날이야.”
그러자 세이나의 뒤에 있던 바이안의 손가락이 순간 꿈틀했고, 론은 신나서 앞으로 튀어 나왔다.
“오오~ 드디어 할아버님의 무예를 뵐 수 있는 건가요? 크~ 대충 상상만 했지, 실제를 볼 수 있다니.. 감격했습니다.”
“끌끌끌. 내가 뭐라고, 이리 호들갑이여~”
눈을 반짝이며 어린아이처럼 흥분한 론의 모습에 인자히 웃어 보이는 할아범을 지켜보던 동료들은 의문을 가득 담아서 이해를 위해 설명을 바이안에게 촉구했다.
“한 번도 마주한 적은 없지만, 순수한 무예로는 나도 가늠 하지 못할 정도라고 생각한다.”
무뚝뚝이 뱉어내는 바이안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주군의 할아버님이 예전에 모험가였다는 것은 어찌 알고는 있었지만, 천하의 바이안이 가늠이 안 된다는 말을 쉽게 뱉을 정도이면 할아버님의 무예의 성취가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때 바이안이 쐐기를 박았다.
“몇 번인가 옆을 뺏긴 적도 있었지.”
“......꿀꺽”
누구보다도 강함을 추구하던 그들이라, 할아버님의 무예를 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이찼다.
“허허~ 기사들의 시선에 내 머리가 다 따갑구나.”
남작은 열망이 가득한, 기사들이 든든하면서 그런 그들이 손녀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내심 흐뭇했다.
“론. 뭔가 꼭 보러 간다는 듯이 얘기 한다? 너 내일 쉬는 날 아니잖아.”
“!! 크윽~ 휴가를 달라!”
기대감에 방방 뛰던 론은 세이나가 부어버린 찬물 폭포에 다짜고짜 파업을 선언했다.
“우와~ 너 그러고도 기사 잘도 한다?”
저런 놈을 어찌 믿고 있었나 하던 세이나는 후끈거리는 기사들의 시선을 흘끔 보자니, 그들의 면면에 누구라도 알 수 있게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글귀가 눈에 박혔다.
‘보고 싶다.’
하지만 자신들은 지켜야할 주군의 옆에서 떨어져, 개인의 욕구를 채운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이글거리는 열망을 애써 누르고 있는 것이 확연했다.
거기에다가 바이안까지도 근질거리는지 몸을 움찔하며 그의 눈동자에 호승심이 내비쳐졌다.
확실히 할아범의 무예도 무예겠지만, 최강의 정점에 있다는 황제폐하와의 대련은 검에 무지한 세이나가 보더라도 엄청난 빅 이벤트였고, 강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더 없는 기회이리라 싶었다.
“아이고, 이러다 나만 나쁜 주군 소리 듣게 생겼네. 할아버지. 구경 가도 돼?”
세이나의 말과 함께 후끈했던 등 뒤가 이제는 뜨겁다 못해 익을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만일, 주군이 구경하러 가게 되면 눈앞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내일 호위로 갈 인원을 정할 제비뽑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할 것이 자명하다.
“허허허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지 않니? 어떨 것 같소?”
“끌끌끌 구경하는 인원이 많으면 더 끓어 오르지. 폐하도 딱히 별 말씀 없으니, 되지 않겠는가?”
저 말은 거의 허락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신이 났지만, 세이나의 앞이라 표현을 자제했다.
바이안 마저도 주먹을 쥐며 속으로 예쓰를 외칠 정도다.
“그럼 아주 그냥 싹 다 데리고 가버려? 내가 명령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허허허 생각만 해도 연병장이 아주 미어터지겠구나.”
세이나가 주는 쿠키를 입에 넣으며 남작은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 없는 만세를 외치고 있는 기사들이 귀여운 손주들 같아 보였다.
론은 세이나가 선언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앞으로 바짝 와 강하게 외쳤다.
“아주 그냥. 충성! 충성에 충성입니다. 충! 성!”
지금 론의 호들갑은 세계 최강이었다.
그리고, 세이나가 황제폐하의 허락을 그날 당일에 쉽게 얻어내자마자 소문은 현궁의 기사들과 황궁의 기사들 사이에 쫘악 퍼졌고, 다음날 민족(기사)대 이동이 황궁의 연병장에 집결되는 어마어마한 광경을 궁에 있던 많은 귀족들과 시종들은 목격했다.
“....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이런 의미 인가벼. 일이 커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여.”
“허허허”
남작은 연병장의 큰 나무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손녀인 세이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현궁이랑 황궁에 경비할 인원까지 싹 온 거 아냐? 이래도 되는 건가?”
세이나가 새삼스러운 부분을 걱정하고 있을 때, 황후와 에바황녀, 그리고 세이나도 오늘 처음 보는 황태자가 그의 약혼녀인 듯한, 조숙한 여인과 함께 와 시종들이 마련한 자리에 차례로 앉았다.
세이나 쪽과 황족들의 호위를 담당하는 이들이 알아서 뒤에 서 있으면, 다른 나머지 기사들은 원을 그리듯 연병장에 가득 에워쌌고, 분명히 큰 연병장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
“언니, 나 저것 좀.”
의자에 앉아서 발을 앞뒤로 흔들며 에바는 세이나의 옆에 작은 머핀 케익이 손에 닿지 않아서 부탁했다.
“에바는 완전히 신났구나. 소풍 왔네.”
세이나는 에바에게 머핀을 건네주며 피식 웃어버렸다.
“그럼~ 재밌는 일이 황궁에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그리고 언니 할아버지 그렇게 강하시다며.”
“그런 것 같다더라.”
정작 세이나 본인도 자신의 할아범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는 감이 안 잡혀서, 대충 그리 말했다.
“언니네 할아버지시잖아. 한 번도 못 봤어?”
“응. 본 거라고는 가끔 도시에 나타나는 불량배들 먼지 나게 패는 거? 그리고 로도스가 도시이기 전이였나? 산적 같은 놈들이 쳐들어 왔을 때 혼자서 연한 고깃덩어리를 만들 듯 곱게 다지시는 거 본 정도야.”
“....강하신 거 맞네.”
그 것이 강한 것이 아니면 무언가요? 라고 에바는 작게 중얼거렸고, 세이나는 세이나 나름대로 중얼거렸다.
“먼치킨....”
그러다 에바는 주인공은 늦게 나타나는 법! 인 것처럼 털레털레 걸어오시는 세이나의 할아버지를 보았다.
또 다른 주인공인 황제도 비슷한 타이밍에 도착해 둘은 껄껄 마주 웃으며 연병장 중심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황제와 함께 왔던 황제 직속 기사단장인 노엘경이 세이나와 황족들에게 작게 인사하고 세이나 쪽의 기사단장인 알바트론경과 나란히 섰다.
“이런 경우가 있었소?”
“없지 않겠소? 나도 처음이오.”
“수하들이 보고 있다 보니, 이리 있다지만, 몸이 근질거리오.”
“나도 참는 것이 좀 버겁소.”
두 단장들은 작은 소리로 서로의 공감을 공유했다.
세이나는 그런 단장들을 어머나? 저런 모습이? 라며 흥미롭게 둘을 관찰하다가 알바트론단장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다시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런 알바트론경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눈을 가늘게 접다가, 그가 고개를 들기 전에 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라인에 앉아 있는 황태자의 시선에 그와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바이안의 형이 분명한 그는 외모적으로나 느낌 적으로나 바이안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황제폐하와 바이안과 확실히 닮았지만, 차이점은 분명히 있었다.
첫째 아들임에도 무예의 무자도 모를 정로 곱고, 피부가 뽀얘서, 분명 무 보다는 문에 가까운 인상이다.
황태자는 흥미롭고 호기심어린 시선을 굳이 숨기지도 않고 세이나를 보고 있었고, 시종이 건네주는 차를 느긋하게 즐겼다.
“우리 두 딸들~ 준비는 되었니?”
앉아있는 이들 중에서 제일 신나있는 사람은 단연 황후라, 두 볼에 핑크한 꽃이 필 정도로 그녀의 기분이 업 되어 있었다.
“물론이죠. 어마마마.”
“호호호.”
그리고는 둘은 동시에 망원경을 꺼내어 눈에 걸쳤다.
“...없어도 가까워서 잘 보이는데.”
“허허허허”
황당해 하면서 조용히 웅얼이는 세이나와 그 옆에서 남작은 유쾌하게 웃었다.
모두를 불러 모을 정도였던 두 주인공인 황제와 할아범은 여유만만하게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이거, 생각 보다 많이 모여서 지게 된다면 상당히 창피하겠습니다.”
“끌끌끌. 보는 눈이 많을수록 투기가 더 끓을 때도 있는 법이지요.”
“허허허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어르신.”
간단한 대화를 나눈 둘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할아범은 대충 질질 끌고 온 대검을 땅에 세로로 박았다.
거대한 검이 박히자 푹이 아닌 쿵 소리가 나는 듯한, 소리에 모여 있던 기사들은 순간적으로 굳었다.
가볍게 검을 박아 넣고 할아범은 몸을 움직이기 쉽게 웃통을 휙 하고 대충 벗어 던졌고, 그에 황제 역시 이 순간에는 황제로서가 아닌, 강함을 추구하는 한명의 무인으로써 같이 웃통을 벗어 던졌다.
두 무인의 상체가 여실히 드러나자 여기저기에서 감탄과 침 넘기는 소리가 가득 찼다.
“어떻게 하면, 몸이 저리 될 수 있는 거냐?”
“저, 등에 길게 난 검상 좀 봐라. 눈이 안 떨어진다.”
“어이.. 저 옆구리에 크게 난 상처는 발톱자국 아니냐?”
“꿀꺽.”
지금 모여 있는 기사들은 현궁도 황궁도 상관없이 서로 섞여서 할아범의 몸에 난 무수한 상처들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할아범의 몸은 은퇴한지 오래 되었다는 노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웃통을 벗고 보니 그 속에 자리 잡은 근육에, 피부의 탄력은 젊었을 적 그대로 유지했고, 온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그득하여 그가 무수히 많은 사선을 넘나들었음이 분명하게 와 닿았다.
서로의 스타일대로 간단히 준비 운동을 마치자, 대련의 증인인 남작이 떨어져서 시작 전의 룰을 설명했다.
“공정성을 위하여 마력 없이 순수한 무위만으로 대결함에 이의는 없으시겠지요. 준비가 되셨으면, 두 분 시작하십시오.”
거인들의 대결인지라 위험할 수 있기에 남작은 떨어져서 큰 소리로 외쳐 시작을 알렸고, 동시에 장내는 거대한 침묵이 가득 들이찼다.
그렇지만 정작 대결의 당사자들은 시작했음에도 쉬이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허허허 빈틈투성이신데 빈틈이 안 보입니다.”
“끌끌끌 이러다 시작도 못하겠습니다.”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둘의 대화와는 달리 둘이 부딪히는 투기는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엄청났다.
할아범은 박아놓았던 자신의 검을 뽑아 어깨에 걸쳤다.
그 한 번에 훙~ 하며 들리는 풍압소리에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기사들의 손은 이미 땀으로 흥건해졌다.
“어르신의 검에 비하면 제 검은 어린아이 같군요.”
“끌끌끌 무기가 무에 대수입니까. 제 손에 맞으면 되는 것이지.”
서로 여유롭게 떠들던 둘은 거의 동시에 투기를 완전히 풀었고, 연병장 전체에 엄청난 위압감과 살기가 요동쳤다.
“헙...”
“허...”
자신들에게 향한 투기도 아니건만, 기사들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무인이 아닌 황족들과 세이나를 근처에 있는 이들이 알아서 그 살기에 노출 되지 않게 지켰다.
“잠시만..”
바이안은 세이나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오~ 그런 것도 마력으로 가능해?”
“기사들은 어느 정도.”
세이나에게 다정하게 웃어 보인 바이안은 다시 시선을 정면에 두었다.
“움직인다.”
바이안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서 앞으로 내달렸다.
거대한 검을 어깨에 걸치고 있던 할아범은 그 검의 크기 덕분에 큰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그 빠름이 둔하지 않아서 한 순간에 황제를 향해 횡으로 그어졌고, 황제는 앞으로 내달리던 그대로 발뒤꿈치에 힘을 주어 뒤로 순식간에 물러났다.
하지만 할아범은 그 동작에서 멈추지 않고 검을 땅에 박아, 잡은 손잡이에 힘을 주어서 몸을 공중에 띄우고 그대로 뱅글 회전해 발차기를 날렸다.
“헛.”
허리를 뒤로 휘며 발차기를 피한 황제는 다시금 뒤로 물러나야했다.
어느새 땅에 착지하자마자 그대로 박은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할아범의 연계에 황제는 공격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 버렸고, 서로 거리가 두어지자, 다시 대치해 섰다.
“허~ 이거, 잘 못하면 제가 질 수도 있겠습니다.”
“끌끌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존경이 올라오는 순수한 황제의 감탄을 할아범도 맞받아 쳐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