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태가 떠난 지 다시 한 달 쯤 되었다. 햇볕은 아직 따스했지만 피부에 닿는 공기는 메말라 있었다. 출근길과 퇴근길의 공기도 이젠 달랐다. 변치 않을 듯해도 변하고, 그대로인 듯 보여도 생겨나거나 사라졌다.
‘버닝 러브’는 정규 2집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얼마 전 홍대 언더그라운드 레이블을 소개하는 한 TV 프로그램에 ‘버닝 러브’가 소개되었다. 이건이는 수줍음이 너무 많은 나머지 끝까지 방송 출연을 고사하려 했다고 한다. 결국 주변의 여론에 떠밀려 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 나도 그 여론에 동조했었다. ‘버닝 러브’의 곡들과 그들의 연주 실력이 한정된 곳에서만 보여 지기엔 아깝다는 판단이었고 음악팬으로서 좋은 곡들이 널리 들려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폭발적이기 까진 아니었어도 방송을 탄 이후로 여기저기 입소문이 돌아 홍대와 그 권역을 벗어난 이곳저곳에서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최근 광주 출장을 갔을 때 광주 터미널 근처에서도 그들의 노래가 들려왔다. 또 며칠 전에는 라디오에서 그의 목소리도 들었다. 신기했다. 좋은 반면 그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줄었다는 것이 조금 맘에 걸리긴 했다. 두 번째 정규앨범 준비와 동시에 크고 작은 공연과 간혹 방송 스케줄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우유 회사일도 쉬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자주 연락했다.
내가 회사에 있을 때 가끔 문자메시지를 통해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보고하거나 내 끼니를 챙겨 묻곤 했다. 늦게 퇴근 해 집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는 전화를 걸어 목소릴 들려주었다.
내 생활은 별다를 게 없었다. 아침마다 그가 주던 신선한 우유가 아닌 우유나 커피로 아침을 때운다는 것 말고는 일은 늘 바빴고, 어쩌다 여유 있는 주말이 되면 영태를 만나 술 한 잔 하거나 이건을 만나거나 하는 대신 예전처럼 집에서 그냥 쉬는 일이 전부였다.
이건은 이런 내 생활을 마치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나를 챙겼다. 짬이 날 때마다 내가 먼저 그를 그리워하기 전에 내게 연락을 해 왔다.
얼마 전 추석연휴동안 우리는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간 난 일박이일 부모님을 뵙고 왔고 이후로 쭉 회사에 있었다. 삼사년 전부터 명절 때 집에 다녀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기도 했고 휴무와 관계없이 잔업이 남아있기도 했다. 그리고 명절이 지나자마자 그는 내게 공연소식을 알려왔다.
“집엔 잘 다녀오셨어요?”
우린 오랜만에 만났다. 그가 집으로 찾아왔다. 전화나 메시지로만 지내다가 얼굴을 보니 기분이 새로웠다.
“응.......”
난 대답했다.
“형 부모님들은....... 어떤 분들이세요?”
그가 물었다.
“우리 부모님? 음....... 그냥 평범하셔. 두 분 다 60대 초반이시니까....... 뭐, 그 나이대에 맞는 그냥 그런 사고, 생활방식........ 왜?”
나는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그냥요. 그냥 궁금해서요. 어떤 분들인지.......”
난 그에게 커피를 가져다주고는 마주 앉았다.
“다음 주부터 언제까지라고 했지?”
난 그에게 물었다.
“뭐가........ 아, 공연. 다음 주부터 2주간이요. 금, 토만 4회 공연이에요. ‘버닝 러브’ 내부공사 때문에 대관한 거예요. 올 거죠?”
그가 내게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었다.
“응, 물론이지. 지난번 광주 일....... 개관 행사가 있긴 한데, 잘 피해 볼게.”
내가 대답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어서인지 잠시 어색했다.
“그럼, 광주 일은 다 마무리 된 거예요?”
그가 물었다.
“그렇지.......”
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기겠네요. 뭐 늘 바쁘지만, 형은.......”
“나보다 네가 더 바쁘지. 요즘은. 난 지금도 여유 많아. 칼 퇴근 할 때도 있고, 주말도 곧잘 쉬고....... 너야말로 공연에, 방송에, 곡도 쓰고....... 정신없는 것 같은데? 아, 저번에 곽 사장님이 그러시던데, 팬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내가 말했다.
“‘버러’에 오셨었어요? 근데 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요? 저, 방송은 어쩌다 몇 번이고 공연이나 리허설 아니면 연습실에 쭉 있는데........”
그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 너 없는 시간이었어. 잠깐 들러서 맥주 한 잔 하고 바로 왔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난 말문이 막혔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데 그 때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던 이유를 순간 나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형, 커피 맛있네요. 딱 내 스타일이에요. 향이........ 꼭 형 같아요.”
그가 말했다. 그는 수줍어했고 그의 말에 나도 쑥스러웠다. 그러다가 그는 잔을 내려놓고는 갑자기 내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난 순간 눈을 감았다. 놀라기도 했지만 난 잠시 그의 숨결을 느꼈다. 그러자 그는 입술을 열어 더 깊게 내게 다가오려 했다. 난 그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떼었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잠시 그가 멈춰 있다가 천천히 앉았다. 또 한 번의 침묵이 흘렀다.
“미안........ 내가 조금 있다 나갈 일이 있어서....... 내일은........ 바빠? 내일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까?”
난 급하게 말했다. 그는 얼어 있었다. 아무 대꾸 없이 앉아 있다가 쓰고 있던 모자의 캡을 눌러 다시 썼다.
“응? 어때? 맛있는 거 먹자, 우리.”
난 다시 그에게 물었다.
“내일....... 그래요. 이것만 마시고 일어날게요.”
그는 말했다.
“아냐, 천천히 마셔도 돼.”
“아뇨, 저도 가봐야 돼요. 형 볼일 봐요. 내일........ 봐요, 그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는 그의 손을 난 잡았다.
“내일....... 보자, 전화할게.”
그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씩 한 번 웃고는 문을 나섰다. 그가 나간 현관문을 난 한참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조금 전 닿았던 그의 입술의 온도와 숨결을 떠올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시 조금 전, 당황한 듯한 그의 표정과 문을 나서기 전 지었던 그의 미소를 떠올리자 뭔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를 대했던 나의 행동이 부끄러웠다. 불연 듯 무슨 낯으로 내일 그를 만나야 할지가 걱정되었다.
‘내가 그렇지, 뭐........’
얼마만인지,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한없이 작아지고 있는 자신을 나는 또 느끼고 있었다.
그 날 밤, 밤새 자책했다. 그가 그렇게 가버린 후,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내 마음이 자괴감에 머무르자, 그 때부터 자리를 잡고 터를 넓히기 시작했다. 별 일 아니라고 넘겨버리려고도 했다. 오늘 그를 만나 아무 일 없듯 밥을 먹고 평소 하던 이야기들을 나누면 되겠지....... 라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아침을 맞았지만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요일 오후를 맞았다. 저녁을 먹자고 제안한 건 나였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는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 망설여졌다. 어제의 상황이 자꾸만 떠올라 난 계속해서 헛되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넘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애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난 전화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그에게 말하려고 했다. ‘만나서 술을 마셔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미안해요. 연습이 잡혔어요. 나중에 밥 먹어요.]
순간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왔다. 안도감인지 불안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타들어가던 마음은 잦아들었지만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왔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두근거렸다가 또 다시 부끄러웠고 불안했다. 그리고 자책했다.
예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다를 거라고 믿었었다. 내 자신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했었고. 힘겹게 걸어온 험난한 그 길이 너무도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 느낌이었다. 앞길은 평탄하리라 믿었던 기대도 허상이었다. 이렇게 끝난 것인지, 난 다시 걸어 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