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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너의 플레이리스트
작가 : 땡글
작품등록일 : 2020.9.27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본능, 사랑.
누구에게든 어디서든 어떻게든 어떤 이유든 상관없이 우리는 사랑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작지만 커다란 우리 모두의 적지만 많은 사랑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솔직해서 아름답고 자연스러워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렸으면 합니다.

 
너의 자리
작성일 : 20-09-27 20:42     조회 : 280     추천 : 0     분량 : 15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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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이 되려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지만 대낮엔 햇볕이 제법 뜨거워졌다. 봄 시즌 공연을 마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은복이는 공연 이후 한 동안 연락이 없었다. ‘버닝 러브’에 오지도 않았다. 매일같이 출근하던 나와는 달리 달콤한 휴식을 보내고 있으리라고 여겨 버렸다. 이건이를 편하게 보기 위해 내 자신과 싸우고 있는 동안. 그렇게 관심밖에 두었었던 은복이가 오늘따라 보고 싶었다. 궁금했다.

 

  “워이....... 은수, 여기 앉아봐.”

 잠시 멍하니 잡생각에 사로 잡혀 있을 때, 말자 언니가 정적을 깨고 연습실로 들어왔다.

  “아잇! 깜짝이야! 휴........”

  난 놀라 말했다.

  “놀래긴....... 얼른 와봐!”

  말자 언니가 말했다.

  “왜요? 무슨 일이길래....... 아침부터....... 귀신인 줄 알았어요.”

  내가 말했다.

  “미친....... 나 같이 생긴 귀신이 어딨니? 여름에 락 페스티벌 섭외 들어왔어.”

  말자 언니가 말했다.

  “네? 무슨 페스티벌이요? 큰....... 거예요?”

  난 다시 놀라 말했다.

  “매년 여름 하는 그런 거 있잖아. 너도 작년에 가 보고 싶어 했잖아, 이박삼일 공연....... 돈 없어서 못 갔던 거. 정확한 날짜는 다른 팀들과 조율 후에 정한대. 7월 말이니까 3개월 정도 남았어. 너, 하던 거 빨리 마무리되면 한 곡 정도 넣자!”

  난 이미 눈치를 챘지만 말자 언니는 내게 설명했다.

  “유명한 페스티벌이에요? 우리 정도면 몇 곡이나 할 수 있는데요?”

  내가 물었다.

  “이번이 첫 회야. 구체적인 건 아직. 하루에 다섯 팀, 여섯 팀 쯤.......?”

 말자 언니가 대답하고 있을 때, ‘쾅!’ 하고 거칠게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잇! 깜짝이야! 하....... 뭐야? 다들 왜 이래?”

  은복이의 요란스런 등장에 난 또 한 번 놀라 말했다. 좀 전까지 궁금하고 보고 싶었던 그녀가 순간 미웠다.

  “지랄....... 귀신이라도 봤냐? 뭘 그렇게 놀래? 하긴 대낮에도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되어야지....... 이놈의 지하 벙커.......”

  역시 미운 맘은 몇 초 내로 사라졌다. 오늘따라 은복이가 무척 반가웠지만 놀란 표정을 급히 반색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그 동안 재밌었나봐? 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고?”

  놀라서 찌푸렸던 표정을 풀며 난 은복이에게 인사랍시고 말을 건넸으나 내 말을 받아친 건 말자언니였다.

  “지랄은 네가 하는 게 지랄이야. 오라고 한 게 몇 신데 지금 와서는 누굴 보고 지랄이래? 의구....... 저 년, 언니한테 인사도 안 하고.......”

  말자 언니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언니, 날 오전이란 시간에 본 적이 있어요? 없죠? 이 시간에 온 것도 기적이에요!”

  은복이가 말했다.

  “됐고! 앉기나 해!”

  말자언니가 말했다. 은복이는 바로 꼬리를 내리고 왼쪽 입 꼬리를 씰룩대며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아, 두 번 말하기 귀찮으니까, 네가 얘한테 얘기해줘. 구체적인 건 며칠 후에 다시 연락 준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얘기 다 하면 은수, 그 동안 작업한 거나 한 번 보자.”

  말자 언니가 말했다.

  “네? 네.......”

  난 대답했다.

  “아점 시킨다! 오전이니까 백반으로 통일!”

  특유의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말자 언니는 자리를 떠났다. 언니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입을 비죽거리던 은복이는 비로소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야? 공연이야?”

  은복이가 내게 물었다.

  “7월 말에 락 페스티벌에 섭외됐대. 3일 동안인가 하는 건데, 구체적인 건 며칠 후에 알려준 댔대........ 오늘부터 바로 연습할 거 같은데?”

 난 은복이에게 얘기해 주었다.

  “지랄....... 맨날 상의도 없고, 지 맘대로야!”

  은복이가 투덜댔다.

  “꽤 큰 페스티벌인 것 같은데 마다할 이유 없잖아?”

  내 말에 은복이는 “쳇!” 하고 일어났다.

  “곡은 많이 썼어? 아, 그리고....... 왜 우리 둘뿐이야? 건이는?”

  은복이가 물었다.

  “글쎄....... 오겠지 뭐. 근데 넌 뭐하고 지내느라 연락도 없고 연습실도 통 안 나왔냐?”

  내가 물었다.

  “음....... 뭐....... 간만에 좀 돌아다녔어. 아르바이트도 슬슬 해 볼까 좀 알아보기도 하고....... 큰 공연인 건 맞지? 그럼 출연료도 좀 되겠지?”

  은복이는 대충 대답하는가 싶더니 다시 페스티벌 얘기를 꺼냈다.

  “글쎄....... 짜진 않겠지 뭐.”

  내가 말했다. 난 그녀가 한 달 동안 무얼 하며 지냈을까 궁금했지만 예상 가능했던 뻔한 대답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너, 작업한 거나 빨리 들려줘봐!”

 은복이의 요청과 동시에 아점 식사 주문을 마친 말자 언니가 돌아왔다.

  “완성된 건 아니니까, 의견 수렴 할게요.”

 난 말했다. 그리고 지난 3주 동안 고통 속에 작업했던 샘플들을 재생했다. 말자 언니도 은복이도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긴장감이 감돌았을 상황이었지만 나 또한 남의 곡을 감상하듯 집중했다. 네 곡을 연달아 재생하는 동안 우리 셋은 한결같은 상황을 유지했다. 우리 셋이서는 처음 함께 한 분위기였다.

 

  “으흠!”

  분위기를 깬 건 백반 배달을 온 식당 사장님이었다.

  “음악이 좋으니께 사람이 죽어 나가도 모르겠구만. 기척을 몇 번이나 했는디.......”

  “죄송합니다!”

  사장님의 말씀에 난 얼른 대꾸했다. 사실 난 식당 사장님의 헛기침 소리에 오늘만 세 번째 깜짝 놀랐지만 이번엔 놀라지 않은 척 했다. 우리는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내가 먼저 묻지 않았는데 밥을 먹으며 은복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가 아무 말이 없는 건 긍정의 뜻....... 맞죠? 흠....... 네가 고생한 흔적이 고스란히 보인다. 난 그래. 언니는요? 그래도 평가는 해 주셔야지.”

  허기가 졌는지 말자 언니는 머슴밥 먹듯 입 안 가득 음식을 씹으며 말했다.

  “밥 먹고 네가 가이드 녹음 해!”

  “제가요?”

  내가 놀라 물었다.

  “그럼, 네가 하지 누가 해? 내가 한 거 몇 곡하고, 오늘 같이 들어 보고 공연 때 할 거 초이스하자. 내일부턴 바로 연습하고!”

  씹던 음식을 급히 삼키며 말자 언니는 말했다.

  “아, 누가 쫓아 와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도 안 잡혔다며?”

  은복이 역시 입 안 가득 씹던 밥을 삼키며 말했다.

  “그리고....... 건이 자식은요? 얜 뭔데 안 와?”

  은복이가 투덜댔다.

  “와, 와! 온다고! 아르바이트 때문에 오후에 온댔어. 걱정 말고 밥이나 먹어!”

  은복이의 볼멘소리에 말자 언니는 격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그가 일찌감치 왔으면 괜찮았을까. 오늘은 안 오는구나....... 하고 있다가 말자 언니의 말에 맘이 또 들뜨기 시작했다. 크게 심호흡을 해서 맘을 가라앉히려 했다. 말자 언니의 표정을 잠시 살폈으나 그녀의 표정은 편해 보였다. 은복이 때문에 생긴 미간의 주름이 살짝 드러날 뿐.

 

  다음 날, 말자 언니는 아침 10시부터 연습을 하겠다고 했다. 저녁은 ‘버닝 러브’의 영업시간이기도 했고, 그 사이에 작은 클럽 공연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난 9시에 연습실에 도착했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말자 언니 방으로 올라가 보았다. 계단을 다 오르기도 전에 언니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시간이 남아 있으니 난 다시 연습실로 되돌아 왔다.

  “일찍 나왔네?”

  그 사이 이건이가 와 있었다.

  “어....... 안녕? 오늘 아르바이트 있다고 안 했어?”

  난 그에게 물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도 그랬다.

  “하고 오는 길이야. 오늘부터 시간을 좀 당기고 일찍 끝내 달라고 했어. 내가 다른 복은 없어도 인복은 좀 있잖아....... 훗.”

  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후훗....... 그래. 네가 좀 그렇긴 하지. 인정.”

  내가 말했다. 예전에 내가 알던 분위기와는 무언가 좀 달라 보였지만 여전히 그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흠....... 일하고 왔더니 배고픈데....... 너는? 아침, 먹었어?”

  그가 내게 물었다.

  “그럴 리가....... 음........ 시간도 좀 있는데 아침 먹으러 갈래? 그럼?”

  난 먼저 제안을 해 놓고는 뭔가 뿌듯함을 느꼈다. 그도 미소로 내게 대답했다.

  언제였는지 이제 기억도 희미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둘만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쓴 곡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 얘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해장국 한 그릇을 해치우는 동안 대화를 주도한 건 그였다. 그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대리점 사장님이 그를 엄청 배려해 주신다는 것과 한 남자 팬과 아침마다 편의점에서 마주친다는 얘기, 그가 좋은 형이라는 얘기 등등. 나와는 달리 음악과 관련 없는 사적인 이야기들을 그는 늘여 놓았다.

  “요즘 좋아 보여. 너. 활기 있어 보이고.......”

  그의 얘기를 한참 듣고 있다가 난 말했다.

  “그래? 너도....... 너도 어느 때보다 음악에 집중하는 것 같고....... 그게 보기 좋아!”

  그가 내게 말했다.

  “그래......? 후훗....... 그만 가자. 말자 언니 깼겠다.”

 

  연습실로 돌아오니 시계는 이미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난 바로 말자 언니를 깨우기 위해 언니의 방으로 올라갔다.

  “언니! 일어나요! 열신데.......”

  난 나름 소리쳤다. 아까보다는 코 고는 소리가 수그러져서 씩씩대는 숨소리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한밤중이었다. 소심한 내 목소리에는 역시 미동도 없었다.

  “언니! 언니! 휴........ 야!”

  웬만해선 깰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여서 난 온 힘을 다해 질러 버렸다.

  “아이 씨....... 발.......”

  말자 언니가 잠에서 깼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 알콜 냄새가 맴도는 것 같았다. 난 언니의 욕에 살짝 놀랐지만 다시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언니! 열시 넘었어요. 열시까지 오라면서요.......”

 말자 언니는 비로소 눈을 뜨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이 열시야?”

  “네에. 먼저 오라고 한 사람이 지금까지 자고 있으면 어떡해요?”

  “아이....... 뭐 벌써 열시야....... 얼마 자지도 못했는데.”

  언니는 약간의 짜증 섞인 말투와 꼬인 듯한 발음으로 말했다.

  “술 마셨어요?”

  난 그녀에게 물었다.

  “하아........ 여서, 여섯시까지....... 미안한데 한 시간만 늦추자. 딱 한 시간.......” 하며 말자 언니는 다시 자리에 누워 버렸다. 언니의 말을 들으니 더 설득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럼, 한 시간 후엔 꼭 일어나야 돼요, 꼭요!”

  나의 말에 대답 없는 그녀를 뒤로하고 난 다시 돌아섰다. 연습실로 돌아오니 이건이가 새 곡의 코드를 연습하고 있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따가 같은 상황이 또 반복될 걸?”

  이건이는 모든 상황을 지켜본 것 마냥 말했다.

  “휴........ 근데 얘는 또 왜 안와? 언니랑 같이 마셨나?”

  깊게 한 숨을 쉬고는 다시 시계를 보니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5분전에 전화해 봤는데, 안 받던데? 조금만 기다려보자. 급하게 오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

  우리는 우선 기타와 베이스만 맞춰 보기로 했다. 연습에 심취해 있는 동안 몰랐던 시간이 한 시간 가까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린 다시 상황을 파악하고 난 말자 언니를 깨우러, 이건이는 은복이에게 한 번 더 전화해 보기로 했을 때였다.

  “이 놈의 지지배는 왜 전화도 꺼져 있는 거야?”

  말자 언니는 제각각 뻗쳐 있는 부스스한 머리를 쓱쓱 쓸어 넘기며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내려오면서 말했다.

  “복이 전화 꺼져 있어요?”

  난 언니에게 물었다.

  “........ 어제 너랑 집에 같이 가지 않았어?”

  이건이는 내게 물었다.

  “하.......암....... 나, 참....... 미치겠네.”

  말자 언니는 하품을 하며 말했지만 뭔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언니?”

  “아이 씨.......”

  나의 질문에 언니는 겨우 이렇게만 답했다. 은복이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언니!”

  내가 다그치듯 부르자, 언니는 술이 덜 깬 듯한 쇳소리로 얘기했다.

  “어젯밤에....... 문자 왔더라. 이번 페스티벌 공연, 자기 빼고 하면 안 되겠냐고.”

  말자 언니가 말했다.

  “.............?”

  이건이와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일단, 안 된다고는 했는데....... 꽉이 어제 나한테 술 먹자고 해서 나갔더니, 꽉이....... 요즘 여기저기 면접보고 다닌다더라. 복이....... 취직하려고.”

 말자 언니는 느릿느릿 설명했다.

  “........... 확실해요? 그걸 곽사장님이 어떻게 알아요?”

  이번엔 이건이가 물었다.

  “꽉 친구가 하는 종이컵 만드는 회사에 왔더래. 그 친구가 여기 자주 오거든, 술 마시러.”

  말자 언니가 대답했다.

  “...............”

  난 말없이 만지고 있던 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어제 집에 갈 때 같이 있었던 은복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난 그때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거의 매일 보던 그녀를 한 달 만에 만난 건 사실이지만 늘 보아 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명령조로 말했던 말자 언니에 대한 약간의 험담과 들려주었던 새 곡이 맘에 든다는 얘기, 페스티벌 공연에 대한 궁금증 등등....... 우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과 행동들을 한참 떠올리다 보니 갑자기 화가 났다. 왜........ 왜 나에겐 조금도 내색하지 않은 채 말자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걸까.

  우린 열아홉이 끝나기도 전에 만나서 동료, 친구를 넘어 마치 자매처럼 붙어 다녔었다. 그리고 서로 그렇게 여기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가족 이야기, 음악에 대한 생각, 미래에 대한 얘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얘기 등 가리지 않고 공유해 온 사이였고, 무엇보다 그녀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포부가 나보다도 컸다. 사정이 있어서 잠시 쉬어야 한다는 얘기 정도는 내게 먼저 말해 주는 것이 당연했다.

  “왜.......요? 이유가 뭐래요?”

  난 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던 생각들을 애써 떨치고 말자 언니에게 물었다.

  “후......... 자세한 사정은 몰라. 꽉 말로는 면접 때 자기가 가장이라고 했대.”

  말자 언니가 말했다.

  “네? 복이.......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데.......?”

  난 의아했다.

  “그러게 말이야....... 멍청한 기지배....... 말을 하든가!”

  말자 언니가 이번엔 짜증을 섞어 말했다. 난 혹시 몰라 은복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벨도 울리지 않고 전화기의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만이 들려왔다.

 

  말자 언니, 이건이와 나, 셋은 그 날 연습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곡들을 다시 한 번 들어보고 드럼과 코드를 맞춰 보는 정도로 마무리를 했으나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말자 언니는 페스티벌까지 그나마 조금 여유가 있으니 자세한 공연 내용과 계획에 대해 알고 나서, 은복이와도 연락이 닿고 나서 본격적으로 하자고 했다. 또 은복이가 없을 경우에 대한 대안도 생각해 보자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진 않았다.

 

  지난밤엔 잠을 설쳤다. 틈틈이 은복이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하루 종일 꺼져있는 그녀의 전화에 신경이 쓰여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난 은복이가 없는 ‘버닝 러브’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침 아홉시가 넘은 시간에 난 다시 또 전화를 해 보았다. 통화 연결음이 울렸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난 은복이의 집에 직접 찾아가 보기로 하고 항상 들고 다니는 베이스 기타를 두고 집을 나섰다.

  은복이의 집은 우리 집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버닝 러브’에서 부터는 여섯 정거장 정도의 거리이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난 버스를 탔다. 은복이가 집에 없을까봐 더 이상 전화도 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도보로 5분. 난 반절도 안 되는 시간인 약 2분 십여 초 만에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은복이네 집은 종로에서도 오래된 동네인 익선동 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오래되긴 했지만 고풍스런 좁은 골목에 낡은 현대식 단층집이었다. 녹슨 철제 대문을 은복이 아빠가 몇 년 전 교체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은복이는 그게 싫어서 자기가 직접 페인트를 사다가 주황색으로 칠해 놓았다고 했다. 마르면 덧칠하고, 또 마르면 덧칠하고를 반복해 면 년이 지난 지금도 한 점의 녹 없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선명한 주황색을 뽐내고 있었다. 꼭 은복이 같은 대문이다. 늘 외톨이였던 나를 그렇게 편하게 해 주었던.

 

  처음 ‘버닝 러브’에 들어갔을 때, 난 자취방을 구할 때까지 은복이의 방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가사도 쓰고 기타 연습도 했으며 가끔 아니, 곧잘 은복이와 새우깡에 소주 한 잔씩 기울였던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 달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긴 시간처럼 여겨졌던 기억이기에 이 집을 떠날 때 난 서운함이 컸더랬다.

  은복이는 부모님과 네 살 터울의 오빠, 한 살 아래의 남동생, 이렇게 살고 있었다. 아빠는 어느 회사의 야간 일을 다니셨고 엄마도 낮에는 하루 종일 일터에 계셨다. 내 기억으로도 은복이의 두 형제는 참 걱정스러운 존재이긴 했다. 오빠는 스물이 훌쩍 넘은 나이였지만 맞벌이 부모님에게 기대어 취직도 하지 않았고 군대에 다녀온 후 늘 놀러만 다니는 한량 같은 사람이었다. 남동생은 착했지만 부모님의 편애를 받고 자라서 자립심이나 주관이 약해 보이는 캐릭터였다. 그런 오빠와 남동생 때문에 은복이는 늘 투덜거렸지만, 가끔 공연비나 아르바이트비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형제부터 챙기는 걸 볼 때면 난 그녀가 천사 같아 보이곤 했다.

 

  은복이의 집에 오는 동안, 난 그녀에 대한 많은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 주황색 대문 앞에 서자 다시 커다란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녀에게 정말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나.......’, ‘결국 은복이를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들이.

  크게 심호흡을 해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초인종을 누르려 할 때였다. 현관문 여는 소리가 ‘덜컹’ 나더니, 곧 은복이가 대문을 열어 재꼈다. 당황할 새도 없었기에 우리 둘은 순간 얼어붙은 채 서로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약 5초 후쯤 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은복이는 아주 어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소재의 흰 셔츠에 검은 색 가디건, 무릎이 보이는 길이의 검은 색 에이치라인 스커트에 굽이 5~6센티는 되어 보이는 검정 힐을 신고 있었다. 늘 부스스했던 탈색된 웨이브 머리도 뒤로 단정히 묶여 있었다. 더욱 놀라웠던 건 세수도 잘 안하고 다녔던 얼굴에 그려진 메이크업이었다.

  내가 한참을 넋을 놓고 쳐다보자 은복이가 특유의 말투로 내게 말했다.

  “아이 씨....... 깜짝이야! 심장마비 올 뻔 했잖아! 연락을 하든가, 초인종을 누르든가!”

  “.......어....... 미, 미안.........”

  순간 나도 모르게 은복이에게 사과부터 하며 그녀의 앞길을 비켜 주려 몸을 돌렸다. 그러자 가슴에 손을 대며 심호흡을 크게 한 뒤 그녀는 발짝을 떼며 내게 말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내가 전화할게. 미안! 휴........”

  계속 당황한 상태인 나를 그렇게 따돌리고 은복이는 가려던 길을 갔다. 어색한 그녀의 발걸음을 보고 난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야!”

  내가 큰 소리로 부르자 은복이는 잠시 멈칫 하는 듯 하더니 계속 걸었다.

  “야! 연락이 돼야 하고 오든가 하지! 초인종은....... 막 누르려고 했던 참이야!”

  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 그래? 알았어. 미안....... 나중에 내가 전화할게!”

  난 겨우 은복이를 멈춰 세우긴 했지만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렸다.

  “야! 최은복! 너....... 거기 안 서!”

  난 얼른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화가 치밀었다.

  “야, 너 뭐야? 내가 이 시간에 왜 여기 왔는지, 너....... 모르지 않잖아! 내가....... 내가 얼마나 걱정하면서 여길 왔는지 알아? 이 씨....... 너 친구 맞아? 이 싸가지!”

  나도 모르게 울분이 터져 나왔다. 이곳에 오면서 내가 화를 내거나 울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물론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나의 모습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그렇게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은복이는 다시 나를 마주 보며 내 양팔을 잡고 말했다.

  “정말이야! 정말이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로 전화할게. 꼭! 그러니까 걱정 말고 가.”

  은복이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내 눈을 응시하며 내 양 팔을 힘주어 잡았다. 조금 전과는 다른 차분한 그녀의 말투에 난 흥분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도 끝내 맺혀있던 눈물은 뺨을 타고 흘렀다. 나도 차분한 말투로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이지? 오늘 꼭 해라! 나 기다린다, 전화 올 때까지. 안 하면 죽을 줄 알아!”

  “알았어. 꼭 할게!”

  은복이는 잡고 있던 내 팔을 놓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어색한 발걸음을 떼며 걷지도 뛰지도 않는 이상한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은복이의 뒷모습이 살짝 웃기기도 했다. 난 일단 그녀의 말을 믿기로 하고 뒤돌아 대문을 다시 한 번 훑어 본 후 발길을 돌렸다. 눈물을 훔치며.

 

  하루가 유난히 길었다. 연습실에 있는 내내 아침에 보았던 은복이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정말 전화를 할까 하는 걱정도 되어 자꾸만 휴대폰을 보기도 했다.

  말자 언니와 이건이는 내게 은복이를 만났는지 물었다. 난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만난 것도, 만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연락을 주겠노라 했다고만 우선 대답했다.

  “누나, 어떡하죠? 진짜 안 한다고 하면.......?”

  이건이가 물었다. 물론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그의 물음에 내가 얼른 대답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는 없어. 지금 그냥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 것 같던데, 복이는 할 거야. 그동안 기타만 왔다 갔다 했지, 우리 셋은 한 번도 삐걱댄 적 없어. 그건 걔도 잘 알거든!”

  난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흠....... 은복이가 이런 적도 없지.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대비해 놔야지.”

  말자 언니가 말했다. 이건이는 얼른 나를 쳐다보았다. 난 뭐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질 않았다.

 

  겨우 연습을 마치고 말자 언니는 곽사장님이 있는 가게로 갔고 이건이도 다음 날 아르바이트 때문에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여섯시 사십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확인한 그는 키보드를 만지작대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 사정이 있겠지....... 너한테는 얘기해 줄 거야. 이해 못할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잖아, 복이.......”

  날 걱정해 주는 게 고맙기도 했지만 이렇게 말하는 그가 왠지 야속하기도 했다.

  “그래, 고마워. 후........ 그렇겠지. 근데 넌 모르는 게 있어. 우리는....... 그래.......”

  머릿속이 복잡해서 문득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는 난 바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시 말했다.

  “그래, 그럴 거야. 나도 은복이 누나가 꼭 같이 했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불안해 보였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고 그는 연습실을 나갔다.

  그가 떠난 후 난 키보드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보았다. 휴대폰도, 그가 떠난 이 연습실도, 키보드 앞에 앉아있는 나도 마치 정지화면처럼 조용했다. 이 정적을 잠시 흘려보낸 다음 난 새로 연습한 ‘종이컵’이라는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보았다. 그대로였다. 난 다시 지난 봄 공연 때 했던 ‘내 방’을 연주했다. 그러고 나서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도 여전히 조용했다. 난 또 연주했다. 이번엔 ‘버닝 러브’ 데뷔곡이었던 ‘길바닥 껌 딱지’. 데뷔 후 초창기에 한두 번 공연해 보고는 한 번도 부르거나 연주해 보지 않은 곡이다. 말자 언니가 만든 곡인데 초창기 기타멤버였던 아이(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가 유독 이 곡을 무척 싫어해서 걔가 두 달 만에 팀을 나간 후에야 공연에서 선보였던 기억이 있다. 오랜만에 불러보니 기분이 새로웠다. 그 때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르더니 찡그렸던 내 표정에서 피식 미소도 흘러나왔다.

  혼자서,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친구 같은 ‘길바닥 껌 딱지’를 부르고 났을 때, 키보드 소리에 묻힌 휴대폰 진동음이 들렸다. 반짝거리는 휴대폰을 발견하자마자 난 얼른 집어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 미안....... 전화가 늦었지?”

  은복이의 목소리는 편안하게 들렸다.

  “괜찮아. 전화했음 됐지 뭐.......”

  나도 편하게 대답했다.

  “연습실이야? 페스티벌 준비는 잘 되고?”

  “아니, 키보드가 없으니까 잘 안 돼. 원래 우리 노래들이 기타보다 건반이 더 많잖아.”

  나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하다....... 나, 취직했어. 월요일부터 출근해야 해. ‘버러’는....... 미안! 안 될 거 같아....... 은수야! 미안....... 너한테는 얘기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하던 은복이는 힘들게 이야기를 이어갔고 난 마치 그녀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빠가 쓰러지셨어. 엄마도........ 지난달에 집을 나가셨는데....... 나도 잘 몰라. 암튼....... 그래. 그런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었어. 은수야! 널 친구로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넌 이해해 줄 수 있지? 나도....... 사실, 잘 몰라. 어떻게 해야 할지, 뭘 판단할 여유조차 없어....... 그냥 막 생각이 되어지는 대로 했어. 지금은 이렇게 밖에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래. 미안해, 정말.......”

  은복이는 정말 어쩔 줄 몰라 했다. 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만나서 얘기했더라면 어떤 표정과 몸짓을 그녀가 보였을 지를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오늘 아침, 은복이의 집 앞에서 마주 쳤을 때를 떠올리니 더욱 그랬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나도 몰라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은복이는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 나 이사가. 멀리는 아니지만....... 이제 찾아와도 없으니까.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말자 언니랑 너....... 보고 싶을 때 연락할게....... 미안.......]

  은복이의 목소리가 이번엔 떨리고 있었다.

  “복아!”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녀의 이름을 불러 놓고는 목이 메어 머뭇거렸다.

  “저녁 먹었어? 나랑 밥 먹을래? 밥은 먹을 수 있잖아....... 응? 밥 먹자!”

  겨우 생각난 말을 꺼내어 물으면서 난 나오려는 눈물을 삼켰다.

  “아직 밥도 안 먹고 뭐했냐? 말자 언니가 밥도 안 챙겨주고 연습 시켰어? 으이구....... 얼른 챙겨 먹어! 난 먹었어....... 미안. 담에 먹자. 담에 내가 쏠게. 쐬주도 한 잔 하고........ 은수야! 내가 꼭 그럴게. 내가 약속은 꼭 지키는 거 너 알지?”

  그녀는 은복이답게 말했다.

  “은복아.......”

  난 또 그녀를 불렀다.

  “진짜야. 조금만 있다가....... 너는 음악이나 열심히 하고 있어. 나 때문에 공연 차질 없었으면 좋겠다. 염치없지만....... 연습 잘 하고! 미안, 나 지금 가봐야 해서....... 다시 연락하자!”

  은복이는 전화를 빨리 끊으려 했다. 주변이 조금 시끄럽게 들렸다.

  “은복아!”

  서두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한 번 더 불러 보았지만 이내 전화가 끊어지고 말았다. 잠시 멍한 상태로 있다가 난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한 마음은 아니었다. 은복이가 전화로 털어놓은 이야기가 물론 전부는 아닐 것이다. 굳이 말자 언니나 나를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왠지 걱정스러웠다.

  난 연습실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퇴근시간대여서 도로가 무척 복잡했다. 난 빠른 걸음으로 은복이네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린 건지,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며 아침에 왔던 익선동 그 골목, 은복이네 집 앞에 겨우 도착했다.

  골목은 조용했다. 주황색 대문 틈 너머로 집 안의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다가가 대문을 열었다. 마당에 웬 아저씨와 아주머니 두 분이 서 계셨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두 분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그 분들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난 우선 인사를 했다. 그리고 현관을 향하며 은복이를 불렀다.

  “은복아.......!”

  “누구....... 찾아왔어요?”

  얼떨결에 내 인사를 받으시고 서 계시던 아주머니가 내게 물으셨다.

  “친구요, 여기 살거든요.......”

  난 대답했다. 나의 대답에 두 분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시더니 이번엔 아저씨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아까 그 아가씨 찾아왔나 본데....... 늦게 왔나보네. 금방 갔는데.......”

  “네? 누가........ 어디를요?”

  “여기 살던 아가씨 찾아왔어요?”

  “네........”

  “이사. 좀 전에 갔는데......?”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난 어리둥절했다.

  “모르고 왔나보네. 하긴....... 갑자기 그렇게 됐으니....... 쯧쯧........ 이 아가씨도 친구라면서 암 것도 몰랐나보네.”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뭘요? .......... 왜요?”

  난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구........ 쫓겨났어요, 이 집! 아들이랑 딸이랑. 에휴....... 그 엄마가 남자한테 사기를 당해서 집 날려 먹었잖어....... 에구....... 애들만 불쌍하지! 남편도 저러고 누워있는데. 에휴....... 망할 여편네.......!”

  아저씨가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아, 그게 왜 여편네 때문이야? 허구 헌날 마누라 뒤나 밟고 길거리서도 후드려 패는데 어떤 여자가 배겨나? 응? 그러니 병이 나지....... 아주 천벌을 받은 겨, 아주....... 집도 그래, 막말로 남자가 날렸지. 일도 관두고 의처증 땜에 만날 싸돌아 댕기면서 빚만 지니까, 여자가 병원비다 뭐다....... 다 그거 갚으려고 하다가 저렇게 된 거 아녀! 으이구....... 꼴에 남자랍시고 편들기는....... 모르면 가만이나 있든지!”

  아주머니는 아저씨에게 쏘아 붙였다. 그러자 아저씨는 내 눈치를 보며 중얼거리셨다.

  “거, 아가씨도 모르고 찾아왔나본데, 아무튼 간지 얼마 안됐으니까 얼른 전화 해봐요.”

  아주머니 말씀에 난 얼른 은복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전원이 꺼져 있었다. 난 전화를 끊으며 아주머니께 물었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는.......”

  “우리야 모르지. 왜, 전화 안 받아요? 에휴....... 그 딸내미도 속이 속이겄어? 쯧쯧.......”

  마당 한쪽에 놓여있는 화분들을 추스르시며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이거, 이거하고....... 저기 저 큰 고추나무, 저것만 우선 들어봐.”

  아주머니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뒤로 하고 아저씨에게 말씀하셨다.

  “어이구....... 이건, 혼자 못 들지!”

  아저씨는 아주머니가 가리킨 화분을 향해 가시더니 아주머니를 다그치듯 말씀하셨다.

  “으이구....... 써먹을 데가 없어, 써먹을 데가!”

  투닥거리시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뒤로 하고 난 대문을 나섰다. 그동안 내가 보지 못한 은복이의 모습을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나눈 이야기 속에서 상상했다. 아니,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보아 온, 적어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은복이의 단면들이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을 떠돌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 수시로 겹쳐졌다. 그러자 예전에 그녀와 함께했던 나의 모습도 보였다.

  난 뚜벅뚜벅 초점 없이 걷고 있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멈춰 서서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짓고 있는 표정도 의식해 보았다. 뒤를 돌아 내가 걸어 온 길도 다시 돌아보았다. 이미 은복이의 집, 주황색 대문이 보이지 않는 골목 밖으로 난 나와 있었다. 이번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낡은 예스러운 동네. 4년 전 내가 다녔던 그 동네가 맞았다. 드문드문 가로등 불빛이 비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소리조차 없었다. 공기는 검고 축축했다. 그 속에서 난 어깨를 축 내려뜨리고 다시 걸었다.

  은복이의 집은 그렇게 멀어져 갔고, 난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화면 한가득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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