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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너의 플레이리스트
작가 : 땡글
작품등록일 : 2020.9.27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본능, 사랑.
누구에게든 어디서든 어떻게든 어떤 이유든 상관없이 우리는 사랑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작지만 커다란 우리 모두의 적지만 많은 사랑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솔직해서 아름답고 자연스러워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렸으면 합니다.

 
판단과 선택
작성일 : 20-09-27 20:51     조회 : 293     추천 : 0     분량 : 18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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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아침, 초인종이 울려 잠이 깨었다. 시계를 보니 8시였다. 힘든 밤을 보냈다. 그럼에도 혼란은 멈추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 없단 생각에 인기척도 않은 채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두어 번 초인종이 더 울리더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호야! 문 열어!”

  영태의 목소리임을 깨닫고 난 몸을 일으켰다.

  “웬 일이야, 아침에.......?”

  “새끼....... 왜 문을 안 열어? 깨어 있었고만!”

  내 얼굴 상태를 확인하며 녀석은 말했다.

  “나 온 거 어떻게 알았냐?”

  내가 물었다.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마시며 영태는 대답했다.

  “기다렸으니까. 너 오기만 목 빠지게 기다렸거든!”

  “미친 놈....... 소름끼치게.......”

  내가 말했다. 영태가 남은 물을 다 마셔버린 걸 보고 난 냉장고로 가 안을 살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연 채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녀석은 말했다.

  “커피! 설마 커피도 없어?”

  “아!”

  난 정신이 들었다.

  “더위라도 먹은 거야? 아침부터 왜 그렇게 멍해?”

  “아.......!”

  영태의 말에 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녀석의 얼굴을 보고 에어컨을 켰다.

  “커피는 뜨거운 걸로!”

  영태가 땀을 닦으며 주문했다.

  “어차피 얼음도 없어.”

  난 커피를 내려 머그잔 두 개에 나눠 들고는 녀석이 앉아있는 에어컨 옆 소파로 가져갔다. 영태와 나는 말없이 뜨거운 커피 향을 맡았다. 에어컨 바람에 커피 향이 거실 한 가득 퍼졌다. 우리 둘은 여전히 말없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하고 따뜻했다. 그렇게 음미하며 몇 모금을 마셨을 때, 내가 말했다.

  “하루가 일 년처럼 느껴질 때 있잖아........”

  영태가 나를 바라보았다.

  “일 분 일초가 빼곡하게 하나하나의 기억으로 채워져 있을 때 그렇게 느껴지잖아....... 왜,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 그 안에 스토리가 꽉 찬 거야. 그러면 그 하루는 인생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될 수도 있지 않아? 겨우 하루라도 말이야, 안 그래?”

  나의 말에 영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약 5초 후, 커피 한 모금을 삼키더니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 있지. 맞아. 그런데 일부가 되냐, 전부가 되냐는 판단이나 선택에 의해 판가름 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엔, 난 판단을 해야 하고, 넌 선택을 해야 해.”

  난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뭘 봐, 인마! 너나 나나........ 그래도 너무 따지진 말자. 늘 그랬잖아. 이것저것 따지는 과정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도 너무 아니었잖아. 아무리 인생이 상처투성이라고 해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몸을 내맡기진 말자고.......!”

  영태는 말했다.

  “나, 이혼했어. 뭐, 어차피 이혼이랄 것도 없지만....... 수연이랑도 끝났고. 어제부로 회사도 그만뒀다.”

  영태는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나는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끔해 보였다. 멋쩍은 듯 또다시 ‘피식’하고 웃어 보이는 그가 가엾어 보이진 않았다.

  “네 하루도 참 길다....... 그럼 이제 하루가 지난 건가? 후........ 오늘은 또 오늘이네. 선택을 해야 되겠네, 이제 난. 내 하루가 전부가 될지, 일부가 될지.”

  한숨을 내쉬며 내가 말했다.

  “참....... 살다보니 이런 때도 있네. 저녁에 술도 아니고, 모닝커피라니....... 그것도 너랑....... 그래도 내가 최근에 마신 커피 중에 이게 제일 맛있다. 커피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네.”

  영태가 신기한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내린 거잖아! 아........ 나도 네가 말아준 소맥이 젤 맛있어.”

  내가 말했다. 영태는 나를 보고 웃었고 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 연차 쓸게요. 몸도 좀 그렇고, 어디 다녀올 데도 있고요. 그 동안만 저 대신 한 대리한테 맡겨주세요. 한 대리한텐 미리 말해 뒀어요......... 딱 3일만요. 대신 광주는 제가 갈게요........ 예........ 감사합니다. 부장님.......”

  난 내 자신에게 딱 3일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실컷 생각해보고 한 번쯤 꼴리는 대로 하고 싶었다. 판단이 서질 않아 그냥 선택을 하기로 한 것이다.

  영태 녀석은 이혼을 했다. 그를 내가 모르던 딴 놈으로 만들어 버렸던 수연씨와도 이별했다. 녀석이 결혼을 했을 때에도, 수연씨를 내게 처음 소개해 주었을 때에도 내가 알던 녀석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함께 모닝커피를 마셨던 오늘 아침에도 역시 그랬다. 중요한 건 그가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힘들었겠지만 영태는 그렇게 판단했고, 그 판단의 동기는 다른 무언가를 향해 있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을 향해 있었기에 확신이 있어 보였고 그래서 슬퍼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영태는 하늘을 날거라고 내게 말했다. 뜬금없는 그의 말에 난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생각해 보면, 학창시절부터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에게 주어진 피상적인 몇 가지 것들뿐이었다. 공부와 일밖에는 모르던 그는 ‘사랑’이 유일한 사적 범위로의 일탈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쳐 놓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온전한 사랑은 아니었더라도 자신은 사랑을 불태웠다고, 그것이 ‘사랑’의 의미가 아니겠냐고 내게 말했다. 다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그는 패러글라이딩과 스카이다이빙, 그리고 경비행기 등 하늘을 나는 모든 것들을 경험하러 갈 거라고 했다. 꽁꽁 숨겨 놓았던 자신의 바램들을 내 앞에서 풀어 놓고는 멋쩍은 듯 웃어보였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 진심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 졌다.

 

  8월 6일 월요일, 휴가 첫 날.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이지만 거리에 활기는 없었다. 저녁 7시쯤 난 ‘버닝 러브’를 오랜만에 찾았다. 아직 어둡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서 오세요.”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손님도 공연도 없었고, 사장님이 홀로 나를 반기셨다.

  “안녕하셨어요?”

  “어?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 동안 바쁘셨나 봐요?”

  내 인사에 사장님은 정말 반가워하셨다.

  “네, 출장 좀 다녀오느라....... 휴가 안 가세요? 이 동네도 오늘은 썰렁하던데.......”

  내가 말했다. 사장님의 미소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이게 휴가죠, 뭐. 하하.”

  사장님은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했다.

  “요즘 공연은요?”

  “아, 공연요. 여기저기 페스티벌 때문에 지난 주말까진 없었고요. 이번 주말엔 합니다. 금요일, 토요일....... 보러 오세요. 친구 분이랑.”

  “아........ 근데, 제 친구는 못 올 것 같고요....... 저는, 올게요. 보러!”

  난 사장님의 권유에 응답했다. 사장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바 뒤쪽으로 가시더니 맥주 두 병을 가지고 나와 하나를 내게 건네셨다.

  “감사합니다.”

  난 사장님과 건배를 나누었다.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이 씁쓰름하게 느껴지면서 목구멍을 찌르듯 넘어갔다.

  “크으.......... 정신이 번쩍 나죠?”

  사장님도 한 모금 마시더니 내게 말했다.

  “오........ 그러네요!”

  난 입안을 공격하듯 퍼지는 맛과 향에 놀라 인상을 쓰며 맥주의 라벨을 확인해 보았다. 아이스 복이었다.

  “어....... 여기선 처음 보는데요? 언젠가 체코 여행을 다녀 온 친구한테 들었던 것 같은데.”

  “아시네....... 제가 좋아하는 맥주에요. 제 친구도 좋아하죠, 아시죠? ‘버러’에서 드럼 치는 말자.”

  사장님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네요. 멋진 친구 분을 둔 멋진 사장님....... 자주 뵌 건 아니지만....... 부러워요.”

  난 맥주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말했다.

  “멋지긴요........ 그 친구는 맞아요. 내가 봐도 멋진 친구니까. 그런데 난 아니에요. 그 친구에 비하면 겁도 많고 소심하기 짝이 없어요. 후....... 원래 자신과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보이기 마련이죠. 멋져 보이고, 부럽기도 하고.......”

  사장님은 그저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어린 아이처럼 부끄러워하듯 말씀하셨다.

  “이 맥주 맛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신데요? 하하.”

  “아, 그런가요? 하하.......”

  내가 웃으며 말하자 사장님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맥주병을 보고는 멋쩍은 듯 웃으셨다.

  “겁이 많고 소심한 게 흉이 되기도 하죠, 때에 따라선. 그래도 스스로 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 아니겠죠?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보아 온 사람들 중에서 열에 아홉은 자신이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얘기했어요. 저도 그랬고요.......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들이 정말 겁이 많고 소심한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고요. 다들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는 것일 텐데, 자기 자신을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싶어요....... 왜냐면, 내가 보기엔 전혀 그런 사람 같지 않은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렇다면 겁이 많거나 소심하다는 것의 기준이 저마다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사장님도 자신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했다. 그리고 아이스 복을 들이켰다.

  “음........ 우리 둘 다 그런 사람일지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스스로 그런 사람이라고 말했던 겁 많음과 소심함의 자기 기준을 말해 볼까요?”

  가만히 내 얘기를 경청하던 사장님이 제안했다. 난 내가 말해 놓고도 당황스러웠다.

  “거 봐요. 당황하시네. 하하하....... 실은 나도 그래요. 몰라요........ 그게 내 판단인 건지, 타인의 판단인 건지조차. 답은 없는데 분명한 건 그거 같아요.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한다는 거....... 난 적어도 내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선 자신 있는데,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니까....... 사람들이 날, 내가 자신하는 나로 봐 주지 않을까봐 두려운 거죠. 자신감이 없진 않아요.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고 난 적응할 수 있는 만큼 적응하지만 끝내 안 되는 게 있잖아요. 이를테면 알레르기처럼....... 그런 거죠. 난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람일 뿐인데 그저 가만히 숨만 쉬어도 날 아프게 하는 먼지나 꽃가루, 자외선....... 뭐 그런 것들처럼........”

  “.......... 그런 거군요. 겁이, 소심함이.........”

  사장님의 얘기를 듣고 난 말했다. 사장님은 스스로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이유(?) 혹는 배경(?)에 대해 말해 주었지만, 난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해 놓고도 할 말이 없었다.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스 복을 들이켰다.

  “뭔가 몹시 망설여진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어떤 일에든 망설여진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누군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 않는 한. 하물며 이렇게 맥주를 마시며 얘기하다가도 오줌이 마려우면 얘기가 끊길까 두려워 화장실 가는 일도 망설이다가 어이없이 바지에 지리기도 하는데요? 하하하......... 지금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하하........”

  사장님과의 대화가 편안했다. 우리는 그렇게 아이스 복을 세 병씩 마셨고 들큰하게 취하는 동안 가게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영태 녀석 때문에 오게 되었던 ‘버닝 러브’의 첫 날을 떠올려 보았다. 세 병의 아이스 복이 기억의 화질을 높여 주었다.

  “무슨 기억을 떠올리는 거예요?”

  눈을 감고 왼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내가 사장님은 그렇게 보였나 보다. 사장님이 얼음물 한 잔을 내 앞에 놓으며 말했다. 난 움직이지 않고 엷은 미소만 지었다.

  “많이 그리운가 보네요.......”

  사장님이 말했다.

  “사장님은요? 사장님도 그리울 거 아니에요, 누군가........”

  내가 물었다. 내 혀는 이미 꼬여 있었다.

  “나요? 흠......... 없어요, 그런 사람.”

  사장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에이........ 거짓말 마세요. 그런 얼굴이 아니신데....... 누군가 막 그리워했던 흔적이 보이는데....... 사장님 얼굴에서.”

  “흔적이 보여요?”

  내 말에 사장님은 정말 놀라시는 것 같았다.

  “네, 상처가 아니더라도 자국같이 배어있는 얼굴이세요, 사장님 얼굴.......”

  내가 말했다.

  “그리워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그 사람 때문에 괴롭지도, 고민스럽지도 않으니까. 뭐, 일 년에 한 두 번은 생각날라나? 그래요....... 이 정도가 흔적일 순 있겠네요. 그래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니까. 사실 그리워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아픈 기억은 그런 법이죠.......”

  “.....................”

  난 말없이 사장님을 바라보았다.

  “사랑이라고 느끼고, 깨닫고, 끝내는 모든 과정이 그랬어요. 그래서 그 때 그랬죠. 이 지독한 길을 모두 지나 왔으니, 다신 가지 않을 거라고. 그 후론 만신창이가 된 나를 치료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어요. 그런 그리움 따위 남겨둘 리 없었죠........ 내 인생인데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없다고 여겼어요. 나한텐 사랑이 준 상처가 그랬어요.......”

  사장님이 아이스 복 하나를 더 따시며 말했다.

  “그건....... 너무 비극이잖아요....... 사랑은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 모든 감정들이 뒤섞인....... 고통까지도. 누군가는 사랑을 위해, 고통을....... 심지어는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어요. 뭐,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사장님이 너무 겁내시는 거 아니에요? 아예 그렇게 마음을 닫아 버리시면.........”

  내가 말했다.

  “후우.......... 맞아요, 그럴지도........ 사실 그게 제일 두려워요. 그래도 사랑은 찾아온다는 거, 그러고도 또 사랑하고 싶어진다는 거. 지금의 삶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무지 망설여 질까봐. 그리움이란 고통이 그렇게 날 망설이게 만들더군요. 이렇게 약해 빠진 나를.......”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하시는 사장님이 이젠 힘들어 보였다. 덥수룩한 수염과 백발과 흑발이 반씩 섞인 야인 같은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늘 사람 좋은 미소만 보이셨던 사장님이, 또한 어울리지 않는 여리디 여린 소년의 표정으로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고 계셨다.

 

  이곳에 처음 방문했던 지난 늦은 가을날, 피로와 맥주에 취해 그녀를 생각하며 앉아 있었을 때의 내가 지금 이런 모습이었을까. 나의 표정을 읽은 듯한 사장님의 말투가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적인 행위들을 의식하게 해 주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것이 있는 것 같아, 난 그것을 알고 싶었다. 우선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장소를 찾기로 하고 오늘 이곳에 왔다. 오랜만에 마주한 이곳의 공기가 새삼 낯설게도 느껴졌지만 세 병의 아이스 복과 사장님으로 인해 지금 다시 이곳의 냄새와 공기가 온몸에 흡수되는 것 같았다. 이대로 눈을 뜨면 그가 내 앞에 서 있을 것만 같았다.

 

  8월 7일 화요일, 휴가 이틀째.

  취기를 빌어 잠을 잤지만 술기운을 깨는 정도였다. 눈을 떠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안 되어 있었다. 두통이 느껴졌다. 잠시 지난 밤, 아니 조금 전 곽 사장님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침묵해 있던 내게 사장님은 음악을 들려주었었다. 유재하의 노래였다.

  “내 취향이에요. 사실 이런 데서 공연하는 밴드 음악보다는....... 후후.......”

  사장님이 말씀하시고는 가사를 읊조리시던 표정이 생각났다. 하지만 내가 무슨 반응을 보였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난 한동안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리고 나서 다시 시계를 보니 겨우 이 삼분 정도가 흘러 있었다. 불연 듯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간밤,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오늘은 그를 만나겠다고 결심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화요일이면 그가 편의점에 출근할 것이다. 그가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일하는 시간이나 요일을 변경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도 언젠가 내가 그 시간에 출근할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있다면........

  7시를 넘기는 게 고역이었다. 몸을 일으키니 숙취가 조금 느껴졌다. 난 바로 음악을 틀었다. 그에게 선물로 받았던 ‘버닝 러브’의 정규앨범. 한동안 듣지 못했던 노래들을 난 반사적으로 따라 흥얼거렸다. 이른 시각에 이웃에 폐가 될까봐 볼륨을 높일 수가 없어서 난 욕실 문을 열어 놓은 채로 샤워를 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와서는 말끔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했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이 좀 부어 있었다. 잠시 ‘내가 어제 울었었던가?’ 생각해 보았는데 그런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냉동실에 있던 아이스 팩을 가져와 눈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있었다. 거울을 계속 확인하며 부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몇 번을 반복하자 아이스 팩의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지 시작했다. 난 다시 거울을 보고 루미너스 조명의 밝기를 조절하듯 눈빛을 밝히려 애썼다.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부기는 가라앉은 듯 했다.

  난 커피를 내렸다. 머그잔을 가득 채우고 창가로 갔다. 흐린 하늘이 어둡게 보였고 여기저기엔 벌써 불빛이 가득했다. 그 때처럼 에어컨을 켜고 커피 향을 방안 가득 퍼지게 했다. 숙취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커피는 여전히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드디어 7시가 되자 난 집을 나섰다. 편의점에 도착했을 땐 7시 20여분쯤. 회사 앞이었으나 난 의식하지 않았다. 날씨는 여전히 아침부터 푹푹 쪄댔고 난 편의점 출입문 옆 파라솔 아래에 앉았다. 아무 것도 듣고 있진 않았지만 난 휴대폰에 연결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정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 소리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눈에 보이는 풍경들조차 정지화면처럼 느껴질 만큼 침묵 속에 있을 때, 익숙한 트럭의 엔진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정차하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시선은 곧 그 쪽으로 향했고 운전석에서 익숙한 모습의 그가 내렸다. 그의 동선을 따라 내 시선이 이동했다. 그는 우유 상자를 들고 문 앞까지 와서야 나를 발견했다. 난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심장이 쿵쾅대는 대신 싸하게 아려왔다.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내게 먼저 인사했다. 어색하게 들리는 인사말이었다.

  “어....... 잘 지냈어?”

  내가 말했다. 그는 잠시 서 있다가 눈짓으로 우유 상자를 가리키고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난 그제야 이어폰을 빼고 그가 나올 때를 기다렸다. 조금은 초조했다. 편의점 안에 있는 그를 힐끗 보았다. 늘 그랬듯 그는 새 우유를 정리하고 재고를 다시 상자에 채우고 편의점 직원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시 상자를 들고 출입문 쪽으로 그가 향하자 난 얼른 몸을 돌렸다. 곧 문소리가 들리고 난 그를 보았다.

  “좀 피곤해 보이시네요.”

  이번에도 그가 먼저 말했다.

  “그, 그래? 술을 좀 마셨더니........ 잘 지냈지?”

  난 그에게 다시 물었다.

  “네....... 뭐, 보시는 것처럼 늘....... 그래요.”

  “음........ 잠깐....... 시간 괜찮아?”

  내가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 오늘은 바로 연습이 있어요.”

  “아......... 연습.......”

  “낼요....... 내일은 오후 연습이고, 오전엔 잠깐 돼요, 시간.”

  “오전? 그럼, 오전 언제쯤.......? 어디서.......? 내가 갈게.”

  “오전 아무 때나........ 아무 때나 오세요....... 낼 봬요.”

  그는 담담히 내게 말하고 가버렸다. 표정이 없었다. 그의 심경을 읽어 낼 수 없어서 난 답답했다. 그래도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여겼다. 난 또 다시 몇 시간을 그렇게 보내야 했다. 뚜렷한 목표 없이 알 수 없는 생각들로만 가득 채운 시간을 보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하루가 일 년 같은 기분을.

 

  8월 8일 수요일, 휴가 마지막 날. 오전 9시경,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그의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택시를 잡았고 잠시 후 ‘버닝 러브’앞에 도착했다. 이곳 골목은 역시 조용했다.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아 잠시 문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금방 오셨네요.”

  그가 뒤에서 나타났다.

  “어! 어.......”

  난 깜짝 놀라 말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내 앞으로 와서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지하 연습실로 향하는 낮은 계단이 나타났다. 지하였지만 시원함보다는 약간의 곰팡이 냄새와 눅눅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여기....... 자주 와 봤어도 몰랐네.”

  내가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펍 하고는 분리되어 있어요. 원래는 무대도 분리되어 있었는데 연습실 때문에 클럽이 작아 진거라 하더라고요. 배보다 배꼽이 크죠........”

  그가 살짝 웃었다. 작은 미소였지만 그 미소 하나로 순간 어제 오늘의 모든 고역의 시간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아침 먹었어요?”

  그는 내게 물었다.

  “아, 아니....... 아직. 넌?”

  난 그에게 물었다.

  “아직까지 밥도 안 먹고 뭐하셨어요? 시간이 몇 신데.......”

  그가 어린 아이 나무라듯 내가 말하고는 기타 케이스 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거라도 우선 드세요. 딱히 대접할 게 없네요.......”

  그가 오백미리짜리 우유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아냐, 대접은 무슨....... 배고프지 않아, 아직.”

  내가 말하자 그는 우유를 내 손에 턱 얹어 놓았다.

  “더운데 있어서 시원하진 않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서 밥을 먹을 걸 그랬어요.”

  “괜찮다니까....... 고........ 고마워. 잘 마실게.”

  난 우유를 개봉해 입에 가져갔다. 그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커다란 선풍기를 틀어 주었다. 그러고는 내 옆에 나란히 걸쳐 앉았다.

  “보시다시피 에어컨이 고장 났어요. 이것도 쓸 만해요.”

  “넌....... 정말 땀도 안 흘리네?”

  “아, 죄송해요. 너무 제 생각만 했네요.......”

  “아, 아니야. 그런 뜻은 아니고....... 나도 별로 안 더워.”

  당황하는 그에게 난 이렇게 말했지만 머릿속에서 목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마침 느껴졌고 그의 시선 또한 내 목덜미를 향하고 있었다. 서로 민망함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일은 잘 끝났어요?”

  침묵을 깬 건 역시 그였다.

  “응. 우선은....... 좀 쉬었다가 여기 일 먼저 처리하고, 또 가봐야 해. 완전히 끝날 때까진 몇 번 더 가야 할 거야.”

  “음........”

  그는 내 말을 듣고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는 테이블에 올라앉으며 말했다.

  “그저께....... 여기 왔었는데........ 오랜만에 궁금해서 왔다가 곽 사장님하고 한 잔 했어.”

  내가 말했다.

  “그래요? 무슨 얘기 했어요, 두 분이?”

  “음....... 뭐, 이런저런.......”

  “아........”

  그는 궁금해 하듯 물었지만 더 이상 알려고 하진 않았다.

  “페스티벌 공연 했다고 들었어. 곽 사장님한테.”

  “아....... 네, 했어요.”

  이번엔 내가 먼저 화제를 꺼냈지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음....... 아, 이번 주 공연한다면서? 보러....... 갈게.”

  “네, 그러실래요?”

  “.................”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대화가 진전되지 않았다. 난 어색함에 그가 건넨 우유를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음....... 여전하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난 그에게 말했다.

  “그거에요?”

  나의 말에 그가 물었다. 말투가 날카롭게 들렸다.

  “응?”

  “잘 지내나....... 그냥 그게 궁금했던 거예요? 오늘....... 보자고 한 이유가.......”

  그가 말했다. 숨이 가쁜 듯 내뱉는 그의 말에 난 버벅댔다.

  “어....... 그냥....... 오랜만이니까....... 잘 지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정말 그뿐인가 보네. 난 또....... 보시다시피 이렇게 지내요. 여전히. 확인 끝나셨으면....... 이제 맘 편해 지셨으면........ 됐어요.”

  혼잣말 하듯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성이 마비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자 한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무엇 때문에 지금 이 아이를 만나려고 했던 것인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게 아님은 분명했다.

  “아니, 그런 것만은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는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촉촉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눈을 보자 난 숨이 막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한동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었어.”

  내가 말했다. 그의 눈이 촉촉이 젖어 반짝거렸다.

  “보고.......싶었어. 그래서 왔어.......”

  난 다시 한 번 말했다.

  “참...........”

  그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다시 고개를 떨궜다. 젖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난 몸을 돌려 그의 젖은 뺨에 손을 가져갔다. 내 손 위에 그가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발가벗겨진 듯 한껏 움츠렸던 몸이 순간 자유로워지는 듯 했다.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은 자유로움이었다. 설움에 젖은 그의 얼굴을 난 바라보았다. 그를 그리워하고 있던 지난 6주의 시간이 하나하나 스쳤다. 그 6주간 날 그리워했을 그의 모습도 겹쳐졌다. 가슴이 저렸다. 그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난 끝내 그의 얼굴을 매만지기만 하며 눈을 꼭 감았다.

 

  8월 9일 목요일.

  휴가를 마치고 출근을 했다. 목요일은 그가 일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오전 7시가 되기 전에 난 집을 나섰다. 다른 날과는 기분이 달랐다. 집을 나서서부터 회사 앞에 도달할 때까지 마치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100미터 달리기 선수마냥 가슴이 떨려왔다. 편의점을 향해 걷고 있을 때 오른 쪽 건너편에서 그의 트럭도 다가오고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편의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그도 차를 세우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는 나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짓고 아무 말 없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딱 들어맞았네.”

  내가 먼저 말했다.

  “아.......”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얼른 냉장고를 열어 내게 우유를 건넸다.

  “내일 공연 연습 때문에 얼른 끝내고 가야해요....... 아침, 꼭 챙겨 드세요.”

  “그럴게.”

  내가 대답하자 그는 환해진 얼굴로 냉장고로 향했다.

  “내일, 공연 때 봐!”

  그의 뒷모습을 향해 내가 말했다. 다시 뒤돌아보고 그는 웃었다. 언젠가부터 날 답답하게 했던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8월 10일 금요일 오후, 공연 날.

  [어디예요? 오셨어요?]

  [가는 중. 곧 도착해. 준비 잘해!]

  문자 메시지를 나누고 약 10분 뒤, ‘버닝 러브’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영태와 함께 왔을 때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었는데 유난히 여자관객들이 많아 보였다. 난 인파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젊은 남자 관객을 찾았다. 커플로 보이는 몇 명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난 다시 곽 사장님을 찾았다. 바 안에 계신 듯 했지만 바빠 보여서 겨우 눈인사만 나눌 수 있었다. 난 아르바이트생에게 맥주를 주문하고 겨우 앞자리가 아닌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갈증에 맥주 한 병을 단번에 마시고 직접 바에서 한 병을 더 가져 왔을 때 무대에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내 자리에선 무대가 잘 보였지만 무대 위에서 내가 보일지는 알 수 없는 위치에 서 있었다. 무대에 올라 관객을 두루 살피고 있는 그가 보였다. 난 앞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가 나를 보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아이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경쾌한 기타 솔로가 깔리고 파워풀한 드럼이 겹쳐지면서 ‘버닝 러브’의 정규앨범 속 네 번째 트랙 ‘하늘하늘’이 시작되었다. 가사는 그렇지 않은데 시원한 리듬과 반복적인 멜로디가 여름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지는 곡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오래된 노래들 몇 곡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곡들로 무대가 채워졌다. 전반적으로 계절에 맞게 편곡을 한 모양이었다. 평소엔 다소 어두운 이미지의 밴드였지만 이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연주도, 목소리도, 표정도 경쾌했다.

  한 시간 남짓의 ‘버닝 러브’ 공연이 끝났다. 그리고 ‘그루브’라는 언더그라운드 재즈 뮤지션의 공연이 이어졌다. 처음 들어보는 그들의 음악은 달아올랐던 이 작은 공간의 공기를 촉촉하게 적셔주고 있었다. 난 맥주를 더 주문했다.

  [나올 수 있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내일 공연 때문에 밤 연습이 있어요. 내일은 오늘과 조금 다르거든요.”

  “아, 그래........ 보기 좋다. 아까, 되게 신났어.”

  내가 말했다. 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뭔가 망설이는 듯 보이더니 내게 물었다.

  “내일....... 바쁘세요?”

  “아니....... 왜?”

  “그럼, 내일도 오실래요?”

  “음, 그래.”

  그는 망설이며 물었지만 난 흔쾌히 대답했다.

  “내일 공연 끝나고......... 피곤하지 않으시면....... 괜찮으시면........ 바다........ 안 가실래요? 어........ 피곤하면 관두시고요. 꼭 가자는 건 아니에요.......”

  꽤나 망설였던 흔적이 보이는 멘트였다. 귀여워 보였다.

  “응, 가자.”

  난 또 흔쾌히 대답했다.

  “하하....... 그럼 내일 봬요. 오늘은 그만 마시고 들어가서 쉬세요. 내일 가려면.......”

  그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난 그런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시던 맥주를 다 마시는 동안 ‘그루브’의 감미로운 재즈를 감상했다. 늘어지는 듯한 재즈 퍼커션과 트럼펫 소리가 귀 속에 녹아들었다.

 

  다음 날 공연은 그가 예고했던 대로 전 날과는 조금 다른 선곡이었다. 경쾌한 편곡과 함께 가을이 연상되는 감미로운 리듬의 편곡도 선보였다.

  이번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어제 그와 했던 약속 때문에 아침부터 영태에게 차를 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영태는 단양에 있다고 했다. 그의 동생에게 맡겨놓은 차를 찾아와야 했기에 염치 불구하고 영태 어머니 몰래 주말 아침부터 동생을 찾아댔다. 영태 녀석의 상황을 아직 어머닌 자세히 알지 못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난 차로 이동했다. 그도 혼자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이어서 메시지를 보내놓고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9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는 것 같아 전화를 해볼까 망설이고 있을 때 누군가 차 문을 두드렸다.

  “많이 기다렸죠?”

  그를 확인하고 문을 열자, 그는 말했다.

  “걱정했어. 혹시 못 오나 싶어서.......”

  내가 말했다.

  “하하, 정말요? 설마요....... 먼저 약속해 놓고 깨는 짓은 안 해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출발할까? 어디 특별히 가고 싶은데 있어?”

  난 시동을 걸며 그에게 물었다.

  “음....... 아뇨. 그냥 바다면 돼요. 그냥 수평선이 보이는 곳이면요.”

  “가 본 곳 중에 기억에 남는 데라도 없어?”

  난 다시 물었다.

  “바다에 가 본 적이 없어요. 처음이에요.”

  뜻밖의 그의 대답에 난 놀랐다.

  “정말?”

  “예전에 할머니가, 저 네 살 때 제부돈가? 엄마랑 갔었다고 하셨는데....... 기억은 없어요. 그냥 형이 좋은 곳에 가면 돼요. 바다면 그냥 다 좋아요.”

  그가 말했다.

  “아, 음....... 그렇다면, 난 시퍼렇고 파도가 험한 곳 보다는 잔잔하고 흑백인 바다를 좋아하는데, 괜찮아?”

  “네, 좋아요!”

  난 안면도로 방향을 잡았다.

  “이렇게 가 본 적 있어요? 누군가와 훌쩍........ 해 보셨겠죠, 형은?”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수줍게 내게 물었다.

  “.......음....... 뭐, 그런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땐 뭐, 바다가 생각나긴 하니까.”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순간 연희와 떠났었던 밤바다 여행이 떠올랐지만 난 대충 대답했다.

  “하긴, 여자 친구랑 가봤겠죠. 영화 같은데서 보면 여자들이 잘 그러더라고요. 저처럼....... 갑자기 바다 가고 싶다고 하면 남자들은 못 이기는 척 밤바다로 떠나죠. 형도 그런 경험이었던 거죠?”

  난 왠지 대답이 망설여졌다.

  “어....... 뭐, 비슷했던 것 같아.......”

  내가 대답하자 그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어색해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영화에서 본 것처럼 실제로도 다들 그러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난 공연이 끝나고 그를 기다리며 사 놓았던 커피가 생각났다.

  “아! 이거 마셔.”

  운전석 옆에 있던 봉투를 가리키자 그는 커피를 꺼내어 하나를 따서 나에게 주었다. 난 그것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그에게 물었다.

  “할머니랑 살았었다면....... 할머닌, 돌아가신 거야?”

  “네, 열세 살 때요.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랐었어요.”

  그가 말했다.

  “아........ 그럼, 부모님은?”

  “엄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위암으로. 아빠는 안 계셨고요. 아빠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음....... 어릴 적 기억으로는....... 엄마랑 할머니는 아빠에 대한 얘기를 전혀 안 하셨어요. 내가 물어봐도. 가끔 할머니가 내가 듣는 줄도 모르고 있지도 않은 아빠를 욕하고는 했는데....... 뭐, 결국은 몰라요. 난 더 이상 묻지도 않았고....... 두 분 다 그러다 돌아가셨으니까.......”

  그가 말했다. 난 아무 대꾸도 않고 있었다. 그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요, 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엔 저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많아요. 저도 엄마랑 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고 불쌍한 줄 알았어요. 근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나이는 어리지만 살면서 많이 봤어요. 나보다 훨씬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 어차피 불행이란 게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내 일부로 떠안고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그렇듯 그게 일부일 순 있어도 전부가 될 순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 미래가 있으니까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나는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다가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담담하고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서 룸미러에 내 얼굴을 슬쩍 들이대어 보았다. 애처로운 표정을 나는 짓고 있었다. 난 그를 다시 한 번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보여. 행복해 보여, 너. 정말.”

  난 그에게 말했다.

 

  두 시간 남짓을 달려 안면도 바다에 도착했다. 어둠 때문에 수평선도 모래사장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습한 바람에 실려 오는 짠 내를 맡으며 그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성수기인데다가 토요일이라 해수욕장은 복잡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벗어나려고 자갈밭 쪽에 차를 세웠다. 어쩔 수 없이 밤늦게 라도 바닷바람을 쐬려 하는 여행객들은 도처에 있었다. 그는 전혀 게의 치 않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처럼 바다를 향해 달렸다. 난 그를 따라 걸었다. 그는 바로 신발을 벗어들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아....... 바다구나, 이게. 수평선도 보이는데요? 파도도 있고요!”

  그는 나를 보고 소리쳤다. 수평선은 달빛에 아주 희미하게 보였고 파도는 잔잔했다. 난 혹여나 젖을까 멀찍이 서서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형! 이리 와요!”

  그는 내게 손짓했다.

  “아니야, 난 괜찮아.......”

  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와요, 형. 뭐가 걱정인 거예요? 그냥 바단데....... 시원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해요!”

  “............”

  난 그저 미소로 거절하며 뒤돌아서려 했다. 그 때 그가 내 앞으로 달려와 내 손을 잡고 바다 쪽으로 이끌었다.

  “아! 잠깐만!”

  난 소리쳤지만 발이 빠지는 건 한순간 이었다.

  “어때요? 시원하죠? 아니, 따뜻한가? 아무리 바다를 많이 경험했어도 좋은 건 좋은 거죠. 막상 와 보니까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이게 안 좋을 수 있어. 하하.......”

  그는 정말 행복하게 웃었다. 차가운 듯 했던 물이 그의 말대로 금세 따뜻한 느낌으로 온몸에 전해졌다.

  그는 맨발로 한참을 다녔다. 나도 그를 따라 걷다 멈췄다가를 반복했다.

  “난 재밌는데, 형이 심심한 것 같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바위 쪽으로 나왔다. 그를 지켜보며 걷다가 난 길 쪽에 있는 작은 바위 위에 걸쳐 앉았고 곧 그도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고마워요!”

  그가 말했다.

  “뭐가?”

  “바다요, 형이 저한테 선물을 준 거예요. 바다선물.......”

  그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선물은 무슨....... 네가 원했잖아. 나도 답답하던 차였는데, 덕분에 속이 좀 트인다.”

  내가 말했다.

  “힘들었어요? 많이?”

  “글쎄........ 직업인데 뭘. 체력관리 못하는 내가 문제인 거지.”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고 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난 그걸 물은 게 아닌데.......”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그를 바라보았다.

  “형이 처음 ‘버러’에 왔을 때요....... 그 때 봤던 표정이었어요. 지난번에.......”

  그의 말에 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때요. 늦가을, 비 오던 날....... 늘 앉던 그 자리에서 처음 공연 보실 때, 힘들어 보였어요, 형....... 웃고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그렇게 계셔서, 저는....... 그 날, 형을 위해 노래했어요. 위로해 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그래요. 며칠 전 형 표정이 그랬거든요. 하......... 위로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놀랐다. 그 때의 그가 지금 이렇게 내 곁에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그 때도 지금도, 차갑게 얼어붙은 듯한 마음에 불볕처럼 그는 따스했다.

  “참....... 누가 누굴 위로해. 내가 너한테 감히.......”

  그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게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는 말을 하는 그를 바라보는 순간, 그 하얀 얼굴과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 노래하듯 조용히 깨무는 입술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그 얼굴을 마주하고 깊이 키스해 주고 싶었다.

  우리가 등지고 있던 길 가엔 드문드문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고 그 건너편엔 작은 편의점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오갔다.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내 눈을 보고는 다시 눈물을 훔쳐 주었다. 난 끝내 그를 안아주지 못했고, 또 한 번 그는 이런 날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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