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춥지만 해가 제법 길어져 출근시간이 그리 을씨년스럽지는 않았다. 겨울의 어두운 아침은 늘 그랬다. 하루의 출발을 어둠에서 시작하면 내가 마치 몽유병 환자라도 된 느낌이 들곤 했다. 몸은 깨어 있으나 정신이 아직 깨지 않은 상태로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것 같았다. 오후가 돼서야 정신이 들고나면 꽤 불쾌하게 느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밝은 아침은 내게 긍정의 에너지를 주기에 충분했다.
난 회사 앞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었고 ‘00우유’ 트럭도 같은 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난 발길을 재촉하여 그가 차에서 내리는 타이밍에 맞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네요!”
난 반가웠다.
“안녕하세요....... 잠깐만요!”
그는 아침 같은 미소로 내 인사에 답하고 냉장고에서 우유 박스들을 겹쳐 꺼냈다. 난 얼른 편의점 출입문을 열어 그가 박스를 옮기는 일을 도왔다.
“고맙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곧 박스를 내려놓고 우유 하나를 꺼내어 내게 주었다.
“오늘은 감사의 표시에요!”
그가 말했다. 난 어리둥절 우유를 받았다.
“공연, 오셨었죠? 친구 분이랑....... 와주셔서 감사해요.” 하며 수줍게 그가 웃었다.
“아, 네....... 잘 먹을게요....... 아, 신곡 정말 좋았어요!”
내가 말했다. 그는 아까보다 좀 더 수줍게 웃었다.
“어....... 앨범은 나온 거예요? 꼭 사서 듣고 싶은데.......”
내가 말했다.
“네, 이틀 전에....... 첫 정규라 많이 찍진 않았어요....... 제가 다음에 하나 드릴게요. 그럼.......”
그는 목 인사를 하고는 우유 박스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저 분 우유, 제가 드린 거니까 계산 안 하셔도 돼요.”
그는 카운터 직원에게 얘기한 후 창고로 향했다. 난 그가 준 우유를 들고 샌드위치만을 계산 한 후 편의점을 나왔다.
봄바람이 벌써 부는 것 같았다. 오전 11시를 넘겨서야 눈을 떴다. 햇살 때문에 창문을 열었더니 내 방보다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이 따뜻한 기운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늘 그랬던 것처럼 차가워야 할 공기가 이젠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러면 안 되는 일이 그렇게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밤새 시달렸던 꿈이 아직 덜 깬 것이리라 여겨 버렸다.
늦은 오전이어서, 늘 하루의 시작이었던 이건이에게 전화하는 일을 오늘은 하지 못했다. 한겨울 찬 공기가 사라진 며칠 전부터 그랬다. 난 한심하게도 오늘도 이렇게 날씨 탓만 하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같은 마음이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버닝러브’에 합류한 후 이건이는, 첫 인상과는 달리 붙임성 있게 팀에 적응했고 스스로 편해지려고, 또 우리를 편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 모습이 난 좋았다. 반면 혼자 있는 그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쓸쓸한 느낌이 그에 대한 나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에게 먼저 좋다고 말할 때도 난 망설임이 없었다. 그에게로 향하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 또렷했기 때문에. 난 그렇게 너무 쉽게 시작했었나 보다. 그 때 그 마음이 다 인줄 알았는데 나조차 몰랐던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았을 땐 이미 확신이 들었고 그렇게 다가갔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허상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대로 있었을 뿐, 다가간 건 나였다. 이제 와서 우주처럼 커져버린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뺨을 스치는 이 봄바람이 원망스러웠다.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앨범 작업도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에 난 느린 오전을 집에서 보냈다.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버닝 러브’로 향했다. 가게엔 아무도 없었다. 말자 언니의 작업실도 비어 있었다. 말자 언니와 은복이는 그럴 수 있지만 이건이가 없는 것은 이상했다. 잠시 오늘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잡념에 사로잡힐 뻔 했다. 난 곧 정신을 가다듬고 건반을 세팅했다.
얼마 전 써 놓은 가사에 곡을 입히는 작업 중이다. 이건이에게만 보여 주었던 가사인데 이번엔 꼭 좋은 곡으로 탄생시켜 앨범에 싣고 싶었다.
문 밖에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어 건반 연주를 멈추어 보았다. 말자 언니와 은복이의 목소리 뒤에 이건이의 웃음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곧 세 사람은 작업실로 들어왔다.
“아이씨....... 깜짝이야!”
앞장서 들어온 은복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왔네?” 라고 말하는 말자 언니마저도 놀란 눈치였다. 반면 이건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게 손을 흔들었다.
“셋이 어디 다녀와요?”
내가 물었다.
“아니. 요 앞에서 만났어. 난 꽉네 다녀오는 거고.......”
말자 언니가 침착하게 말했다.
“안 나올 것처럼 말하더니....... 왜 나왔어?”
은복이가 곧 평정을 찾고 내게 물었다.
“그냥....... 날씨가 좋잖아.......”
내가 말했다.
“네 얼굴은 구린데? 왜, 오늘 무슨 일 있어?........ 그러고 보니 너 요즘 좀 그래.”
“내가 뭘!”
은복이의 말에 왜 그런지 짜증이 나서 쏘아 붙였다. 나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세 사람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난 세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창피해서 어설프게 표정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출입문을 나와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반쯤 올라왔을 때 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은수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이건이가 아닌, 말자 언니였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말자 언니는 곧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미안해요....... 아, 근데 진짜 별 일 없어요. 그냥 피곤이 안 풀려서....... 작업도 잘 안 풀리고.......”
내가 말했다.
“안 풀리면, 쉬어. 안 풀리는 걸 붙잡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원래 뭐든 맘대로 되지 않아....... 내 맘도 맘대로 안 되는데 남의 맘이 맘대로 되겠니....... 몰랐던 것을 아는 일은 엄청난 일이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안 풀리면, 그냥 좀 쉬라고.”
말자 언니는 내게 말했다. 언니의 얘기를 듣고 난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는 것도 같았다. 그 상태로 난 완전히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초봄의 오후 햇살이 무척이나 맑아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고 오전에 맞았던 것 보다 좀 더 데워진 공기가 나를 감쌌다. 젠장, 시원한 느낌의 옅은 바람마저 날 따라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우연히 고개를 들었더니 골목 옆 담장 아래 가로수로 서 있는 산수유나무에 노랗게 꽃이 피고 있었다.
‘망할!’
완벽한 초봄의 오후, 이 사랑스러운 것들이 나를 울게 했다. 난 그렇게 이 날의 날씨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봄의 풍경을 망치고 있었다.
“곡 좋더라. 늦더라도 완성되면 꼭 먼저 들려줘!”
이건이가 내가 녹음해 놓은 곡의 초반부를 들어본 모양이었다.
“휴....... 언제 끝날지 몰라. 너무 기대하지 마.”
내가 말했다.
그를 아무렇지 않게 예전처럼 대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았다. 사실 예전처럼 그렇게 그를 대해도 될지 잘 모르겠다. 내 마음은 이미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고 그의 맘은 나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말이다. 말자 언니의 말이 가시가 되어 날 쑤셔댔지만 날 누구보다 잘 아는 언니가 이유 없이 뱉은 얘기는 아닐 것이다. 난 여유를 되찾으려 노력해야 했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수없이 많고 일분일초도 쉴 틈 없이 그에게 묻는 상상을 하지만 말자 언니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온전히 나의 몫이니까 내가 그러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요즘....... 무슨 일 있어? 곡 작업 말고.......”
이건이가 내게 물었다. 난 사실 놀랬다. 그가 이런 날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한 편으로는 너무 때늦은 물음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
난 대답대신 그를 살며시 바라보았다. 그는 급히 내 눈을 피했다. 그가 모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나만의 느낌이라고 하기엔 그의 물음이, 내 시선을 피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게 정말 궁금하니?’, ‘내가 무슨 대답을 해주길 바라니?’, ‘그래, 난 무슨 일이 있는데, 너는 아무 일 없는 거야?’, ‘너, 처음부터 그랬던 거니?’.......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무 말 않고 있기가 굳이 민망해 겨우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아니.” 한 마디였다.
“그래.......?”
씁쓸한 듯 나지막이 대답하는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러고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시간적으로 조금 여유로워졌을 뿐,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니까. 여전히 그는 내 일을 도와주었고 함께 밥도 먹어주고, 밤늦게 귀가 할 땐 집에 바래다주기도 했으며, 밴드 홍보작업이나 곡 작업에도 여전히 열심이었다. 그런 그를 그냥 그대로 지켜봐야 하는 것은 마치 나의 의무처럼 되어버렸고 난 그러려고 애썼지만 이젠 그 시간마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같은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는 두 평행선처럼 어리석고 답답하게 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난 편의점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편의점 앞에 세워져 있는 ‘00우유’ 트럭을 향하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그가 멀리서도 보였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내 발길이 트럭까지 다가가기도 전에 그가 운전석에서 내리면서 내게 먼저 인사했다. 난 여유로운 미소로 답했다. 그는 곧 차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CD였다.
“이거.......”
그가 정말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난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연 때 못 들어보셨던 것도 많을 거예요. 평가해 주셔도 돼요.”
그가 말했다.
“아....... 고마워요....... 직접 사고 싶었는데.......”
난 미안해하듯 말했다.
“제가 드린다고 했잖아요. ‘11월’이라는 곡이 타이틀이에요. 제가 만든 거고....... ‘내 방’이라는 곡도 더블 타이틀인데, 가사를 잘 들어보세요. 저희 리더 누나랑 베이스 친구가 만든 거예요! 물론 다 좋지만 취향이 있으실 테니까.”
손가락으로 리스트를 짚어가며 짧은 소개를 하는 그는 수줍은 듯 얘기했다. 그래도 말투에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난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굳이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출퇴근 할 때마다 들을게요.”
내가 말했다.
“그럼....... 출근하세요. 훗, 저는 벌써 일이 끝났거든요. 가 볼게요!” 하며 그는 차에 올랐다. 난 그에게 뭔가 말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 음....... 고마워서 그러는데, 언제든 보답하고 싶어요.” 난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주며 말했다. 차에 오르려던 그는 내 명함을 받아들고는 말했다.
“성함도 이제 알았네요. 저는 김이건이에요. 그냥 건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아....... 말 편하게 하셔도 되고요.......”
그는 또 수줍은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곧 차를 돌려 가는 그를 바라보며 그제 서야 난 웃었다. 그에게 받은 CD를 가방 안에 넣고 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샌드위치 하나와 우유 하나. 지겨울 법도 한 아침 식사를 계산하려 카운터 알바생에게 내밀었다.
“‘00우유’ 직원이 이걸로 드리라는데요?”
알바생은 오늘자 우유를 가지고 와 바코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