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이른 시간이나 홍대거리는 반짝이고 있었다. 곳곳에 흐르는 음악소리와 오가는 사람들이 내게 현실을 깨닫게 했고 조금은 귀찮게도 느껴졌다. 비에 젖어서인지 더욱.
차가 진입하기 어려운 골목이었다. 살짝 상기된 분위기의 영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그 골목으로 안내했다.
“야....... 나 피곤해......”
그를 따라가며 난 말했다.
“그러니까, 인마!”
녀석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쉬이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녀석을 따라 열 개 남짓의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크지 않게 밴드의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만 들릴뿐 아무도 없었고 작은 스포트라이트 몇 개만이 빈 무대를 밝히고 있었다. 조명 빛 아래 흩날리는 먼지들과 지하의 쾌쾌함, 뭔지 모를 단내가 섞인 냄새는 익숙한 듯 하면서도 낯선 이국적인 작은 도시의 거리를 떠올리게 했다.
“여기 앉자. 잠깐만.”
영태가 내게 말했다. 스무 평 남짓한 홀은 그 반이 무대를 차지하고 있었고 오른 쪽으로는 좁은 복도가 있었는데 그 쪽으로 주방이나 바가 있는 것 같았다. 흐릿한 조명만이 그것을 알아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영태는 그 복도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영태는 그 곳에서 맥주 두 병을 가지고 나왔다. 작은 홀 왼쪽으로는 출입문 근처까지 긴 테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무대와 긴 테이블 사이에 서너 개 정도의 작은 테이블이 더 있었다. 우리는 맨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내가 피곤함에 맥주 한 병을 들이키는 동안 우리 둘 외의 손님은 없었고 밴드도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영태가 맥주를 가지러 그 복도 안쪽으로 들어가면 녀석과 누군가가 대화하는 소리가 잠깐씩 들릴 뿐이었다.
“여기 분위기 어때? 죽이지?”
맥주를 건네주며 영태가 물었다.
“그러네.......”
난 대충 대답했다.
“여기 아니면 너 굳이 끌고 오지도 않았어. 시차적응하기 딱 이거든. 흐흐.......”
음흉하게 미소를 흘리며 녀석은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난 그의 의도가 궁금했지만 물어보는 일조차 귀찮아 맥주만 마셔댔다.
“잠깐만........”
그는 내 등을 툭 한 번 치고는 다시 그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맥주를 다 비우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몇 분 정도 지났을까, 무념무상 상태였던 난 처음으로 그 노래를 듣게 되었다. 영태 녀석이 들어간 그 복도 너머 어딘가에서. 마취약이 몸에 퍼지는 느낌이었다. 쾌쾌한, 어둡고 축축한 이 낯선 공간에 나를 녹아들게 했다. 아련했다. 아름다웠고 이 찬 공간의 습기가 날 따뜻하게 감쌌다. 난 눈을 감았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도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뜨면 뜨거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애써 목구멍으로 삼키고 또 삼켰다. 다시 조용해진 그 때,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내 눈을 뜨게 했다. 그 복도 너머에선 밴드의 연주 소리가 다시 희미하게 들려왔고 출입문을 들어선 한 여자는 나를 힐끗 한 번 보고는 영태가 들어갔던 그 좁은 복도 안으로 직진했다. 이내 대화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영태가 나왔다. 방금 그 여자와 함께.
“내가 말했던 친구, 도강호.......”
두 사람은 내게 다가왔다. 녀석이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나를 소개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수연이예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난 아직 목구멍에서 맥주가 넘어가지 않은 상태여서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 이 친구가 긴 여행에서 조금 전에 도착했어. 시차적응도 안되고 피곤할 텐데 내가 강제로 끌고 왔거든.”
하며 영태는 웃었다. 난 그제야 지난밤 잠결에 받았던 녀석의 전화를 기억해 냈다. 맥주가 여전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저는 일할 시간이라......”
그녀는 수줍게 인사하며 그 복도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영태는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네가 미쳤구나, 아주! 어쩐지....... 미친 새끼......”
난 목에 걸린 맥주를 억지로 넘기고 녀석에게 말했다.
“뭘? 얘기했잖아, 내가....... 흐흐흐.......”
녀석은 넋이 나가 있었다.
“아....... 이 새끼! 어쩌려고 그래? 휴....... 난 괴롭히지 마라. 나 이제 네 걱정 못 해줘. 안 해줘!”
난 말했다. 모른 척 하려고 하지만 녀석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쳐주고 싶긴 했다.
“맥주나 더 가져와, 이 양심 없는 새끼야!”
내가 말했다.
“이힛........”
히죽거리며 일어서는 녀석이 안쓰러워 보였다.
무대에 조명이 켜졌다. 밴드 멤버로 보이는 남녀가 악기를 세팅했다. 조용한 가운데 손님이라고는 나뿐이어서인지 그들은 어두운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나를 알아채지 못하고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며 무대를 채우고 있었다. 그 때 수연씨가 영태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맥주와 안주접시를 들고 있었다.
“내가 한다니까.”
영태가 그녀에게 말했다.
“오빠, 저 지금 알바하는 거예요. 앉아 있어요. 친구 분 혼자 계시는데....... 곧 공연 시작해요....... 그럼 공연 보세요. 음악 좋아요!”
그녀는 영태에게 눈치를 주고는 내게 수줍은 목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잠깐 사이에 관객들이 늘어 있었다. 세 병째 맥주를 손에 들었다. 무대 위의 밴드가 기타 조율과 드럼을 맞추었다. 맥주 한 모금을 크게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맥주가 느껴지면서 알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 몸에 퍼졌다.
곡의 도입부는 드럼 비트 두 박자였고 엇박으로 기타 솔로가 들어오면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를 바라보았다. 취기가 돌아서 인지 피가 뜨겁게 흐르는 것 같았다.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얼핏 들렸던 그 음율이었다. 눈앞이 아련해졌다. 눈을 감지 않고 무대를 응시했고, 차마 넘기지 못했던 뜨거운 눈물이 다시 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 이 망할 무거움, 축축함, 쾌쾌함........’
모든 게 그녀를 잊기 위한 노력이라 믿었었다. 그 때는. 그녀를 탓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온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했고, 결국 모두 빼앗기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여겼었기에. 다시 평심을 되찾으려 죽도록 애쓰고 있었기에. 지친 나를 일으키려는 노력을 온전히 나 혼자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누구의 도움도 무색하다 생각했다. 그 때, 그 공간에서 그 음율을 들으면서도 난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멍청했다. 자신이 미웠다.
그 날, 끝내 영태 녀석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좀 더 귀찮음을 핑계 삼아 발길을 뿌리쳤더라면........ 후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지금도 난 여전히 멍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