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아영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한 현수는 감히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함부로 그녀에게 공감하는 것조차 그에겐 너무 과분하게 여겨졌다.
5년 전, 그는 너무나 불행한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여 기찻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었다.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거침없이 척살당하는 이 느낌이란.
──그건 이루 말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했고, 어릴 때부터 불운한 운명을 타고났던 강현수를 기찻길로 내몰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강현수는 나정수에 의해 구해졌다. 아니, 구해졌다기 보다는 저지당했다. 그리고 정수는 그에게 지혜의 권능을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지혜의 권능을 얻고, 그 능력으로 메이드인이라는 회사를 세워 대표까지 올랐지만 그의 인생은 그리 행복해 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은 믿을 수 없었고, 더군다나 쉽사리 마음을 여는 건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다. 정말 권능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그에게 사람을 대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그 후에도 종종 죽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는 나정수라는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 목숨을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이란 건 없고, 완벽하게 불행한 사람이란 것도 없듯이 완벽한 구원이라는 것도 없다. 나정수가 강현수에게 행한 건 결코 구원이 아니다. 인과율에 어긋나지 않게 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는 강현수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이 신아영이라는 지나치게 긍정적이고, 현수와는 달리 그 누구보다도 살고자 갈망했던 작은 신을 만나게 하기 위해──바로 그녀와 만나게 하기 위해서 한 일이다.
신아영의 인생은 불행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믿었던 새아빠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그 새아빠는 그것도 모자라 신아영을 매일 가혹하게 때렸고, 가축보다 못한 삶을 살게 했다. 거기에 신아영 자기 자신 조차도 암에 걸려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을 절망적인 삶.
보통 사람이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그런 수라를 신아영은 전부 참아낸 것이다. 웃으며, 억지로 웃으며 그녀는 자기 자신이 불행해 지는 게 너무나 싫어서 매일 매일 밝은 얼굴로 웃으며 그 악몽 같은 나날을 버텨냈다. 그 악몽을 벗어나기 위해 거침없이 있는 힘껏 내달린 것이다.
그 끝에는 비록 죽음이란 억지스러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나락에 떨어지기 직전, 그녀는 신의 대리자가 되는 길을 택함으로써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나정수는 강현수에게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했는지 이 소녀를 보며 참회하라는 의미로 그를 살려준 것이다. 그리고 그 벌로써 신아영, 그 작은 신을 위해 헌신하라고 권능을 부여해 준 것이다.
현수는 굳이 지혜의 권능을 쓰지 않아도 나정수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어느 새 메말라 버린 줄만 알았던 현수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어라? 왜 그러시나요? 어차피 다 지난 일이고~ 지금의 저는 지금을 최대한 즐기고 있는 걸요.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을 해볼 수나 있었겠어요?”
“딱히 널 동정해서 그러는 건 아냐. 내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서 그래. 말은 안 했지만 5년 전 나는 자살을 하려고 했었어. 그때 날 구해주고 권능을 부여해 준 게 바로 나정수였지.”
“참 나, 나정수 씨가 왜 당신같이 바보쟁이 같은 사람을 택한 건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같이 지내보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네요. 정말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도 못하는 법이죠. 아무튼 저야말로 말씀 안 드려서 죄송해요. 이제 나정수 씨를 못 찾겠네요… 이제 전 여기서 나가야 할까요?”
“아니! 오히려 내가 부탁할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난 네가 필요해. 그러니 여기에 좀 더 있어줘.”
자신이 쫓아야 할 목표, 그와 동시에 자신의 마음 속 공허를 채워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아영이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현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향해 빙긋 미소를 던져주었다.
이에 아영은 뭔가 좀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옆에 놓아두었던 지갑과 차키를 챙기며 기운차게 외쳤다.
“그럼 오늘은 외식하러 가볼까?”
“아! 전 완전 찬성이에요! 현수 씨의 그 맛대가리 없는 밥을 먹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죠!”
“…나도 요리엔 나름 일가견 있는 사람이거든?”
“예~ 아무렴요. 후훗.”
아영이 가볍게 코웃음 치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현수는 아영이 또 얼마나 먹을지 걱정 되었지만 그래도 오늘 만큼은 뭐든지 다 사 줄 작정이다.
앞으로 살날이 몇 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사람의 언동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발하게 웃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신아영. 이에 현수는 그녀의 모습에 비교되는 자기 자신의 과거를 비웃기라도 하듯, 힘없이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과연 자기 자신도 아영처럼 자신의 과거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하고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에 잠기며 현관 밖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
안석연이 근무하고 있는 경찰서. 좀 전에 출동 명령이 떨어진 터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 명을 제외하면 모두 출동을 한 상태였기에 서는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 조금 날 뿐, 적막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안석연과 강경현도 있었다. 본래 둘도 출동을 하고자 하면 가능했겠지만 둘은 대기 인원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핑계를 들어 출동하지 않았다. 아니, 경현은 출동을 하려고 했지만 석연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람에 그만두기로 했다는 게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석연과 경현을 포함하면 대기 인원은 약 5명 정도. 게다가 지금은 오후 시간대였기 때문에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터라, 미처 끝내지 못한 자기 할 일을 하기 바빴던 것이다. 그건 석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면 경현은 일을 모두 마쳤지만 퇴근 후 석연에게 술이나 한잔 하자고 권유하려고 앉아 있었기에 그냥 자리에 앉은 채, 애꿎은 자판만 연신 두드려대며 타자 연습 게임을 하고 앉아있다. 사실 그 목적이 있었기에 그가 출동을 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석연은 연신 한숨만 푹푹 내뱉으며 움직이지 않는 왼팔은 제쳐두고 오른 손으로 간신히 보고서를 작성 중에 있다. 사실 한참 전에 경현이 도와주겠다며 나서긴 했지만 그건 석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의 자신을 절찬리에 원망하고 있는 중이다.
결국 자리에 앉아 타자 연습 게임을 하고 있던 경현이 이제 그것도 질려 버렸는지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선글라스를 쓴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석연의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를 향해 힘차게 말을 건넸다.
“안 팀장님! 아직도 보고서를 쓰고 계신 겁니까? 대체 언제 끝내려고 그래요?”
“뭐 임마? 할 일 없으면 퇴근이나 해! 쓸데없이 자리 축내지 말고.”
“끄응… 끝나면 한 잔 하기로 했잖아요. 그 때 까진 저도 못갑니다!”
“후~ 참 나, 할 일 드럽게도 없는 모양이네… 강경위는 친구도 없나?”
“아하하핫! 성격이 이렇다 보니 말이죠!”
경현은 멋쩍다는 듯이 웃어넘기며 뒷목을 긁적였다. 그리고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말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유령의 집 사건을 안팀장님이 해결했었죠? 이야~ 결국은 자살 사건이었다니! 우리 안 팀장님은 참 운도 좋으셔~ 어떻게 그 타이밍 딱 증거랑 증인이 같이 나온 답니까? 하핫!”
경현이 호탕하게 웃으며 엄지를 척 하고 치켜 올렸다. 하지만 석연은 그 때 뭔가 개운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라 표정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에이, 잘한 건 잘한 거죠! 어라? 근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뭔가 석연치 못한 얼굴이신 걸요? 안석연 경감님. 하하하핫!”
그의 말에 석연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석연은 올라오는 화를 참느라 조용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도 떼지 않은 채 경현을 위협했다.
“강 경위, 네가 정말 정신이 나갔구나? 오랜만에 좀 혼나볼래?”
“…죄송합니다!”
“후우~ 그보다 예전에 밧줄 감식하라던 거 해 왔어?”
“아!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혈흔은 그 여자 한 명 분이 맞고, 지문은 밧줄이 워낙 오래 된 것이기도 하고 동아줄이라서 감식이 거의 불가능 했었답니다.”
“흠, 그래? 아무튼 강 경위는 저기 가 있어. 방해되니까.”
“네에…….”
경현은 패기 넘치던 모습이 수그러든 채, 힘없이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석연은 뭔가 미심쩍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제 그만 사건을 일단락 하자고 마음먹었다.
결국 유령의 집 사건은 자살 사건으로 마무리됐다. 기사가 보도되자 일부 네티즌들이 이상하다며 의문을 제기했지만 경찰도 그 어떤 명쾌한 답변을 해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사건도 곧 언제나 그랬듯 며칠이 지나자 금방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났던 유령의 집도 다시 리뉴얼을 해서 재개장 했고, 진짜 귀신이 나온다는 입소문을 타 다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몇 시간이 흘러 해가 질 때 쯤, 출동했던 경찰들이 서로 되돌아왔고 석연의 일도 마침내 마침표를 지을 수 있었다.
“후우~! 다 했다!”
석연이 작성한 보고서를 메일로 보낸 뒤, 한 팔로 기지개를 피며 외쳤다. 자기 자리에서 코까지 골며 자고 있던 경현도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석연은 그런 경현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 봤지만, 이내 생각을 바꿔 지금까지 자신을 기다린 게 기특해 자기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잠시 후 둘은 당연하다는 듯 경찰서 근처의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처음 여기 마포 경찰서에 발령 받은 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찾아가던 삼겹살집. 정육점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가게라 고기 맛도 제법 괜찮아 석연과 경현이 단골로 찾아가는 식당이다.
둘이 가게로 들어가자마자 식당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일주일에 최소 2번 이상을,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찾아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경찰 양반들 아니여? 뭔 일 있었던 겨? 거의 두 달 만이네?”
“사고가 나서 병원 신세 좀 지내다 왔거든요. 그래도 이제 멀쩡해요. 아무튼 삼겹살 3인 분에 소주 2병 주세요.”
“어휴~ 고생 많았겄네! 오늘 소주는 서비스로 줄 테니께 어여 자리들 앉아 있어~”
아주머니는 반찬을 가지러 부엌에 들어갔고, 석연과 경현은 짤막하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 뒤, 항상 앉던 자리로 가 앉았다.
잠시 후, 기본 찬들이 식탁 위에 차려지고, 경현은 한 쪽 팔이 불편한 석연을 대신해 열심히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불판에 올라가 적당한 기름기에 노릇하게 구워지는 삼겹살은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았는데도 그 자태만으로도 절로 침샘을 자극했다. 거기에 고기를 구우면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그 냄새는 오늘 하루 동안 받았던 업무 스트레스를 푸는데 충분했고, 이에 곁들인 소주 한 잔에 화룡정점을 찍었다.
지금이라면 안주 없이도 소주 한 병 정도는 금방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술에 강한 석연과 달리 제법 술이 약한 편에 속하는 경현은 감히 그런 상상은 할 수 없었다.
“강 경위, 넌 술도 약하면서 왜 그렇게 매일 오기를 부려서라도 여길 오는 거냐?”
“참 나, 전 술이 약한 것 뿐 이지, 술 자체는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몇 년을 봤는데 참 섭섭합니다?”
가만히 경현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석연은 괜히 심술이 나, 경현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빼앗아 식탁 한 쪽에 치워 놓고는 소주 한 잔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이에 경현은 벗겨 던져진 선글라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쓰는 건 포기했는지 자기 앞에 놓여있던 소주잔을 들어 반만 홀짝였다.
그러던 도중에 경현의 눈에 문득 가게 한 쪽에 걸려 있는 TV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석연도 그의 시선을 보았는지 고개를 TV쪽으로 돌려 대체 뭘 그리 열심히 보고 있는지 확인했다.
[“지난 달 여고생 살인 및 유기를 한 혐의를 받고 있던 용의자가 도주했다는 소식입니다. 경찰 측은 본 용의자를 전국적으로 현상수배를 내린 상태이며, 용의자를 발견하면 근처 경찰서로 신속히 연락을…”]
뉴스를 경청하던 석연이 다시 고개를 경현 쪽으로 돌려 고기를 한 점 집어먹은 뒤 중얼거리듯 그에게 말을 건넸다.
“저게 9시 뉴스까지 타네? 하긴 잔혹 살해범이긴 했으니까. 워낙 이슈도 됐었고.”
“그러게요. 워낙 치밀한 놈이라 증거 확보도 힘들었다는데… 어휴, 그러니까 잘 좀 잡아두지 원. 대체 어디 관할인데 저렇게 허술한 걸까요?”
“혹시 물러? 또 자경단이 벌인 일일지도~”
식당 아주머니가 다가와 소주 한 병을 더 가져다주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석연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되물었다.
“…자경단이라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