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이야기를 마친 리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이제는 무뎌졌다고는 해도 아직 말하기에는 한없이 무거운 과거였던 것이다.
“…아영이한테는 물어봤어?”
현수의 질문에 리아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그에게 답했다.
“아영 언니는 못 도와주신대요.”
“아니 왜? 신의 대리자 아니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에요.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 나아는 것. 본래는 신이 개입해서는 안 돼요. 신이 개입하는 건 죽음의 운명 뿐. 죽을 운명의 사람이 있으면 거두어 간다. 그게 방침이거든요.”
──확실히 리아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누구는 도와주고 누구는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게 과연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데 한 쪽만 편애한다는 그게 과연 인과율이 맞다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현수의 마음은 다르다. 눈앞에, 혹은 앞으로 뻔히 어떤 피해가 나게 될지 알면서도 그 피해자들을 모른 척 한다? 아니, 더 확실한 예를 들자면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친다는 건가? 심지어 그 사람을 구할 능력도 있는데?
그럴 수는 없다. 강현수에게 있어 그런 정의는 옳지 않다. 바로 앞에 위험한 사람이 있는데, 하물며 그를 구할 능력도 있다면 그 사람을 구하는 게 옳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예전의 국수집에서도 아영을 구하려 했던 것이다.
자기가 어쩔 수 없는 일은 괜히 관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만 바로 코앞에서 손만 뻗으면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구하려는 게 바로 강현수이다. 하지만 그 정의를 신의 대리자인 신아영에게 일방적으로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영에게도 그녀만의 정의가 있을 테니까.
현수의 눈에 리아의 과거 모습이 겹쳐 보인다. 비록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약 8년 전, 소녀가 겪었을 아픔이 눈에 보인다. 결국 그는 서랍에서 차키를 챙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아! 아영이 설득하러 가자.”
“…네!”
띠리링-. 전자음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집에 돌아온 현수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여유도 없이 일단 아영이를 찾아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베란다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영의 모습이었다. 하늘에 반사된 그녀의 갈색 빛의 단발은 유난히 잘 정돈되어 보였고, 밖에 나갈 때나 입던 캐쥬얼한 느낌의 검은 색 세미 정장을 집 안에서 입고 있다. 거기에 조금 더 과장을 덧붙이자면 오늘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마치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고상한 품격이 차다 못해 흘러넘칠 정도이다.
무엇보다 현수가 거실로 들어와 인기척이 느껴졌을 텐데도 아영은 그에게는 시선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녀의 시선은 하늘로 고정되어 있다.
“아영아?”
현수가 아영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현수 쪽으로 옮겨졌다. 그를 본 아영은 베란다에서 나와 그를 향해 다가가더니 아까까지만 해도 깊은 생각에 잠겨 굳어있던 표정을 유하게 풀며 그에게 물었다.
“어라? 오늘은 빨리 오셨네요?”
“웬 일로 정장은 입고 있어? 어디 나가려고?”
아영은 예상 밖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가에 빙그시 여유롭다는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네,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요. 이제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어딘데? 데려다 줄게.”
“음~ 좀 멀어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대리자의 권능이면 반나절로 충분하니까요.”
아영이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며 현관문 쪽으로 가려는데 현수가 그녀의 팔목을 잡아, 아영을 멈춰 세웠다. 하지만 태도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에서는 그리 힘이 느껴지진 않는다.
“잠깐만, 그보다 리아에 대해서 말인데…”
“리아가 말했던 건 이미 거절했어요. 그리고 현수 씨도 그 건에 개입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건 충고가 아니라 경고니까요.”
아영은 현수의 손을 뿌리치며 제법 강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현수에게 전하는 그녀의 표정에 아까와는 달리 여유가 느껴지지도 않았으며 베란다에 서 있던 때처럼 굳어 있었다. 그런 아영의 걱정스러워 하면서도 뭔가를 고심하는 듯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읽어버린 현수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영을 보내줘야만 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옆에서 현현을 하지 않은 채 있던 리아가 현수의 옆에서 나타나 그의 옷깃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아영 언니가 왜 저렇게 반대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리아 너는 아빠를 구하고 싶은 거지?”
리아의 기어들어가는 듯한 태도에 현수가 리아의 가녀린 두 어깨를 감싸주며 물었다. 이에 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현수는 더 이상 고민할 겨를도 없이 자기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책상 앞에 앉았다.
“자, 그럼 작전부터 세워볼까? 근데 놈들 위치를 알 수가 있어야지 원…….”
“아! 제가 미끼가 될게요.”
“네가 미끼가 된다고? 너무 위험하잖아.”
“괜찮아요. 전 신의 전달자, 위험하다 싶으면 모습을 감춰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게다가 죽을 일도 없고요.”
리아의 말에서는 자신감과 확신이 느껴졌다, 그만큼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은 것이다. 현수는 리아를 미끼로 쓴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의 말대로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현현을 풀면 되는 일인데다가 전달자의 권능이라면 재빨리 탈출하는 것도 가능하다.
“근데 미끼를 던져도 물지 않으면 소용없잖아.”
“저는 그쪽 수법은 꿰고 있는 걸요. 현수 오빠가 지혜의 권능으로 대충 어디에 나타날 것인지만 알려주세요. 그럼 꾀어내는 건 제가 할 테니까요.”
현수는 리아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뭔가 찝찝함에 마음 한 편이 뻐근했지만 인터넷 검색으로 국제 보육원의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딱히 뾰족한 수도 없었기에 결국 리아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
벽에는 누군지 모를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그려진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있고, 위에는 샹들리에가 걸려있다. 바닥은 붉은 색의 카페트가 깔려 있으며 그 위는 비닐하우스에서 쓰는 커다란 비닐로 덮여있다. 그리고 그 비닐 위로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핏방울이 젖을 리 없는 비닐의 겉 표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마치 중세시대의 고급 저택을 연상케 하는 방, 하지만 그 방에 있는 가구들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한 남성의 신음소리와 비릿한 피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크헉, 헉… 차, 차라리 죽여!”
“응? 그건 안 돼~ 네가 지금까지 한 짓을 생각해봐. 아니면 다시 생각나게 해줄까? 오호석 의원님. 후훗.”
오호석의 얼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고, 옷은 피로 범벅되어 피부에 달라붙은 채 의자에 묶여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건 한 여자.
방 안이 워낙 어두운 지라 호석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니, 어두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지하실에서 정신을 잃었었고, 깨고 보니 한 여자가 자신의 눈을 칼로 그어버린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얼핏 보긴 했지만 그가 기억하는 건 긴 생머리에 제법 아름다운 여성이었다는 것 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호석은 그 여자로부터 많은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 끝은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워 결국 그의 입에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이 튀어 나온 것이다.
“학… 하악…! 다, 당신 대체 누구야…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거야…!”
“뭐, 어차피 죽을 예정인 사람한테는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그 때, 나무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노크소리와 함께 하얀 정장을 입은 노먼이 들어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작업 중에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무슨 일인데?”
“저번에 지시하셨던 유령의 집 사건은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이번에야 말로 잡히는 줄 알았는데~ 역시 그 남자 실력이 대단한데?”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노먼이 빠르게 그녀 곁으로 발걸음을 옮겨 언제 꺼냈는지 지포라이터로 그녀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 자는 어디까지나 저희의 수단일 뿐. 뒤처리는 언제나 제가…”
“후~ 우리 노먼이 얼마나 열심히 일 하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너무 조바심 내지 마. 그나저나 내가 저번에 가져다 준 아이디OS는 잘 분석해 봤어?”
“아, 네! 분석해보긴 했습니다만 그… 핵심 기술이 빠져있어서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흠, 역시 그 핵심 기술이 문제인가~ 그건 또 어떻게 가져온담? 역시 해킹은 좀 무리겠지?”
“네, 아무래도 그 쪽에 어떤 여비서가 있는데 그 여자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제법 힘들 것 같습니다.”
노먼의 말에 여자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담배를 오호석의 이마에 지져 껐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지만 방 안의 누구도 그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푸훗, 그래~ 그 여자가 방해된다는 거지? 아무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신경 꺼도 돼. 알았니?”
여자가 어둠 속에서 하얀 이가 살짝 보일 정도로 씩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에 노먼은 양 쪽 볼에 옅은 홍조를 띄우며 얼굴에 화기가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고동이 빨라지는 소리가 들키지 않도록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는 최대한 터져 나오려는 입가의 미소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헌데, 국제 보육원 건은 어떻게 할까요?”
“아~ 그 놈들 말이야? 이번 주 내로 갈 테니까. 위치 좀 알아다 놔. 그리고 심판자도 데리고 갈 거니까 미리 문자 보내 놓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회장님이 직접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내 의견에 토를 달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튼 그건 그만큼 복잡한 사건이라는 거야~ 알겠니?”
“…죄송합니다. 그럼 당장 실행에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노먼은 고개를 다시 꾸벅 숙이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여자는 주머니에서 다시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거의 죽어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버티고 있는 오호석을 마치 밟아 짓이기기 전의 벌레라도 보는 듯 혐오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재밌어지겠네, 그치?”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다시 가위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리고 여자의 손에 들린 가위는 숨통을 끊으려 달려드는 독사처럼 순식간에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