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분칠한 앳된 소녀처럼 꽁무니에 노란 꽃가루를 잔뜩 묻힌 꿀벌이 날아다녔다. 이곳이 좋을까, 저곳이 좋을까 확신이 안 서는 듯 장미 밭을 배회하기만 했다. 사방이 달콤한 냄새로 흠뻑 차 있어 꿀벌로서는 행복한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아주 자극적인 냄새를 맡았다. 꿀벌은 바늘에 찔린 듯 움찔하더니 더듬이를 휘휘 놀려 그 냄새의 근원을 찾았다. 저곳이다. 꿀벌은 망설임 없이 곧장 비행했다. 꿀벌은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성의 탱탱한 입술 같은 장미 꽃잎 위에 사뿐히 올라섰다. 고사리 같은 여러 개의 발로 꽃잎을 헤쳐 나아갔다. 꽃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수술을 보자 꿀벌은 더듬이를 떨었다. 드디어 채집하려는 찰나, 꿀벌과 장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위협을 느낀 꿀벌은 미련 없이 도망쳤다. 떠나는 군인을 배웅하는 여성의 손짓처럼 장미가 흔들렸다.
이도는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는 꿀벌을 바라봤다. 방해를 한 건 아닐까 싶었지만, 이곳은 장미정원이다. 갈 곳은 어디든지 있다. 이도는 눈을 감고 장미꽃에 자신의 코를 가져다댔다. 달짝지근하고 새콤한 냄새가 났다. 이도는 꽃냄새를 맡는 순간이 좋았다. 냄새가 일순 머리 한복판을 장악하면, 고통과 번민이 날아 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에. 그러나 냄새에 질릴 무렵이면 이도의 머리는 또 지끈거려왔다. 그러다가 한계에 달하면 또 쓰러져버리고. 이도는 이것이 광기 대신 얻은 대가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도는 굽힌 허리를 펴고 바다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고 있자니 고작 며칠 전에 끝난 생애 첫 모험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죽을 뻔 하고, 동료를 만나고, 친구를 사귀고, 아리아를 알게 되고, 또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거짓말을 하고. 거짓. 그렇게나 싫어했건만 결국 물들어 버렸다. 근데 일단 치명적인 거짓말을 저지르고 나자 별 느낌이 안 들었다. 왜일까. 난 왜 거짓을 싫어했던 거지? 알 수 없다. 기억 어디선가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한데, 들리지 않았다.
난 달라졌을까?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정작 나 자신은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여전히 좁디좁은 유리상자 안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지금도 문득 그 날의 열기를 느낄 수 있고 탄내를 맡을 수 있다. 그 탄내는 바다의 짠 냄새도 뚫고 꽃밭의 단내도 헤치며 그를 덮쳤다. 지독한 의심암귀가 따랐다. 이래도 괜찮았던 걸까? 계속, 계속, 계속. 지겨울 정도로. 그만! 이라고 외치는 데도. 그렇게 의심에 빠지면 또 과거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계속 날 억누르는 무언가. 과거가 날 부르는 것이다. 희아가 불타버린 날보다 더욱 오래 전의 어딘가에서 날 부른다. 괜찮은 거야? 정말로?
이것이 광기인가? 나도 결국 벗어날 수 없는 건가? 이도는 미래를 생각했다. 난 어떻게 될까. 결국엔 황제가 되는 건가? 전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닥치나 현실감이 나지 않았다. 태스크포스 활동도 걱정되지는 마찬가지였다. 뭔가 짜여진 각본 같은, 그런 무감각한 기분이 들었다.
신. 이도는 한숨을 쉬었다. 신. 제국의 신.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어쩌면 그 신이란 존재가 날 조종하는 걸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난 마리오네트가 아니야. 하지만 신의 존재 없이 그 대포알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나 기이했다. 그 신이란 존재는 이도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이도는 알 수 없었다.
주위는 장밋빛인데 미래는 잿빛이다. 이도는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진 것 같아 몸을 떨었다. 그래도 한 가지 광명이 있었다. 아리아. 그녀를 생각하니 심장으로부터 맥박 치는 힘이 느껴졌다.
“오라버니!”
또 하나의 광명이 이도를 불렀다. 선화이다. 선화는 장미꽃을 손에 들고 이도를 향해 달려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장미들과 선화의 머리카락이 함께 나부꼈다. 넌 정말 아름다워, 선화야. 이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두 개의 광명. 이 두 개의 광명을 따라 미래로 나아가자. 그러면 될 거야. 이도는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흔히 말하는 ‘자식들 때문에 산다.’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화가 이도에게 장미꽃을 건네며 말했다.
“오라버니, 이것 좀 머리 옆에 꽂아줘 봐요.”
이도는 선화의 요구대로 해주었다.
“이렇게?”
“어때요, 예뻐요?”
선화는 배시시 웃었다. 이도도 따라 미소 지으며 선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응, 예뻐.”
선화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귀여운 눈웃음을 지으며 조그마한 입으로 무어라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도는 몸이 굳어버렸다. 순간 자신이 장미공원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장미냄새와 함께 다시 현실이 감싸올 때, 이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 못 보던 사이에 어른스러워졌네요!”
(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