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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그러나 그는 죽지 않는다
작가 : 에르노
작품등록일 : 2016.10.5

누군가 그를 미친듯이 원한다! 영문도 모른 채 쫒기는 소년, 그는 어째서 납치당하는가?
벗어날수록 옭아매오는 그물, 그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치명적인 음모가 정체를 드러낸다!

강대한 라니냐 제국의 볼모가 되어버린 도림 왕국의 태자, 상냥하고 친절하나 실은 비성숙한 자아에 고통받는 그는 제국을 적대하는 식민지 독립파에 의해 납치당하고 만다. 탈출을 시도하고 흉악한 적들과 추격전을 벌이며 이색적인 해적과 조우한다. 스릴 넘치는 모험과 풋풋한 사랑을 통해 자아의 성장을 일궈나가는 다크판타지.



표지는 핀터레스트 펌입니다.

 
04.선화와 황제의 문답
작성일 : 16-10-08 15:38     조회 : 459     추천 : 1     분량 : 9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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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가 아직 납치선에서 낑낑댈 무렵, 선화는 제국 궁전에 도착했다.

 

  “제국의 대자, 이선화 님이 입장하십니다!”

 

  전령이 이선화의 당도를 알렸다. 선화는 보리스와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긴장하지 말자, 선화야. 넌 잘 할 수 있어.

 

  선화가 입고 있던 간편 한복은 이리저리 뜯기고 찢어져서 살이 마구 드러났다. 대장군과 병사들도 갑옷 여기저기가 뜯겨나가거나 흠집이 나있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걸은 터라 얼굴이 피곤에 절어있다. 의원들은 그들의 몰골을 보고는 속닥속닥 댔다.

 

  선화는 황제의 홀을 둘러보았다. 중앙에는 진홍색 융단에 초록색 실크로 수를 놓은 카펫이 길게 뻗어있었다. 양쪽에는 균일하게 석재 기둥이 서있었다. 기둥 앞에는 제국 호위기사가 완전무장을 한 채 버티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드디어 노른자위에 도달했다. 카펫의 종착점에는 소형 피라미드가 있었다. 그 피라미드 위에 왕좌가 있었다. 그 왕좌에 황제가 앉아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얇은 막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선화의 심장이 두근거려왔다.

 

  황제. 소문은 무성하나 그 실체를 정확히 아는 이는 드물다. 확실한 거라곤 그가 제국의 중흥을 이끌었다는 것 뿐. 이외에도 첫인상이 나쁘면 단칼에 목을 벤다던가, 10대 소녀로 이루어진 하렘을 소유하고 있다던가, 칼부림을 좋아한다던가 하는 흉흉한 말이 돌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 말은 그 중 하나는 진실일 지도 모른단 것이다. 확실한 건 황제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대자 생활이 평탄하려면 황제의 총애를 얻어야 한다. 그러니까 잘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다행인 것은 서양의 대자는 동양의 대자와 그 의미가 판이하다는 점이다. 제국의 전신이 된 서양의 한 고대왕국에는 전설이 있다. 대자 전설이다. 신의 부름에 의해 선택받은 다섯 명의 대자가 고대왕국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왕이 되어 왕국을 구원했다고 한다. 이 전설과 서방 신의 교리인 신은 높은 곳과 낮은 곳에 임하신다와 합쳐져 대자는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윽!”

 

  지독하리만치 심한 장미 냄새를 들이마신 선화는 순간 균형감각을 잃고 쓰러질 뻔 했다. 다행히 보리스가 잡아주었다. 너무 심한데? 터무니없을 정도 진한 장미 냄새가 황제의 홀에서 풍겨졌다.

 

  “후우.”

 

  선화는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보리스가 말했다.

 

  “대장군 보리스 알게마인,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어 대자가 되실 분을 모셔왔습니다.”

 

  소형 피라미드 앞에는 네모진 탁자가 있었다.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카펫 양 쪽으로 의원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3열이었는데, 뒤로 갈수록 높은 곳에 서 있었다. 물론 왕좌보다는 낮았다. 하지만 가장 높은 자들은 높은 곳이 아닌 낮은 1열에 서 있었다. ‘이 자들이 의회의 의원들이로군. 분명 양당제라고 했어.’ 확실히 선화가 서 있는 지점으로 오른쪽 의원들은 파란 장미를, 왼쪽 의원들은 빨간 장미를 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황제의 홀에 모인 사람들은 대자 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했다. 죄인으로 보이는 머리가 마구 헝클어진 사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양 옆에 병사가 서 있다. 선화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일이지?

 

  황제를 가린 얇은 막 뒤에서 중후하고 둔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말해보아라. 내가 어째서 나의 대자 접견보다 네 청원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황제의 목소리가 동굴에 있는 것 마냥 홀 전체로 퍼져나갔다. 선화는 얇은 막으로 보이는 황제의 검은 실루엣을 보았다. 절로 중압감이 느껴졌다.

 

  남자는 덜덜 떨더니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불어터진 만두 같았다.

 

  “황제폐하! 저, 저는 결단코! 저는 결단코 황제폐하의 암살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암살? 선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보리스에게 속삭였다.

 

  “무슨 일인가요?”

 

  “저도 전령을 통해 오늘 알았는데, 저 자는 황제폐하 암살 혐의로 구속되어있습니다. 저 자는 황제 전속 주방장인데, 며칠 전 아침에 나온 스프에 은수저를 담갔더니 녹아내렸다고 합니다.”

 

  “아아.”

 

  선화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돼서 침을 삼켰다. 황제 암살이라니.

 

  터무니없다.

 

  황제는 말했다.

 

  “그렇다면 은수저도 녹아버릴 만큼 환상적인 수프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폐하!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하지만 네 조수는 네가 그 수프를 만들어서 가져다주는 것까지 다 보았다. 여기 그 어디에 반박할 여지가 있는가?”

 

  주방장은 억울함에 북받치는 듯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건, 그건 분명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결단코 수프에 독을 타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페하! 저는 아내도 있고 부양해야 할 아들 셋과 딸 둘이 있습니다! 큰 아들은 곧 대학에 가야하고 막내딸은 몇 달 전 갓 태어났습니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주방장은 꺼이꺼이 울며 고개를 숙였다.

 

  “제발! 저는 무고하옵니다! 그러나 정녕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제 가족만은 부디 화를 입지 않게 해주소서!”

 

  주방장은 얼굴을 바닥에 묻은 채 흐느꼈다. 선화는 측은함을 느꼈다. 그의 말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가 안 했을 거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선화도 확신할 순 없었다.

 

  다시 황제가 말했다.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다. 물론, 네가 범행을 누가 사주했는지 말한다면.”

 

  “페하! 저는 결백하옵니다!”

 

  “아까부터 같은 말만 반복하는군. 끌어내!”

 

  병사 둘이 주방장의 양 팔을 잡고 홀을 빠져나갔다. 주방장은 끌려가면서도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외쳐댔다.

 

  “이거 놔!”

 

  주방장은 몸을 거세게 틀었다. 그만 병사가 그를 놓치고 말았다. 주방장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선화를 보고는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선화는 흠칫하며 경계자세를 취했다. 주방장은 선화의 다리를 붙잡고는 소리질렀다.

 

  “제발! 제발 날 구해주시오! 부탁하오! 제발!”

 

  선화는 당황한 채 덜덜 떨었다. 병사 둘이 주방장을 거세게 떼어놨다. “이 분이 누군 줄 알고!”

 

  결국 주방장은 병사들에 의해 다시 끌려갔다.

 

  곧 황제의 홀은 조용해졌다.

 

  선화는 아직 쿵쿵 뛰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정신 차려야 산다.

 

  황제를 가리던 막이 올라갔다. 헐렁한 황제복 사이로 보이는 의자 위에 걸쳐진 팔은 바싹 마른 장작 같았다. 금으로 만든 장미가시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 진갈색 턱수염은 호방하게 나 있었으며, 얼굴 곳곳에 진 주름은 그가 중년을 넘겼음을 말해주었다. 특히 눈빛이 맹수처럼 날카로웠다. 자신이 황제를 관찰하는 게 아닌 황제가 자신을 관찰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황제가 말했다.

 

  “대장군, 어떻게 된 건가? 대자가 한 명 부족한 것 같은데? 그 꼴은 뭐고?”

 

  선화는 깜짝 놀랐다. 방금까지와는 다른 말투였기 때문이다.

 

  “황제폐하, 송구합니다만, 마차의 고장으로 인해 성도 부근 숲에서 야영을 했다가 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습격당했습니다. 선화님만은 구출했지만, 이도님은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납치를 당했다고 보입니다.”

 

  의원들의 술렁거림이 더욱 커졌다. 황제는 힘차게 외쳤다.

 

  “모두 조용!”

 

  황제의 바람대로 되었다.

 

  “그래, 누가 이런 짓을 꾀했는지는 알 수 없단 말이지? 의원들 중에 이 일과 관련된 정보를 가진 사람은 없소?”

 

  파란장미를 단 의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황제폐하. 제 친우인 해상경비단장이 제게 알린 바에 의하면, 서해에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추적하였지만 너무 잽싸서 놓쳐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단장의 말로는 하찮은 밀수꾼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저는 지금 상황과 연관이 있지 앉나 의심이 듭니다.”

 

  “그렇군. 물러가도 좋소.”

 

  황제의 말에 그 의원은 제 자리로 돌아갔다. 황제는 혼잣말을 했다.

 

  “내가 의원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있네. 며칠 전에 내게 신대륙의 식민지 무역협회장에게서 편지가 왔었어. 독립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끔찍할 일이 생길 거라고 경고하더군. 그것이 이거였을 줄이야.”

 

  황제는 대장군을 보았다.

 

  “대장군, 물러가도 좋네.”

 

  그 때, 적장미당의 한 의원이 앞으로 나왔다.

 

  “황제폐하! 대장군 보리스 알게마인은 대자 호위에 실패하였습니다! 그에 응당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국법에 따르면 처형까지도 선고할 수 있습니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뒤이어 적장미당과 청장미당의 모든 의원이 입을 모아 외쳤다.

 

  “응당한 처벌을 내리소서!”

 

  황제는 혀를 찼다. 썩을 놈들. 평소에는 치고 박고 싸우면서 이럴 때만 단합이 잘 되는군. 그래. 날 흔들어보겠다, 이거인가? 내 관료를 쳐냄으로써?

 

  “물론 처벌을 내릴 것이다. 다만 나의 대자가 곤란할까봐 좀 나중에 처리하려고 했던 걸, 자네들은 참으로 성급하군. 그래서야 어디 첩이라도 많이 들일 수 있겠는가?”

 

  의원들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던 몇몇 제국 호위 기사들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는 말을 이었다.

 

  “대장군 보리스 알게마인, 자네는 며칠 뒤 법정에 설 걸세. 가보게.”

 

  보리스 대장군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뒤로 돌아 나가버렸다. 지금껏 그들을 따라 온 제국병들도 나갔다.

 

  선화는 드디어 혼자 남았음을 실감했다.

 

  황제는 씩 웃으며 선화를 보았다. 도금 테두리에 형형색색의 실로 장미를 자수한 펑퍼짐한 황제복을 하나로 이어주는 건 몸 중앙을 가로지르는 상아 단추들이었다. 그런데 맨 위의 단추 세 개는 풀려있다. 마치 길거리 주정뱅이처럼.

 

  “좋아, 드디어 만났는가. 도림 왕국의 공주님? 나는 보다시피, 라니냐 제국의 황제라네. 이름은 에드워드 그락카르라고 해두지. 이런. 당황한 표정이로군. 황제가 경어를 안 써서 그런가? 이것이 우리 나름의 경어라네. 자, 자네의 순번이라네.”

 

  선화는 장미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으며 말했다.

 

  “저는 도림 왕국의 제1왕녀이자 라니냐 제국의 에드워드 그락카르 황제의 대자입니다. 이름은 이선화라고 합니다.”

 

  “우선 이번 대자 책봉의 배경을 말해주도록 하지. 지금 제국은 위기에 빠져있다네. 나 때문이야. 난 후손을 낳을 수 없어. 게다가 형제도 없지. 이천년을 이어온 황가의 맥이 끓긴 셈이야. 제국법에 의하면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 때, 반드시 대자를 들여 황가의 전통을 잇도록 하고 있지. 우리에게 대자는 특별한 존재거든. 또 다른 위기는 도림 연합과의 전쟁, 식민지 문제, 경제난 등등 다양하지. 작금의 제국에 닥친 복합적인 위기는 심각해. 우리 제국에서는 이런 해결책이 안 나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에게 의식를 치러서 해결한다네. 우리의 신은 실재하셔서, 의식을 치루면 실제로 목소리를 들려주신다네. 하지만 그에 따른 알 수 없는 대가도 만만찮기에 보통은 안 쓰는 방법이긴 하지.”

 

  선화는 짐짓 놀랐다. 도림 왕국과 달리 제국은 아직 신정적 요소가 남아있다는 게 신기했다. 신이 정말로 있는지, 그 목소리란 대체 뭔지, 거짓말은 아닌지 의심은 갔으나 일단은 받아들였다.

 

  “제국의 수도인 라니냐가 보통 성도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야. 라니냐의 가장 깊은 곳에 의식장소가 있거든. 그리고 황제인 나, 최고위 관료 몇 명, 당수 두 명, 황가 친척 대표 서너명, 고위성직자 네 다섯 명 정도만이 모여서 의식을 거행했지. 그러자 신은 우리에게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를 들려주시더군. 도림 왕국의 태자와 왕녀를 대자로 삼아 황위를 계승하게 하라. 내 추측이지만, 이렇게 하면 도림 왕국과의 연결고리가 생겨 전쟁을 방지하기 때문인 것 같아. 마침 도림연합을 물리친 터라 그렇게 했지.”

 

  선화는 주저하며 물어보았다.

 

  “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도 신의 목소리를 통해 제국의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는가요?”

 

  “내 기억으로는 다섯 번 정도 있던 것 같아. 하나는 북방 야만인의 대침입이었지. 여하튼 이 다섯 번 모두 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지. 우리의 신은 실재하시고, 신은 전지전능하잖나? 하지만 리스크가 커. 북방 야만인의 대침입을 막은 다음 해에 서방에 대지진이 일어났지. 대침입이 더 피해가 컸을지, 아니면 대지진이 더 컸을지는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라네.”

 

  선화는 솔직한 소감을 말했다.

 

  “믿기지 않네요.”

 

  황제는 호방하게 웃으며 박수를 두 번 쳤다.

 

  “자! 자질구레한 건 됐고, 이제 대자임명식을 거행하도록 하지.”

 

  그러자 어딘가에서 시종인이 나타났다. 검은 장발의 여자였다. 워낙 헝클어져 있어서 얼굴은 잘 안 보였다. 입고 있는 제복은 제국 전통의 메이드복이었다. 여시종인은 아픈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틀대며 왕좌로 가는 계단을 올라갔다. 순간 한 번 휘청거려서 떨어질 뻔 했다. 그 때 의회 의원들 사이에서 걱정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그녀는 왕좌까지 잘 도달했다.

 

  “그래서 빗자루 질이나 제대로 하겠느냐? 자, 받거라.”

 

  황제는 그녀에게 화려한 함을 꺼내 건넸다. 여시종인은 함을 받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선화는 눈을 끔뻑거렸다. 설마, 저 시종인이 대자임명식을 거행하는 거야? 아니, 안 돼. 놀라면 안 돼.

 

  선화는 심호흡을 했다.

 

  “함을 드시죠.”

 

  여시종인이 어느덧 선화 앞에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머리카락에 가리긴 했지만 꽤나 미인이었다. 눈 밑이 어둠이 너무 짙어서 좀 빛바래긴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어딘가 축 처진 듯한 인상을 주었다. 선화는 함을 받았다. 여시종인은 함을 열어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대자의 펜던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선화의 목에 걸어주었다. 여시종인은 텅 빈 함을 받아들고 가볍게 목례했다.

 

  “제국의 대자 만세.”

 

  “제국의 대자 만세!”

 

  갑자기 양 옆에서 우렁찬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박수소리가 뒤따랐다. 뭐야, 이게 끝인가?

 

  “자자, 박수는 그만하면 됐어. 미안하지만 간단한 질문 좀 하지. 네가 대자로서 얼마나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 말이야. 그 전에 서로 호칭을 바꿔보도록 할까? 이제 난 너를 간단히 대자라고 부를 거야. 너는 나를 공석에서는 황제라고 불러야겠지만, 사석에서는 그냥 아버지라고 불러도 돼. 알겠나?”

 

  “네, 황제폐하.”

 

  에드워드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질문은 하나 만이라네. 이미 알겠지만, 신대륙 식민지의 동란에 대한 것이네.”

 

  이것이 고비구나, 하고 선화는 직감했다.

 

  잘 해야 돼.

 

  “네.”

 

  “이 때문에 의회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 매일매일 내 귀를 괴롭게 한다네. 나 또한 의회의 동의 없이 멋대로 일을 진행할 수는 없으니,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지. 아, 그리운 옛날이여. 그 때는 황제가 죽으라면 죽는 거였는데. 어쨌든 온건파는 식민지를 살살 구슬려서 회유하자고 하고, 강경파는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켜 쳐부수자고 하지. 게다가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야.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독립파가 내 대자를 납치했지. 자, 나의 대자여. 너라면 어떻게 하겠나?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거지?”

 

  선화는 눈을 끔뻑이며 한참 말이 없었다. 이건 그냥 질문이다. 내 대답이 실제로 적용 될 리는 없어. 그렇다면 그저 황제의 입맛에 맞춰 대답하면 될 거야.

 

  드디어 선화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의견을 냈다.

 

  “저라면 의회를 혁파해버린 뒤, 모든 것이 황제폐하의 의지만으로도 이루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응?”

 

  지나치게 예상외의 대답에 의원들은 곤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황제폐하께서는 명실상부한 작금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누구도 황제폐하를 능가할 수 없고, 모두 폐하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런 위대하신 황제폐하께서 식민지를 회유하고 싶든, 전쟁을 일으키고 싶든, 아예 몰살시켜버리고 싶든, 아니면 대자를 구하기 위해 협상을 하든 황제폐하가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전 의회를 혁파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봅니다.”

 

  “와하하하하!”

 

  황제는 온몸을 들썩이며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대답이다. 정답이다! 하하하하!”

 

  하지만 의원들은 말 그대로 똥 씹은 표정이었다.

 

  “악습이지. 악습도 이런 악습이 없어. 먼 선대의 조상께서 지나치게 넓어진 제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고자 황제의 권력을 분할한 게 시초였지.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야.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지.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쩔 도리가 없지. 세간에 우뇌는 황제고 좌뇌는 의회란 농담마저 떠돌 지경이니 말이야. 하지만 선화, 나의 대자여, 너의 그 빈 말이라도 난 즐겁구나!”

 

  선화는 가볍게 웃으며 목례했다.

 

  “황제폐하께서 즐거워하신다면 전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네 성향을 잘 알았다. 네 오빠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넌 눈치가 있어. 그야말로 여우같군. 내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하면서도, 그 대답이 과격하진 했지만 자네의 입지를 축소하진 않았어. 오히려 의회의 양측이 의회에 부정적인 너를 회유하고자 노력하겠지. 너는 양측을 격하하면서도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의도한 건지는 모르지만, 대자라는 의회보다 공식적으로는 우월한 지위를 잘 이용했어. 노예는 자기와 같은 노예가 꿇으라고 해도 안 꿇지. 그에게는 얻을 게 없기 때문이야. 하지만 주인이 꿇으라면 꿇지. 주인에게선 얻을 게 있기 때문이야. 의회도 너한테 욕먹었지만 너에게 얻을 게 있기 때문에 어차피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할 테야.”

 

  황제의 장황한 칭찬을 들으며 선화는 피곤함을 느꼈다. 의원들도 자기들의 본심을 콕콕 찌르는 황제의 독설을 듣는 게 편해보이진 않았다.

  “자! 선화, 나의 대자야.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선화는 침을 삼켰다.

 

  “황제폐하, 부디 제 오라버니를 구해주세요. 저에겐 정말, 정말로 소중한, 제가 마지막으로 볼 지도 모를 혈육입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라. 내 황제의 명예를 걸고, 네 오라버니는 무사할 것임을 약속하지.”

 

  황제의 눈에는 기묘한 믿음이 깃들어있었다.

 

  선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드워드 황제는 또 박수를 쳤다.

 

  “자자, 고생들 했네. 오늘은 이만하고 끝내도록 하지. 대자여, 자네는 이제 물러가도 좋네. 나는 의원들과 식민지 문제에 대해 의논을 좀 해야겠군.”

 

  물러가도 좋네. 그 말을 듣자마자 선화는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바닥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시야가 차단되어가며 오로지 소리만이 남아갔다. 의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황제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 여시종인의 안부를 묻는 소리, 제국 호위 기사들이 당황해서 움직이느라 나는 철컹철컹 소리, 소리들. 시야는 이미 흐려지고 좁아져 자신을 흔드는 여시종인의 손길만 느껴졌다.

 

  내가 쓰러진 거야? 선화는 자기 자신에게 당황했다. 하긴 하루 종일 걸어오느라 육체적 피로가 누적되었다. 또 황제와의 문답과 장미 냄새 때문에 정신적 피로도 더해졌다. 또 4개월분의 여독까지.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아빠와 엄마가 보고 싶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육체와는 이미 멀어져있다. 안 된다. 강해져야해. 어머니에게서 풍기는 로즈마리 향이 그립다. 안 돼!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잠깐, 로즈마리 향? 로즈마리 향이 난다. 선화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다. 위에서 난다. 위에서, 위로, 위로 헤엄쳐 올라가자. 필사적으로 손과 발을 허우적거린다. 저곳에 엄마가 있다. 저곳에 고향이 있다.

 

  저곳에, 바로 저곳에 그리운......

 

  로즈마리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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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3.결점과 결심 2016 / 10 / 26 507 0 8218   
23 22.왜 하필 지금 2016 / 10 / 25 701 0 9485   
22 21.아리아와 함께 춤을 2016 / 10 / 24 674 0 13792   
21 20.협상의 행방 2016 / 10 / 23 998 0 12721   
20 19.물놀이를 즐겨요 2016 / 10 / 22 568 0 19416   
19 18.제2 라니냐 항구 2016 / 10 / 22 471 0 8046   
18 17.엘리자의 회초리 2016 / 10 / 20 466 0 2376   
17 16.고양이 울음소리 2016 / 10 / 19 647 0 14015   
16 15.루비가 박힌 단검 2016 / 10 / 18 401 0 8352   
15 14.항구를 떠나다 2016 / 10 / 17 403 0 4106   
14 13.도처에 놓인 그물망 2016 / 10 / 16 702 0 8793   
13 12.소니아를 보다 2016 / 10 / 15 594 0 9697   
12 11.그 날 2016 / 10 / 14 830 0 12356   
11 10.루카를 위하여 2016 / 10 / 13 536 0 7296   
10 09.다시 찾아온 2016 / 10 / 12 1259 0 16436   
9 08.선화의 짖궂음 2016 / 10 / 11 520 0 6245   
8 07.선상의 파티 2016 / 10 / 11 612 0 5057   
7 06.가녀린 손 (1) 2016 / 10 / 10 698 1 7374   
6 05.헬라와 욕조 2016 / 10 / 9 538 0 6228   
5 04.선화와 황제의 문답 2016 / 10 / 8 460 1 9336   
4 03.이도의 펜던트 2016 / 10 / 8 686 1 5708   
3 02.납치선에서 (2) 2016 / 10 / 7 611 1 6595   
2 01.고장난 마차바퀴 2016 / 10 / 6 533 1 8418   
1 00.라벤더와 라즈베리 향 2016 / 10 / 6 709 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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