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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그러나 그는 죽지 않는다
작가 : 에르노
작품등록일 : 2016.10.5

누군가 그를 미친듯이 원한다! 영문도 모른 채 쫒기는 소년, 그는 어째서 납치당하는가?
벗어날수록 옭아매오는 그물, 그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치명적인 음모가 정체를 드러낸다!

강대한 라니냐 제국의 볼모가 되어버린 도림 왕국의 태자, 상냥하고 친절하나 실은 비성숙한 자아에 고통받는 그는 제국을 적대하는 식민지 독립파에 의해 납치당하고 만다. 탈출을 시도하고 흉악한 적들과 추격전을 벌이며 이색적인 해적과 조우한다. 스릴 넘치는 모험과 풋풋한 사랑을 통해 자아의 성장을 일궈나가는 다크판타지.



표지는 핀터레스트 펌입니다.

 
03.이도의 펜던트
작성일 : 16-10-08 01:07     조회 : 686     추천 : 1     분량 : 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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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는 럼주통을 열심히 걸레질했다. 이렇게 수시로 닦아주지 않으면 럼주의 품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이도는 팔이 얼얼해질 때까지 닦고는 걸레를 확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바닥에 풀썩 앉았다. 흐르는 땀을 닦았다. 힘들구나.

 

  “내 신세야.”

 

  이도는 대포사격 수업을 들을 때 빼고는 선상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이렇게 창고에서 소일거리하며 보냈다. 최대한 선원들에 눈에 안 띄어야 들킬 위험도 줄어든다. 하지만 기분이 답답했다. 보름동안 어두운 곳에 갇혀 지냈는데!

 

  이도는 목에는 걸었지만 옷 밑으로 감춘 태자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이 펜던트가 가장 위험하다. 펜던트만 발견되면 이도는 즉각 정체가 밝혀진다. 그럼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럴 순 없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만 해도 이도는 이번 모험에서 큰 성취를 이룰 것만 같았다.

 

  하지만 펜던트를 벗고 어딘가에 숨겨두고 싶지는 않았다. 이 펜던트는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으니 들키진 않을 듯하다. 또 펜던트 안에는 이도의 인장도 들어있다. 곁에 두는 게 최선이다.

 

  갑자기 발걸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린다. 이도는 재빨리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럼주통을 걸레질했다.

 

  “젠장~ 빨리 육지로 가고 싶어! 망할 바다 위에 너무 오래 있으니까 진저리가 난다! 에고!”

 

  “나는 여자가 고파! 젠장, 니들 같은 남정네 사이에만 있다 보니 고추가 떨어질 것 같아!”

 

  “웃기고 있네, 남 말 하지 마!”

 

  아리아의 선원 세 명이 수다를 떨며 오고 있다. 이도는 그냥 제발 못 보고 지나가라하고 빌었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한 법. 술에 잔뜩 취해 코가 빨개진 대머리(정정한다. 두 올이 남아있다.)가 잡일 하는 이도를 발견했다.

 

  “어이구야~ 네가 그 혹시 그 대장이 떠들어대는 신참이냐?”

 

  대머리가 딸꾹거리며 다가온다. 이도는 숨을 죽이고 럼주통을 닦았다.

 

  “무슨 천재냐는 마냥, 안 그래도 시끄러운 대장이 너 때문에 더 시끄럽단 말이야. 앙? 미안하지도 않냐?”

 

  같이 있던 두 명을 서로 낄낄댔다.

 

  “저 새끼, 저거 또 지랄이네.” “신참한테만 기세등등하단 말여.”

 

  대머리는 욱 하며 뒤를 봤다.

 

  “닥쳐, 인마! 그래, 신참. 뭔가 사과의 말이라도 해야지?”

 

  이도는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어쩌면 좋지.

 

  “죄송합니다.”

 

  “미안하단 말로 될 줄 알아!”

 

  어쩌란 거야? 이도는 걸레질을 멈추고 대머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선배님.”

 

  “오냐, 인마!”

 

  대머리는 클클대며 이도를 내려다봤다. 응? 대머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도의 옷 아래에 무언가 있는 듯하다. 대머리는 손을 쭉 뻗어 그것을 만져보았다. 이도는 숨을 삼켰다.

 

  “이거 뭔데 숨기고 있냐?”

 

  “그냥 목걸이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숨기냐고.”

 

  “그게......”

 

  “보여 줘봐!”

 

  대머리는 옷 안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다. 이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모해? 모해?” “으슥한 곳에서 남자 둘이 뭐하니?”

 

  누구지?

 

  이도와 대머리는 함께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대머리의 친구 두 명이 있던 자리에 웬 소녀 두 명이 있다. 나이는 선화 정도 되어 보인다. 한 명은 윗머리는 갈색인데 아랫머리는 노란색이라 해바라기 같았다. 볼에는 주근깨가 있었다. 다른 한 명은 검은 장발에 살짝 건드려도 핏방울이 송송 맺힐 것만 같은 예리한 눈매를 했다.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장난스러운 눈빛과 표정이다.

 

  “혹시 괴롭히기? 괴롭히면 나쁜 아이!” “아리아 선장님이 알면 상어 미끼가 되든가, 아니면 배에서 내리든가, 아니면.”

 

  검은 장발의 소녀가 킥킥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두 입술 사이를 비집고나오는 새빨간 혀. 그 혀는 마치 좁은 구멍 사이로 무광의 검은 눈을 굴리는 개미귀신 같았다. 방심하는 순간 낚아채 사정없이 뜯어먹어버리는.

 

  찹, 찹, 찹.

 

  “소녀의 장, 난, 감이 되든가.”

 

  대머리와 친구 두 명은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외치고 도망쳐버렸다. 해바라기 스타일 소녀가 깜찍한 몸짓을 하며 도망가는 꼴을 보며 웃어댔다.

 

  “하하하! 엉덩이 흔들면서 도망치고 이쏘!”

 

  검은 장발 소녀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 있는 것에 반해 이 소녀는 계속 몸을 움직였다.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거나, 손바닥을 쥐었다 풀거나, 발목을 돌리거나, 머리를 흔들거나, 낄낄대거나. 동네 아이를 전부 데려와도 이 소녀의 부산스러움에는 못 당할 듯하다.

 

  이도는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어느새 검은 장발 소녀가 이도 밑에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이도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후후 웃으며 이도의 턱을 만졌다.

  “너. 흥미롭네? 뱃사람치고는 말 하는 데 문법도 잘 맞고. 그리고 어딘가 어색한 제국어. 너 서방인 맞아?”

 

  이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방에 유학을 다녀와서 그렇습니다.”

 

  해바라기 소녀도 이도에게 밀착해왔다. 으윽, 왜 이렇게 붙어대는 거지?

 

  “호오호오오오~ 유학파? 이른바 엘리트인고얌? 우리 배 엘리트?”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도가 입을 다물고 있자 소녀들은 한 걸음 물러났다. 검은 장발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녀는 이 배의 1등 전투원이야. 이름은 슈리. 대장한테 네 이름은 들었어, 도리아. 대장이 널 마음에 들어 하더라? 쿠쿠쿠, 날 질투하게 하다니. 제법이야.”

 

  슈리는 고개를 옆으로 팍 꺾었다. 눈이 번득인다.

 

  “자꾸 질투하게 하면, 쿠쿠쿠, 내 ‘장난감’으로 만들어버리겠어. 각오해. 쿠쿠쿠쿡.”

 

  무, 무서워! 이도는 살짝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바라기 소녀가 엉덩이를 이용해 슈리를 옆으로 밀었다. 슈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해바라기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젠 나의 차례이! 내 이름은 루카이! 이는 그냥 추임새이! 내 이름은 루카!”

 

  루카는 이도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루카도 1등 전투원이얌! 만나는 족족 나쁜 놈들 목을 썩썩 썰거든! 도리아도 나쁜 놈 목 썬 적 이썽??”

 

  “아뇨, 썬 적은 없습니다만......”

 

  “썰면 피가 파바바박 튀어서 재밌어! 도리아도 나중에 해봐양!”

 

  “네, 넵. 꼭.”

 

  갑자기 루카는 말이 없어졌다. 그게 오히려 더 어색했다. 루카는 이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도는 침을 삼켰다. 입을 다무니까 귀엽다. 평생 다물어 줬으면.

 

  “도리아, 미남이넹?”

 

  루카는 얼굴을 붉혔다.

 

  “루, 루카는 가슴이 두근거릴 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게썽!”

 

  슈리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루카에게 속삭였다.

 

  “그럴 때는 말이지. 키스 하면 돼.”

 

 루카는 눈을 껌뻑였다.

 

 "키스가 뭐야?"

 

  “뽀뽀 말이야, 이 멍청이!”

 

  “뽀, 뽀뽀?”

 

  루카는 이도를 진지하게 쳐다봤다. 윽, 그렇게 보지 마!

 

  “루카는 도리아에게 뽀뽀하고 싶당!”

 

  슈리는 옆에서 얼굴을 가리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도의 동공이 떨렸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대체 어떡하면 좋지?

 

  “이 썩을 계집들!”

 

  갑자기 돌격대장이 호통이 들렸다. 그는 한 쪽 팔을 빙빙 돌리고 있다.

 

  “뭐 하고 있나 했더니, 땡땡이 치고 있었냐!”

 

  슈리는 코웃음 쳤다.

 

  “흥! 소녀는 지금 루카에게 성교육을 시켜주고 있답니다!”

 

  “성교육? 뭔 소리야?”

 

  루카는 돌격대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루카 지금 뽀뽀 연습 하고 이써!”

 

  “헛짓거리 하지 말고 빨랑 와! 이, 이......”

 

  돌격대장은 침을 튀기며 외쳤다.

 

  “럼주도 없을 줄 알아!”

 

  슈리는 충격 먹은 표정을 지었다.

 

  “어쩜 그런 심한 말을! 소녀는 지금 갑니다!”

 

  “루카도 갈랭!”

 

  슈리와 루카는 뛰어갔다. 곧 둘 다 이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드디어 혼자가 된 이도는 땅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십년은 늙은 것 같아.”

 

  평소에 텐션이 낮은 편인 이도에게 언제나 텐션이 최고치인 루카와 슈리는 극악의 상성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자주 마주칠 것 같은 예감에 이도는 약간 울적해졌다. 하지만 정체는 들키지 않았다.

 

  다행이다.

 

  이도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럼주통 걸레질을 끝마쳤다. 일을 끝마치면 무조건 선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게 이 배의 규칙이라고 한다. 이도는 이 배에서 지낸지 며칠 안 됐지만, 선원들이 아리아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배의 수준을 보면 이들이 보통 해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인가?”

 

  이도는 줄에 줄줄이 꿰어 문에 늘어뜨린 조개껍데기들을 바라봤다. 이도는 줄을 흔들어 조개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안에서 아리아가 들어오라고 말했다. 이도는 들어가겠다고 말하며 문을 열었다.

 

  “럼주통 걸레질을 끝마쳤습니다.”

 

  아리아는 낮은 의자에 앉아서 조그마한 물통 안에 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물은 깨끗했고 위에 아카시아 꽃잎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지금 보니 물 색깔도 약간 노랗다. 향을 첨가한 걸까? 이도는 눈을 감고 향기로운 아카시아 냄새를 맡았다. 좋았다. 꽃 냄새는 언제 맡아도 좋다.

  가만히 앉아 손 관리를 하는 아리아의 모습은 편안해보였다. 배 위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와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아리아가 말했다.

 

  “대포술만 배우면 되는데 잡일도 해주니, 나야 더 바랄게 없네.”

 

  이도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잠깐만.”

 

  이도는 눈을 깜빡이며 아리아를 봤다.

 

  “네?”

 

  “잠시 얘기라도 하지 그래?”

 

  아리아는 옆에 있던 또 다른 낮은 나무 의자를 끌어왔다. 아리아는 그 의자 위를 팡팡 쳤다. 이도는 조심스럽게 가서 앉았다. 아리아는 항상 머리 위에 두르는 빨간 스카프를 푼 채였다. 이도가 보기엔 지금이 더 예뻤다.

 

  “어때? 배 생활은 이제 익숙해졌나?”

 

  “네. 선원들 모두 좋은 분들이에요.”

 

  가끔 이상한 인간들도 있지만, 대체로 괜찮았다.

 

  “그래? 그럼 다행이군. 우리 배는 좀 특이하거든.”

 

  “특이하다니요?”

 

  “나를 포함해서 이 배의 선원 9할 정도가 전에는 노예였어. 하지만 내가 어느 날 힘을 모아 주인에게 저항했고, 성공해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났지. 근데 그 다음 살 길을 찾으려니까 막막하더라고. 그래서 이 해적 밀수를 시작했지. 근데 너는 딱 봐도 노예 출신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네가 약간 우리에게 동화되기 어렵지 않았을까, 그런 걱정을 한 거지.”

 

  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 밀수라. 해적질을 하며 갈취한 물품을 밀수무역으로 이윤을 보는 거구나.

 

  “괜찮아요. 해적이라기엔 선장님도 좋은 분 같아보이시는걸요? 게다가 젊으신 데도 어엿한 배의 선장이시고.”

 

  아리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난 그렇게 좋은 놈도 아니고 대단한 놈도 아니야.”

 

  “매일 이렇게 손 관리하시는 건가요?”

 

  이도는 물 안에 잠겨있는 아리아의 손을 가리켰다.

 

  “응. 그냥 내 취미야.”

 

  아리아는 입꼬리를 실룩였다.

 

  손이 무척 아름다웠다.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상처 하나 없었다. 해적의 손이라기엔 매우 이질적이었다. 이런 손을 유지하기 위해 대체 언제부터 관리했던 걸까. 애초에 왜 이렇게 공들여 관리하는 걸까?

 

  “저번에 저희가 습격했던 배, 저희를 쫒아올까요?”

 

  “글쎄다. 근데 우리도 급해가지고 귀한 건 못 챙겨가지고, 뭐 중요한 거라도 우리가 가져왔으면 쫒아오겠지?”

 

  이도는 침을 삼켰다. 이런.

 

  “도리아, 저기 걸린 수건 좀 갖다 줄래?”

 

  “네.”

 

  이도는 벽에 걸린 수건을 아리아에게 건넸다. 아리아는 꼼꼼하게 손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이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와는 긴 인연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아리아는 미소 지었다. 이도도 화사한 웃음으로 답했다.

 

  이도는 생각했다.

 

  긴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이도는 그들과 정을 느낄수록 불안해졌다.

 

  언젠가는 다가올 ‘발각’의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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