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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그러나 그는 죽지 않는다
작가 : 에르노
작품등록일 : 2016.10.5

누군가 그를 미친듯이 원한다! 영문도 모른 채 쫒기는 소년, 그는 어째서 납치당하는가?
벗어날수록 옭아매오는 그물, 그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치명적인 음모가 정체를 드러낸다!

강대한 라니냐 제국의 볼모가 되어버린 도림 왕국의 태자, 상냥하고 친절하나 실은 비성숙한 자아에 고통받는 그는 제국을 적대하는 식민지 독립파에 의해 납치당하고 만다. 탈출을 시도하고 흉악한 적들과 추격전을 벌이며 이색적인 해적과 조우한다. 스릴 넘치는 모험과 풋풋한 사랑을 통해 자아의 성장을 일궈나가는 다크판타지.



표지는 핀터레스트 펌입니다.

 
09.다시 찾아온
작성일 : 16-10-12 18:18     조회 : 1,259     추천 : 0     분량 : 16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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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자, 신참. 잘 봐라. 저기 암초 보이지?”

 

  돌격대장이 이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손이 땀으로 축축하다.

 

  “잘 안 보이는데요.”

 

  “이런, 눈이 안 좋냐? 잘 봐봐!”

 

  이도는 힘껏 눈을 부라리며 푸른 바다 위 어딘가에 있을 암초를 찾아보았다. 아, 저건가? 저 좁쌀 크기만큼 보이는 게?

 

  “지금 저걸 쏘란 말인가요?”

 

  “그래.”

 

  “절대 불가능해요! 저건 베테랑도 못 맞출 겁니다.”

 

  “어허, 베테랑도 못 한다고?”

 

  돌격대장은 몸을 뒤로 돌렸다.

 

  “이봐, 1등 포수! 여기로 와봐라.”

 

  앞니가 툭 튀어나온 1등 포수가 달려왔다.

 

  “넵, 대장. 무슨 일입죠?”

 

  “이 신참이 베테랑도 저기 보이는 암초는 못 맞출 거란다. 어떻게 생각 하냐?”

 

  그는 손바닥을 눈썹 위에 걸쳐 햇빛을 가리고 바다를 보았다.

 

  “저거 말이군요. 뭐, 껌이죠.”

 

  “좋아. 저 신참한테 진면목 좀 보여라.”

 

 "잘 봐라, 이게 진정한 대포다."

 

  그는 대포 안에 화약과 포탄을 넣고 꽂을대로 다졌다. 워낙 빠르게 해서 대충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재빠르게 조준한 뒤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귀 막아, 신참!”

 

  돌격대장의 외침을 듣고 이도는 귀를 막으며 몸을 돌렸다. 쿵! 충격파와 충격음이 온 몸을 뒤흔들었다. 막았는데도 귀가 멍멍했다. 이도는 인상을 쓰며 바다 저편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암초 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돌격대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봤냐, 신참? 우리 배는 보통 배가 아니야. 베테랑 해적 중에서도 베테랑들만 있는 배라고. 특히 우리 아리아 누님과 언니 분께서는 대양의 자매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이 배에 네가 탈 수 있게 된 건 행운이다, 임마. 좋았다, 1등 포수. 물러가도록. 이젠 네 차례다, 신참!”

 

  이도는 한숨을 쉬며 포격 준비를 했다. 우선 더러워진 포신 내부를 딱은 뒤 화약과 포탄을 채우고 다졌다. 여기에 들인 시간이라면 그 1등 포수는 벌써 두 번은 쐈다. 겨우 준비를 한 뒤, 이도는 대포를 이리저리 조준했다. 젠장, 낙사각도 계산하고 바람도 계산하고. 게다가 배의 움직임도 계산하고. 복잡하다. 결국 이도는 대강 해치웠다. 그리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귀를 막고 뒤를 바라봤다. 쿵! 으윽, 언제쯤 익숙해질까?

 

  “으음.”

 

  돌격대장이 미묘한 소리를 냈다. 포탄이 멀리 날아가긴 했지만, 암초로부터 꽤나 떨어진 곳에 착탄했기 때문이다. 이도는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처음치곤 나쁘지 않아. 어떤 놈은 배 바로 앞에다가 쏘기도 했다니까!”

 

  “포격술은 잘 배우고 있나?”

 

  갑자기 아리아가 뒤에서 나타났다. 돌격대장은 미소를 지었다.

 

  “어이쿠, 저는 자리를 비키겠습니다요.”

 

  그러고는 쌩하니 사라져버렸다.

 

  “보아하니 첫발은 허탕 친 거 같은데?”

 

  “처음은 뭐 다 그렇지. 그것보다 당국까지는 얼마나 걸려?”

 

  “뱃길로 가면 렐리아나 항구 바로 위니까 얼마 안 걸려. 3일 정도?”

 

  아리아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빨리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야?”

 

  “빨리 가야 너에게 빨리 귀족 작위를 내릴 수도 있고. 뭐 그런거지. 그것보다 궁금한 게 있어.”

 

  아리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답했다.

 

  “뭐가 궁금한데?”

 

  “이 대양과 식민지를 둘러싼 무역과 밀수에 대해서. 사실상 식민지 무역업자들은 전부 밀수꾼이라고 했지? 그건 어째서야?”

 

  “지금은 제국이 밀수를 강력하게 단속하지만, 옛날에는 아니었어. 적어도 식민지가 처음 생길 때에는 밀수가 이루어져도 못 본 척 했지. 식민지 형성 초기부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던 거지. 그리고 이 밀수는 주로 제국 사치품을 둘러싸고 일어났어. 그 후, 시간이 지나 제국이 식민지를 자기들 통치권에 제대로 흡수하려고 하자, 지금처럼 문제가 일어났지. 그동안 생겨났던 밀수꾼이 식민지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거야. 사실상 밀수꾼이 식민지 공동체를 만들었지. 싼 가격에 생필품을 공급하고, 싼 가격에 사치품도 들여오고, 이러니 사람들이 안 좋아할 수가 있어? 제대로 유착관계가 형성된 거야. 그런데 제국이 이를 깨고자 하니 크게 반발하는 거지. 그래서 독립파까지 생겨나고. 일단 명분으로는 관세가 너무 높다는 걸 내세우지만, 사실 거짓이지. 밀수에 관세가 뭐야? 식민지 공동체가 원하는 건 밀수의 자유야. 그러나 제국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지. 그래서 충돌하는 거야.”

 

  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요즘 많이 유통되는 상품은 뭐야?”

 

  “워낙 많아서.”

 

  아리아는 난간 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맞다. 최근에 주목받는 상품이 있어. 검은 기름.”

 

  검은 기름. 최근 광산 시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시추법의 개발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그 용도는 알 수가 없다. 혹자는 나무 대용 연료로 쓸 수 있다고도 하지만, 너무 빨리 사라지는 바람에 연료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혹자는, 마법의 물이라고 주장한다.

  도림 왕국을 필두로 한 미신을 배척하는 동방은 이 검은 기름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쓸 데도 없고 마법과 연관되기까지 하니 말이다. 하지만 서방에서는 다르다. 서방과 그 자식뻘인 신대륙의 식민지에서는 검은 기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그래서 이도는 제국의 수도에 가면 그 연구의 실체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도 들어보긴 했지만, 그 검은 기름이란 건 대체 어디에다 쓰는 거야?”

 

  “몰라?”

 

  “응. 동방에서는 검은 기름에 관심이 없거든.”

 

  아리아는 씩 웃었다. 두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이 검은 기름으로 마법을 부릴 수 있어.”

 

  이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사로잡았던 남자의 그 푸른 칼날이 생각났다.

 

  “자세히 말해 봐봐.”

 

  “마곡이란 거 알지?”

 

  마곡이란 신화 속 이야기를 통해 전해져 알려진 재배식물을 가리킨다. 신화에 따르면 마곡을 통해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마법을 부린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보통 재배 가능한 약초 정도로만 인식하는 게 현실이다.

 

  물론 이도는 이제 그렇지 않음을 안다.

 

  “알아. 근데 그게 왜?”

 

  “이 신대륙에는 재미있는 신화가 있어. 한 번 들어봐.”

 

  아리아는 신화 얘기를 시작했다.

 

 

  먼 옛날, 신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렸다. 조수로는 천사와 악마를 두었다. 그들은 각자 임무를 맡아 세상을 관리했다. 천사는 풀이 푸르게 하고, 꽃이 화사하게 하며, 산은 솟아오르게 하고, 물살은 차오르게 했다. 악마는 풀이 썩게 하고, 꽃이 시들게 하며, 산을 깎아버리고, 물살을 메마르게 했다. 둘은 서로 힘을 합쳐 세상의 수레바퀴를 돌렸다. 가끔 마음이 안 맞을 때도 있었으나, 신이 중재해줘서 문제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은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렸다. 천사와 악마는 신이 올 때가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신은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 결국 천사와 악마는 자기들끼리 세상을 다스리기로 했다. 처음에는 수레바퀴가 잘 돌아갔다. 그러나 곧 천사와 악마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서로가 서로의 방식을 옹호하며 패권을 장악하려고 한 것이다. 논쟁은 곧 분쟁으로 번졌다. 중재를 해 줄 신이 없었기에 다툼은 격렬해져만 갔다.

  마지막에는 전쟁이 일어났다. 천사와 악마의 전쟁 탓에 세상의 수레바퀴는 멈춰버렸다. 세상의 순환은 마구 뒤엉켜 꽃은 1분에 수천 번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태양이 지다가 다시 올라가다가 폭발하더니 다시 멀쩡해지며 달은 쪼개졌다가 붙었다. 말 그대로 혼돈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오래도록.

  어느 날, 신이 돌아왔다. 신은 혼돈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그리고 단번에 혼란을 수습하였다. 신은 자신의 조수에게 분노했다. 그래서 벌을 내리기로 했다. 신은 우선 악마들을 전부 그러모아 땅 밑 저 너머로 처박아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 두터운 지층을 깔아 영원히 못 나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천사들은 전부 날개를 뽑아 땅 위로 던져버렸다. 날개를 잃은 천사들은 땅으로 추방당했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신에게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그 이후로 신은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체념하고 나름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며 땅과 땅 사이에 갇힌 악마들에게서 기름이 새어나왔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땅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기름이다. 땅에 꽂힌 천사의 날개를 그 형태가 변하여 우리가 지금 보는 마곡이 되었다. 그리고 날개를 잃고 추방당한 천사들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얘기를 끝낸 아리아는 배시시 웃었다.

 

  “어때? 재밌지? 근데 이 신화의 백미는 바로 검은 기름과 마곡의 기원에 대해 특정지어 설명한다는 점이야. 그래서 이 신화에 착안해 신대륙에서 마곡과 검은 기름을 이용한 마법연구가 시작되었어. 얼마 안 가 이를 제국 본토에서 수용해 연구를 시작했지. 하지만 신대륙 쪽이 더 발전해있어. 이게 유일하게 식민지가 제국보다 우월한 점이지.”

 

  이도는 아직도 의구심이 들었다.

 

  “성과는 있는 거야?”

 

  “거짓말 같지만 있어. 아직 미약한 수준이지만 말이야. 이건 뭍으로 가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거야. 간단히 예를 들자면 푸른 마곡을 부드럽게 간 가루와 노란 마곡에서 뽑아낸 기름과 네 번 정제한 검은 기름을 서로 알맞은 비율로 섞은 뒤 손수건에 발라. 그런 뒤 동방에서 수입한 부싯돌로 불꽃을 붙이고 손수건으로 날이 상한 검을 싹싹 비벼줘. 그럼 짠! 검이 아주 날카로워 진다니까? 이건 내가 되게 간략하게 설명한 거야. 사실 훨씬 더 복잡해. 그리고 연구 진척이 정말 더디다고 하더라고. 마곡과 검은 기름이 주재료이긴 한데 그 외에도 부재료도 필요하고. 또 알맞은 배합에, 산출지도 중요하고.”

 

  “흠, 못 믿겠는데.”

 

  “내가 직접 내 눈으로 봤거든?”

 

  둘은 정겹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관측원이 아리아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러 왔다.

 

  “선장님! 그, 아, 앗! 죄송합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아리아는 성을 냈다.

 

  “오해하지 마! 그래. 무슨 일인데?”

 

  “저희가 저번에 습격했던 배가 우리를 추격해 왔습니다.”

 

  “저희가 저번에 습격했던 배가 우리를 추격해 왔습니다.”

 

  “그럼 전투 준비를 해야지!”

 

  “그게 말입니다. 놈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파란 깃발을 흔들었습니다.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요. 게다가 그 배, 저번과는 달리 다른 깃발을 달고 있습니다.”

 

  “무슨 깃발인데?”

 

  “해상 민병대의 깃발입니다. 아무래도 식민지 독립파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곤란하게 됐군. 알았어. 지금 가지. 이도, 넌 안쪽에 숨어있어.”

 

  이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숨으러 갔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 꼴이 무안하고 우스웠는지 이도는 작게 신음했다. 나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니. 무력감이 들어 어깨가 축 처졌다.

 

  관측사와 함께 아리아는 선체 중앙으로 갔다. 돌격대장은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슈리와 루카는 곧 있을지도 모를 전투에 들뜬 표정이다. 아리아가 신호하자 그녀의 배가 멈췄다. 놈들의 배도 바로 옆에서 멈췄다. 간신히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만 떨어져있었다. 확실히 해상 민병대의 깃발이 걸려있었다.

 

  성가신 놈들이다. 독립파와 연관된 놈들이면 쉽게 건드릴 수가 없다. 자칫하면 식민지를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공격해 침몰시키기도 쉬운 건 아니다. 저번 공격이 실패했던 건 날씨와 더해서 예상외로 강한 저항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대자 납치를 위해 엄선한 자들이니 호락호락하지 않다. 기회를 엿봐야 한다. 일단 대화에 임하는 척 해서 방심시키는 게 먼저다.

 

  아리아는 난간 위에 올라서서 밧줄을 잡고 섰다. 일부러 건방진 태도를 취했다.

 

  “대화를 하고 싶다고?”

 

  적선의 선장으로 보이는 입이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온 인상 나쁜 놈이 앞으로 나왔다. 그 뒤에는 무장한 선원들이 전투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 대화에 앞서 우선 우리는 관대하게 자네의 실수를 용납하겠네. 행여나 제국군 함대를 만날까봐 평범한 무역선 깃발을 내걸었는데, 설마하니 해적 밀수꾼에게 걸릴 줄이야. 하지만 지금 보다시피 우린 해상 민병대야. 이건 심각한 사안이지. 하지만 자넨 그걸 몰랐으니, 내 관대하게 넘어가주겠다는 걸세.”

 

  아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됐고, 요점이나 말해.”

 

  “우리는 은발의 피부가 흰 동방인을 포로로 잡고 있었다. 독립파에 있어 매우 중요한 포로야. 아마 저번 난장판을 틈타 자네들 선박으로 건너간 것 같은데, 내 짐작이 맞나?”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 없어. 착각하셨군.”

 

  “발뺌하지마라, 빌어먹을 창녀야.”

 

  “뭐?”

 

  아리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모자를 썼지만, 분명히 은발인 남자가 그 쪽 배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 쪽에서 봤다. 황당하게도 웬 놈은 그 포로를 같은 선원이라 생각하는 것 같더군.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나? 그럼 빨리 그 놈을 내놔, 너희를 우리 공동체에서 제명시켜버리기 전에.”

 

  아리아는 눈을 부라렸다. 그녀의 선원들은 그녀를 창녀라고 부른 놈을 향해 야유를 쏟아 붇고 있었다. 아리아는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모욕적이지만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선원들 앞이다. 아리아는 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정당한 내 손님이다. 설령 천금을 준다 해도 내줄 순 없다. 너희들과 거래하기 전, 나는 이미 그와 거래했거든. 이제 상황 파악이 되나? 그리고 미안하지만, 난 너희들을 전부 죽일 거야. 특히 너, 네놈은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주지. 그리고 너희들의 배를 불살라버리겠어. 너희들의 말대로, 제명당하기는 싫으니까 말이야. 알겠나?”

 

  그 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겨?”

 

  “착각이 심하군. 우린 이제 너와 협상하지 않아. 이제 너의 선원들과 협상하겠다. 이봐! 그걸 들고 오도록.”

 

  그의 선원이 상자 세 개를 낑낑대며 들고 왔다. 그리고 활짝 열어보였다. 금과 은,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상자 안이 이 세상이 아닌 외계의 공간이라도 되는 마냥 집중을 끌어 모았다. 아리아의 선원들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리아는 불안함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예감이 좋지 않다.

 

  “그럼, 친구들? 이건 시작에 불과해. 은발 머리 포로, 그리고 너희의 선장을 내게 넘겨라. 그럼 이것과 똑같은 보물 상자를 너희 모두에게 각각 하나 씩 주도록 하지.”

 

  곧바로 술렁거리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서로 무어라 대화했다. 아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안 돼, 안 돼!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하는 거야?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아리아는 다리에 힘이 빠질 것 같았지만, 힘을 냈다.

 

  “이 바보 같은 놈들! 뭘 동요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 나한테 벌 받고 싶어!”

 

  선원들은 말했다. “하지만, 일인당 상자 하나면 엄청나게 남는 장사인데.” “그래, 이 배에서 평생 썩어봤자 저거의 십분의 일도 못 벌걸?” “나도 집도 사고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저 정도 돈이면 평생 문제없을 거야.” “젠장, 나는 언젠가 사창가에 하루 전세 내고 즐기는 게 소원이었어. 저거면 대체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저 금 좀 봐봐, 선장님 집에는 저게 얼마나 있겠어? 하지만 우린 금화 서너 조각이라도 감지덕지하지. 젠장, 끌리는데?” “이봐, 우린 해적이잖아? 배신은 우리의 특기라고. 선장이라도 못 할 건 없지.”

 

  아리아는 그 말의 홍수에 압도당했다. 공포와 서러움으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냐, 나는 선원들을 믿어. 그러고는 필사적으로 선원들에게 외쳤다.

 

  “너희들, 정신 차려! 너희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준 게 누군지 잊었어? 바로 나야! 그런데 지금 날 팔아먹고 내 포로를 넘기겠단 거야? 정신 차려, 이 바보들아!”

 

  한 선원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근데 그건 옛날 일이잖아요?”

 

  “뭐라고?”

 

  아리아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나와 선원들의 신뢰가 이것밖에 안 되었나?

 

  듣다 못한 슈리가 선원들을 향해 역정을 냈다.

 

  “이 벌레만도 못한 새끼들! 너희들이 뇌의 명령이 아니라 고간의 명령을 받고 움직인다는 건 알았지만, 부끄러움도 모르는 버러지들이었구나!”

 

  루카도 거들었다.

 

  “마자! 매음굴이 아니면 하지도 못하는 빻은 얼굴 주제에!”

 

  그러자 선원들은 갑자기 슈리와 루카를 붙잡았다. 슈리와 루카는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쪽수에는 장사가 없다. 돌격대장이 분노했다.

  “이 놈들! 당장 그거 안 놔!”

 

  그러나 선원들은 돌격 대장마저 붙잡았다.

 

  눈앞의 믿지 못할 광경에 아리아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설마 진심이야?”

 

  아리아가 외쳤다.

 

  “너희들 정녕 몰라서 그래?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거야? 내, 내가 팔려 가면 내가 어떤 꼴이 될지 잘 알잖아! 불 보듯 뻔해, 성노예가 되고 말거야! 썩을 뱃구석에 팔려가서 하루종일 지저분한 놈들 욕구 처리나 해주는 처지로 전락할 거야, 돼지만도 못할 삶이라고! 너, 너희들은 널 노예에서 구한 은인을 성노예로 팔고 싶은 거야?”

 

  적선의 선장은 킥, 하고 웃었다.

 

  “뭐, 그게 걱정된다면 포로만 넘겨도 좋아.”

 

  “거짓말! 널 어떻게 믿어! 일단 포로와 보물을 교환하면, 난 무방비가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니들이 약속을 깨고 날 잡아갈지 어떻게 알아? 이놈들도 먹은 게 있으니 못 본 척 할 테고!”

 

  그 놈은 낄낄대며 웃었다. 적 선원들도 킥킥댔다. 아리아의 선원들도 킬킬댔다. 아리아는 공포에 질려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주저앉아버렸다. 선원들이 말했다.

 

  “뭐, 누님이 정녕 무서우시다면 우리 모두가 누님을 성심성의껏 ‘배웅’해드릴 수도 있다고요?” “어디를 어떻게 해야 남자가 좋아하는지, 잔뜩 알려드리죠. 미리미리 공부하는 게 좋잖아요?” “히히힛. 누님도 알다시피 해상 생활이 외롭잖습니까? 그런데 누님같은 미인이 돌아다니면, 크으! 가끔은 정말 참을 수가 없다니까요?” “맞아, 맞아. 누님도 외로울텐데, 가끔은 즐겨야죠!” “만날 우리한테 엄하고 윽박지르는 표정만 보여주지 말고, 술 취하듯 풀려버린 얼굴을 보여 줘봐요. 우리도 보고 싶다니까요?” “푸하하하하!”

 

  슈리와 루카, 돌격 대장은 선원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 부었다.

 

  아리아는 숲에서 곰을 만난 여자아이처럼 선원들을 공포의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뭐, 뭐야. 너희들, 날 그런 눈으로 봤던 거야? 거짓말, 거짓말!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믿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난 정말 우리 모두가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서로 신뢰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내가 바보였구나, 내가 멍청했어.”

 

  아리아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젠 됐어. 다 니들 맘대로 해! 이 나쁜 새끼들아! 전부 지옥에나 떨어져버려!”

 

  아리아는 서럽게 흐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그 때, 아리아의 선원들은 씩 웃었다.

 

  “에에~ 선장님 우신다~ 선장님 울어요~” “누님! 여자가 18살 먹고도 질질 짜면 가슴 떨어진다는 거 모릅니까?” “하하하! 나 선장님 우는 거 처음 봤어! 선장님, 빨리 저 배 가서 소금 가져오세요!” “얼레리 꼴레리~ 울음보 터졌대요~”

 

  슈리와 루카, 돌격대장은 갑자기 깔깔 웃었다.

 

  “쿠쿠쿠쿠, 누님의 우는 얼굴...... 소녀의 유열을 불러일으키는군요!” “와~ 아리아 가슴 떨어진댜~ 내 꼬 할래!” “용서해주쇼, 누님! 너무 재밌어 보여서 저질렀습니다!”

 

  아리아는 그런 선원들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선원들이 말했다.

 

  “어때요? 우리들의 서프라이즈가?”

 

  아리아는 선원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우린 절대 선장님을 팔아넘길 생각이 없어요. 선장님 말마따나, 독립파 놈들은 안 그래도 뒤가 구린 놈들인데 어떻게 믿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수확은 있네요. 항상 우리한테 잔소리하던 선장님을 골탕 먹인 거! 저번 파티 때 말 했잖아요? 언젠가 골탕 먹인다고!”

 

  선원들은 모두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리아는 선원들을 노려보며 일어섰다.

 

  “이, 이 썩을 놈들! 이 일만 끝나면 모두 각오해, 알겠어! 특히 슈리! 루카! 뉘들! 같은 여자끼리 이럴 줄이야! 각오는 됐겠지!”

 

  “예, 선장님!”

 

  아리아는 칼을 뽑아들고 치켜들며 외쳤다.

 

  “대포, 발사!”

 

  대포 32문이 굉음과 함께 포탄을 쏟아낸다. 포탄은 이리저리 날아가며, 적들을 깔아뭉개고, 터뜨리고, 선체를 박살내고, 대포를 부수고, 마스트를 꺾어버린다. 예상외의 공격에 당황한 적들은 혼비백산한다. 개구리 입 적 선장은 입을 동그랗게 벌린다. 완전히 개구리 꼴이다.

 

  “머스킷 준비!”

 

  전투원은 모두 플린트락 화승총을 조준한다.

 

  “발사!”

 

  적들의 대열이 망가진다.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돌진!”

 

  아리아가 외친다. 선원들 모두 칼을 뽑아든다. 뛰어들거나 밧줄을 통해 날아가 적의 배로 올라탄다. 아리아는 품에서 마취 총을 꺼내 적 선장을 겨냥한다. 분다. 훅! 명중. 녀석은 그대로 쓰러진다. 아리아도 밧줄을 타 적의 배로 넘어가 싸움에 동참한다. 통솔력을 잃은 적은 오합지졸이다. 일방적인 싸움.

 

  슈리는 품에서 투척용 단검을 세 개 꺼낸다. 하나는 몰래 숨은 채 저격하는 놈의 목에, 다른 하나는 체면 불구하고 도망치는 놈의 등에,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앞으로 달려오는 놈의 가슴에 던져서 꽂아버린다. 한 방이면 충분하다.

 

  “쿠쿠쿠. 너무 싱거우니 염도 못 받고 죽으라지요.”

 

  슈리는 앞에 쓰러져있는 시체에 접근한다.

 

  “어라? 아직 살아있네?”

 

  약간 빗맞아서 심장 옆을 단검이 꿰뚫는다. 슈리는 단검을 뽑아들고 놈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러댄다. 녀석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른다. 눈과 입에서 피가 흐른다.

 

  “쿠쿠쿡. 죽기 전에 소녀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군요.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카카카카.”

 

  슈리가 재미를 볼 무렵 루카는 묘기에 가까운 검술로 적들을 죽이고 있다. 몸이 가벼워서 스텝이 재빠르다. 루카는 “호잇!” “하앗!” “이얏!” 하는 추임새를 넣으며 공격한다.

 

  뒤에서 누가 찌르기 공격을 한다. 루카는 재빨리 옆으로 스텝을 밟는다. 동시에 검을 밑으로 슥 놀려서 놈의 다리를 자른다. 놈은 잘린 다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쓰러지기도 전에 루카의 칼에 목이 날아간다.

 

  루카는 한 쪽 손으로 놈의 머리를 받았다. 죽기 전의 고통으로 인해 잔뜩 커진 동공을 똑바로 보며 루카는 손을 흔들었다.

 

  “미안행~ 금화 대신 이거라도 받앙~”

 

  루카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 안에 쑤셔 넣고 던져버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되자 승기는 기울었다.

 

  아리아는 선원들을 향해 외쳤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

 

  아리아는 소리 지르자마자 옆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웬 놈이 그녀의 옆구리를 발로 차 민 것이다. 아리아는 신음을 내며 몸을 추스른다. 그러나 이미 높이 솟아오른 칼은, 그녀를 겨누고 있더. 내려온다. 아리아는 입술을 까득 문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칼은 멈춘다. 누군가 그 놈의 심장을 검으로 찔렀기 때문이다. 저 검. 아리아는 벌떡 일어선다. 놈이 쓰러지자 이도가 보였다.

 

  “하마터면 큰 일 날 뻔 했네.”

 

  “아니, 왜 여기 있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래도 혹시 몰라 나와 있었어. 근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여차하면 내가 도우려고 했지. 그래서 나서려던 찰나, 장난이라고 밝히더라고.”

  아리아는 자기한테 달려오는 놈의 발을 걷어차고 칼로 찍어 누른 뒤, 말했다.

 

  “날 지키려고 했던 거야?”

 

  “당연하지. 실제로 이미 구했고. 뒷치기지만.”

 

  이도도 자기한테 다가온 놈의 다리를 찬 뒤 검으로 찍어버렸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게다가 좋은 선원들을 두었어.”

 

  날 구하려고 했다고? 아리아는 순간 늑대 같은 선원들한테 둘러싸인 자신을 구하는 이도의 모습을 상상했다. 백마 탄 왕자님처럼. 헉!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아리아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장난판을 벌일 만큼 네 제안이 가치가 있어야 할 텐데.”

 

  “걱정 마.”

 

  “흥.”

 

  아리아는 미소 지었다.

 

  이도는 무언가를 보고 몸이 굳어버렸다. 푸른 칼날. 그가 이도를 향해 오고 있다. 이도는 자세를 취했다.

 

  “아리아, 저기 있어. 저 놈이 그 마법 무기를 쓰는 놈이야.”

 

  아리아는 고개를 돌려 놈을 봤다.

 

  “쫄 거 없어.”

 

  아리아는 미리 장전해 둔 전장식 권총으로 놈의 머리를 쏴죽여버렸다. 이도는 입을 떡 벌렸다. 아리아는 총구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후 불었다.

 

  “총은 언제나 검을 이기지. 마법이든 뭐든.”

 

  싸움은 순탄했다. 완전히 패닉에 빠진 적들은 변변한 저항 하나 못한 채 궤멸 당했다. 그들의 배는 그들의 피로 채색되었다. 아리아의 선원들은 그 배의 선적품을 가능한 한 갈취한 뒤, 불태워버렸다. 적 선장이 깨어날 때에는 이미 침몰하고 있었다. 그는 온 몸이 밧줄로 묶여 꼼짝 할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살려줘!”

 

  그는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아리아에게 빌었다. 아리아는 그 놈의 얼굴을 발로 차버렸다.

 

  “쓰레기 자식.”

 

  아리아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창녀. 감히 나에게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아리아는 관대했다. 오로지 모욕만 제외하고는. 신대륙 밀수업계에는 떠도는 한 가지 말이 있다. 아리아를 속여 먹여도 살 순 있지만 모욕하고는 살 수 없다. 예전에 아리아는 자신의 노예이력을 가지고 모욕했던 조무래기 두 놈을 끈질기게 추적해 결국 잡았다. 그 두 놈은 꿀이 잔뜩 발려진 채 관에 갇혀 늪지대에 놓여졌다.

 

  오, 환상적이었을 것이다.

 

  벌레들에게는.

 

  아리아는 칼로 놈의 무릎을 후볐다. 놈은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슈리와 루카는 낄낄대며 구경했지만 돌격대장은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아리아는 반대쪽 무릎을 후벼 팠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이도는 아리아의 팔을 잡고 자신을 향해 돌렸다.

 

  이도는 할 말을 잃었다.

 

  광기어린 미소. 아버지를 보는 듯하다.

 

  이도는 짜내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만해, 이렇게까지 고통을 줄 필요는 없잖아?”

 

  “넌 상관없어.”

 

  “그냥 죽여.”

 

  “싫은데?”

 

  아리아는 이도의 가슴팍을 살짝 밀었다.

 

  “난 말이야. 모욕당하는 게 제일 불쾌해. 다른 건 다 참아도 모욕당하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어. 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고.”

 

  아리아는 다시 놈의 허벅지를 칼로 쑤셔댔다.

 

  이도는 외쳤다.

 

  “그만해!”

 

  이도는 아리아의 칼을 쳤다. 칼이 쨍그르르 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선원들은 헉 소리를 냈다. 아리아는 이도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멱살을 잡고 바닥에 깔아뭉갰다.

 

  “미쳤어? 감히 날 방해해?”

 

  아리아는 이빨을 뿌득뿌득 갈았다.

 

  “넌 이미 나를 한 번 모욕했어. 그 때 널 살려준 것만 해도 기적이야. 난 날 모욕한 놈을 전부 죽였으니까. 날 열 받게 하지 말라고.”

 

  이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잔뜩 일그러져 흉해진 아리아의 얼굴. 이런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 왜일까. 이도는 아리아의 귀에 속삭였다.

  “난 이런 너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

 

  아리아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 말 때문에 의식의 수면 아래에 있던, 상냥한 마음과 애정이 분노를 뚫고 올라왔다. 아리아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 다시 예뻐졌다. 아리아는 멱살을 놓고 일어섰다. 그녀는 선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놈 발에 철구 채워.”

 

  한 선원이 철구를 들고 왔다. 그건 마치 노예에 발에 거는 철구 같았다.

 

  “안 돼, 그것만은! 차라리 한 칼에 죽여줘!”

 

  “내 비위가 약해서 네놈 가죽을 못 벗기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아리아는 놈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발을 이용해 놈을 난간 너머로 밀었다. 그놈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이도는 바다를 보았다. 놈이 잠겨버린 자리에는 조그만 원이 그려져 있다. 끔찍하다. 도림 왕국에는 이런 잔인한 형벌이 없었다. 대부분 단칼에 목을 베는 정도였다.

 

  아리아의 배 위는 고요했다. 싸움의 여파였다. 선원들은 당황스러움을 갖췄다. 신참인 줄 알았던 놈이 선장이랑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게다가 말싸움까지 했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안 것이다. 아리아는 박수를 짝 쳤다.

 

  “우리 모두 기도하자고.”

 

  아리아는 씩 웃었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상어에게 준 우리에게 감사를.”

 

  그 말에 선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한 번에 풀렸다. 다시 선원들은 서로 잡담을 시작했다. 예전처럼 활기 넘치는 배가 되었다. 이도는 감탄했다. 선장이 괜히 된 게 아니구나.

 

  아리아는 칼을 뽑아들었다.

 

  “이젠 니들 차례다!”

 

  아리아는 선원들을 향해 칼을 마구 휘둘러댔다. 물론 장난이다.

 

  “니들이 어떻게 감히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이 배은망덕한 놈들아!”

 

  선원들은 하하호호 웃어대며 칼부림을 피했다. 그러면서 선장님이 미쳤다, 선장님이 화내신다, 하며 아리아를 더 약 올렸다. 슈리와 루카도 거들었다. 옆에서 보는 이도마저 짜증이 날 정도로 깐족거리는 건 잘 했다.

 

  “난 말이야, 하마터면 진짜로......”

 

  쿵! 그 순간 배가 좌측으로 확 기울었다. 재빨리 아리아가 조정해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아리아의 심각한 표정은 상황이 쉽지 않음을 말해주었다. 아리아는 선원들에게 문제의 원인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아리아는 바닥에 털썩 앉고는 방금까지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 놈들 혼내주는 건 나중으로 하자. 후우, 그래. 선장이 흥분하면 안 돼지. 안 돼.

 

  잠시 후, 문제를 조사한 선원들은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싸움 중에 녀석들이 쏜 포탄이 선체 하부에 문제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일단 비상처치를 해뒀지만, 지금 당장 항구로 가서 수리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리아는 쯧, 하며 머리를 긁었다.

 

 

 

 

  선상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배는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이도는 쭈뼛쭈뼛하며 난간에 기댄 아리아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내가 주제넘게 나섰어.”

 

  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너무 흥분했어. 내 모습, 꼴 보기 싫었지?”

 

  “그건 아냐!”

 

  “아니라고 말해도 다 알아. 내가 가장 잘 아는걸.”

 

  아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건 뭐랄까, 내 병이라고 할까, 강박증이라고 할까. 아무튼 내 나쁜 버릇이야. 고쳐야 하는데 마음처럼 잘 안 돼. 그렇다고 해서 너한테 화낸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야. 미안해.”

 

  “괜찮아.”

 

  둘 사이는 잠시 조용해졌다. 아리아가 말했다.

 

  “이도, 아까 들어서 알겠지만 바로 식민지 당국으로 향하는 건 무리야. 일단 렐리아나 항구에 들러서 수리를 해야 돼. 괜찮겠지?”

 

  “괜찮아.”

 

  아리아는 항해사를 불러 뱃머리를 렐리아나 항구로 돌렸다.

 

  “걱정하지 마. 하루 정도면 도착할 테니까.”

 

  배는 불타는 적선을 남겨두고 유유히 바다 위를 나아갔다.

 

  소란스러웠던 분위기도 어느새 진정되었다. 어질러진 배 위를 치우거나 부상 입은 자들을 치료했다. 운 나쁘게 죽은 자는 나름대로 간략하게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시체의 어느 한 부분은 잘라 염을 해서 따로 보관하고, 시체는 관에 넣은 뒤 바다 위에 던졌다. 매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배 위에 병이 도는 것보다는 낫다. 따로 보관한 신체의 일부분은 나중에 뭍의 묘지에 묻어준다. 그리고 장례도 정식으로 다시 치른다.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이도는 바다를 보았다. 파도가 배에 부딪쳐 철썩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도는 아리아에게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렐리아나 항구는 어떤 곳이야?”

 

  “우리 자매의 거점 같은 곳이지.”

 

  “당국 바로 밑이라며? 그럼 위험하지 않아?”

 

  “우리 언니가 인맥을 잘 쌓아놔서, 우리는 당국과 썩 나쁘지는 않은 관계야. 가끔은 럼주, 군수품, 담배 같은 것들을 몰래 그쪽으로 유통시켜 주기도 하거든. 또 사이가 나쁜 독립파와 당국 사이를 대화통로 비슷한 구실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독립파는 우리가 언제 당국 편에 서지는 않을지 예의주시 하고 있어.”

 

  이도는 머리를 긁적였다.

 

  “날 보호하는 시점에서 이미 당국과 결탁한 거 아냐?”

 

  “그래서 걱정이야. 내가 갑자기 귀족이 되고, 네가 무사하게 되면 무역협회는 날 의심하겠지. 내 언니와 내 선원들에게도 보복이 올 거야. 그래서 나는 제국 본토로 이민 갈 것을 생각하고 있어. 물론 모두를 데리고. 나만 갈 순 없잖아?”

 

  아리아는 씩 웃었다.

 

  “물론, 네가 다 지원해줄 거라고 믿고 있어.”

 

  “황제가 아량이 넓어야 할 텐데.”

 

  갈매기가 끼룩끼룩 대며 그들 위를 날았다.

 

  아리아는 뒤로 돌아섰다.

 

  “좋아, 결심했어.”

 

  “뭘?”

 

  이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아리아는 선원들 앞으로 나아갔다.

 

  “자, 모두들 주목! 지금 바로 중대한 결정을 발표하겠다!”

 

  선원들은 웅성대며 아리아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아리아는 얼굴이 붉어진 채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어, 음.”

 

  머뭇거리더니 드디어 말문이 트였다.

 

  “오늘 있던 일은 정말로 불쾌했다. 교수대만 있었어도 네놈들 전부 목매달았을 텐데! 하지만 그럴 수야 없지. 게다가 이번 일로 나도 조금은 반성을 하게 됐다. 큼, 아무래도 내가 건장한 남성들의 그, 그러니까 그 성욕이란 것을 간과한 모양이야. 그래서.”

 

  아리아는 혀를 쯧 차고 말을 이었다.

 

  “금지였던 춘화의 선내 반입을 오늘부로 허락하겠다!”

 

  조용했다. 아리아는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머지않아 선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껴안는 선원도 있었다. 아리아는 그 꼴을 보며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왜 이렇게나 기뻐하는 거야? 이래서 남자들이란! 엉큼한 놈들!”

 

  그래도 선원들의 탄성을 끊이지 않았다. 와중에 기쁨에 겨운 한 선원은 깃발을 들고 마스트 위의 감시대에 올라 “춘화에 자유를! 벗은 몸에 찬사를!”라고 외쳐댔다. 아리아는 선원들이 한심했지만 그래도 기뻐하는 얼굴을 보자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슈리와 루카도 쿡쿡 웃었다. 이도도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와 견딜 수 없었다. 결국 굴복하고 숨을 헐떡일 때까지 정신없이 웃어댔다. 눈물 나도록 웃어본 적이 얼마만일까?

 

  그러다가 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봤다.

 

  그러더니 멋쩍게 웃었다. 둘 다 얼굴이 붉어진 걸 들키기 싫어서, 혹은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서 고개를 돌렸다.

 

  난관은 넘었어.

 

  그러나 이도는 안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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