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세종이 군대 가다.
교과서에서 말해주는 기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만의 기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림을 완성하는 동안 귀를 닫기로 마음먹었다.
그간 물감을 써 본 결과 가장 다루기 쉬운 물감은 징크 화이트와 브라운 계열의 물감들이었다. 물감을 올리는 일에 적잖게 실패를 경험한 나는 밑 색을 올리는 일에 다루가 쉬운 색들로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최종적으로 색을 낼 때는 정확하게 색을 만들어 쓰면 되는 일이었지만 젯소를 전혀 바르지 않은 생천을 달래면서 그리는 일은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캔버스에 어느 정도 물감이 밀려 들어가야 조금씩 묘사가 가능할 것 같았다. 바싹 말라있는 천에 징크 화이트를 테레핀에 많이 개어서 크게 한 번 발라야 할 것 같았다. 작은 붓으로 꼼지락거려봐야 어차피 내가 친면들은 나중에 다 밑 색이 될 뿐이었다.
패널을 바닥에 눕혔다. 큰 백 붓으로 마치 젯소를 바르듯이 화이트를 발라 주었다. 징크 화이트는 약간 반 투명이어서 다 바른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려놓은 형태들은 희미하게 보일 것이다. 기름을 적당히 많이 써야 형태가 잘 보일 것이다.
테레핀을 많이 썼더니 화실 내에 테레핀 냄새로 진동했다. 환기를 해야겠다 싶었다. 테레핀은 송진으로 만든 기름이라 송진 냄새가 많이 난다. 오랫동안 맡으면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다. 다른 분들한테 피해를 안 끼치려면 오늘 같은 작업은 사람이 없을 때 하는 것이 좋다. 징크 화이트가 어느 정도 마를 때까지 어떻게 그림을 그려나갈지 계속 고민했다. 손으로 만져보니 오늘 안에 마르기는 틀렸다 싶었다.
그때 세종에게서 전화가 왔다.
“ 야. 주민아. 이 형님 내일모레 군대 가는 거 알고 있지?”
“ 그럼. 물론 알고 있지.”
사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 코가 석자였기 때문이다.
“ 어디야? 안양 시내에 있으면 락신으로 와. 술이나 한 잔 하게.”
“ 어. 그래. 안 그래도 시간이 좀 애매했는데 잘됐다.”
물감은 오늘 중으로 마르기 엔 틀렸었다. 세종이 얼굴 본지도 오래됐고 아무튼 잘 됐다 싶었다. 그림 그리던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지난번에 휴지로 붓과 팔레트를 정리해 보니 휴지가 이만저만 많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에서 낡은 수건을 가져다 놓았더니 붓 정리할 때 한결 편해졌다.
락신에 도착해 보니 충재도 와있고 홍선이도 와있었다.
‘친구들 다 불렀구나.’
입대 전전날에 친구들 동생들까지 다 부른 거 같았다. 테이블을 두 개를 붙여놓을 것을 보면 몇 명이 올지 대략 알 수 있었다.
“ 배샘도 불렀대.”
배샘이 다 회복해서 철이가 나가는 노량진 학원에 나온다는 말은 들은 적은 있었다. 배샘을 보면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 내심 기대가 됐다. 세종이 녀석은 자기가 군대 가기 전에 지인들을 한 군대서 다 보고 싶었나 보다. 나는 매일 화실에 있으니까 미리 연락을 안 했다고 했다. 다 모여보니 10명이었다. 다 학원출신들이었다. 우리 학원은 배샘, 우 샘 이후로 외부에서 강사를 뽑은 적이 없다. 계속 학원 출신들이 강사를 하다 보니 선후배에서 바로 사제지간이 된다. 나와 세종이만 그만뒀지 다른 친구들은 학원에 출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만둔 자리에 다른 제자 녀석들이 강사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세종이 때문에 모인 자리가 학원 동문회가 된 꼴이었다.
“ 야. 이게 얼마만이야?”
새로 뽑은 강사 녀석들인데 이 녀석들은 작년 재수생 녀석들이다. 우식이와 세옥이. 홍선이 녀석도 새끼 강사로 학원 일을 하고 있었다.
“ 우식이 동생도 학원에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
“ 맞아요. 형이 동생 가르치려고 하니 여간 어색해서.”
우식이 말이 맞다. 형제끼리는 무기 가르쳐주고 하는 거 아니다.
“ 세옥이는 학교 다닐 만 해?”
디자인을 공부한 녀석인데 나처럼 서양화과를 간 녀석이었다. 철이를 잘 따르던 녀석이어서 입시 때도 철이가 전담했던 녀석인데 체대를 준비하다가 재수 때 미대로 진학을 결심해 다른 친구들보다 두 배의 노력이 필요했던 녀석이었다.
“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통학이 너무 힘들어서 반수 할까 생각 중이에요.”
반가운 녀석들 사이에 승찬이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승찬이는 입시에 실패해서 4수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 다들 잔들이 채워졌으면 건배합시다.”
“ 빛나는 우리 청춘을 위하여. 다 같이 건배.”
저마다 머리 위로 들어 올렸던 잔 위로 전구 색 빛에 물들어 일렁인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우리 청춘이 흘러간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들인지라 이야기꽃이 활짝 핀다.
“ 어. 배 씨 왔다!”
세종이가 외쳤다.
“ 허허. 다들 오랜만이야. 어. 모르는 친구들도 있네.”
전 보다 몸이 다소 말라서 나타난 배샘의 혈색은 좋아 보였다. 많이 회복했나 보다.
“ 이게 얼마만 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가 말했다.
“ 병원에 6개월 누워있었으니까 적어도 1년이 되겠네.”
철이와 다른 녀석들은 피시방 게임을 좋아해서 배 샘과 종종 조우하는 거 같았는데 세종이와 나는 피시방 자체를 별로 가지를 않았던 터라 배샘 볼 일이 없었다.
“ 반갑네요. 몸은 좀 어때요?”
자리에 앉아 있던 세종이도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 이제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그렇지만 술을 거의 못한다고 했다. 큰 수술을 한 배샘은 군대가 면제됐다. 배샘 아버지도 과로가 인정되어 국가 유공자가 됐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 샘은 군대 가서 볼 수가 없구나.’
이제 내일모레면 세종이도 군대에 간다. 세종이 군대 가는 날에는 충재와 나 효민이 이렇게 따라가기로 했다. 군대 가면 술도 못 먹으니 오늘 실컷 마셔라. 세종아.
디데이는 어김없이 왔다. 그렇다. 오늘은 세종이 군 입대 날이다. 입대를 하는 곳은 102 보충대라고 했다. 춘천까지 가야 하는데 세종이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동행하기로 했다. 다 같이 만나기 좋은 장소로 화실 앞이었다. 화실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기로 한 참에 선생님도 세종이의 군 입대 전에 세종이를 한 번 볼 수 있었다.
이날의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밥 먹는 시간이 애매할 거라고 생각한 세종이 엄마의 생각은 옳았다. 속절없이 지나간 시간은 고속도로에서 난 차사고 때문이었다. 고속도로가 1시간이나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혹시나 하고 싸온 김밥이 우리의 허기를 달래 주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어떻게 세종이가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모르게 들어갔다. 갑자기 방송으로 입소를 알리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조차 못하고 우리는 녀석을 보내야 했다.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어리둥절하기는 세종이도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세종이는 입대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효민이가 계속 우는 바람에 분위기는 싸했다.
“ 효민이 회 좋아한다고 했지? 안양 가면 아저씨가 회 사줄게.”
세종이 아버지가 효민이를 달랬다.
“ 그래. 효민아. 그만 울고 기운 차리자.”
나도 거들었다.
“ 오늘, 너희 친구들이 같이 와줘서 얼마나 의지가 됐는지 모른다. 고마웠다. 얘들아.”
세종이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세종이는 우리 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군대에 간 녀석이었다. 그다음이 나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충재에게 날아든 영장에 나의 순번은 뒤로 밀리게 되었다. 안양으로 가는 길에 홍선이도 불렀다. 세종이를 가장 믿고 따르던 녀석이다. 이 녀석도 같이 가고 싶어 했는데 차에 자리가 모자라 같이 갈 수가 없었다.
세종이 부모님은 안양 중앙시장의 한 횟집에서 회 한 사라와 소주 5병을 계산하시고 사라지셨다.
무력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뭐라 할 말도 잊은 듯 술을 마셨다.
“ 그만 침울해 하자. 건강한 대한민국 청년이라면 다 가는 군대잖아.”
“ 그걸 누가 모르냐? 그런데 뭔가 허전하고 벌써 그리운데 어떻게.”
효민이가 말끝을 흐린다. 말끝에 눈물 냄새가 났다.
“ 나중에 충재도 가고 나도 가고 다 갈 텐데. 너 어쩔 라고 그래? 마음 다 잡자.”
효민이는 여자 친구도 별로 없었다. 매번 우리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우리들이 다 군대 가고 없으면 외톨이가 될 것이 불을 보 듯 뻔했다.
“ 그래. 효민아. 익숙해져야지.”
충재도 거들었다. 효민이는 참고 있던 울음이 또 터졌다.
‘그래. 누가 그 마음을 알겠냐?’
헤아릴 수도 느껴보지도 못해 위로 따위도 하지 못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받아 드려야 했다.
‘힘내자. 효민아. 나중에는 다 추억이 될 거야.’
나는 속으로 이 말을 되 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