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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붓을 들 것이다.
작가 : 번트엄버
작품등록일 : 2020.9.29

평범했던 주인공이 한여자를 만나 화가를 꿈꾸며 겪는 인생 스토리 입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화가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기 입니다.

 
44화. 이사.
작성일 : 20-09-29 15:26     조회 : 288     추천 : 2     분량 : 9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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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화. 이사.

 

  이번 겨울은 돔구장이 완공이 되면서 혹한기의 휴업은 피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은식이가 4학년이 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집에서 통학거리가 2시간이 걸리다가 보니 학교 앞에서 친구들하고 자취를 하며 졸업을 준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은식이도 졸업을 준비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렇게 은식이와의 경륜장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다른 알바를 구하지 않았다. 계약기간이 많이 남지 않아서였기도 하고 일이 익숙해져서 굳이 한 명을 구하고 교육시키고 그런 과정 자체가 지난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의 월급은 많이 올랐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이제 학교를 갈 일도 없는 사회인이 되었고 그림 작품을 매일 같이 해야 하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 작업실도 필요했다. 일단은 선생님 화실에 짐을 옮겨놓고 그곳에서 한 동안은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화실로 그간 학교에서 그린 그림을 짊어지고 다시 들어왔다. 그러면서 주현이도 화실로 같이 나와 그림을 그리게 됐다. 그렇게 된 이유가 또 있었는데 어느 날 서울서 일한다는 주현이 오빠가 우리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나타나셨는데 동생이 사귀는 남자 친구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도 찾아온 이유였지만 우리가 사는 작업실을 보고 싶어서 이기도 했다. 소고기를 사주시고 홀연히 떠나셨지만 후폭풍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현이 오빠는 부모님을 모시고 같이 살고 싶어 서울에 집을 얻어서 부모님이 들어오시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셨다. 서울이여서 좋았지만 월세여서 싫다고 하셨다. 서울에서 오랜 셋방살이를 하시다가 평촌 신도시에 자리를 잡고 사신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 제 2의 고향 같은 집과 고장을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불똥은 우리에게 튀었는데 당시 우리 보증금과 형님이 모아 놓은 3000만원으로 인천에 작은 빌라를 사자는 것이었다. 곧 재개발이 예정되어있는 곳이 었는데 아직 소문이 많이 나지 않아 가격은 지금 사기에 적당하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도시 재개발이 논의 되어지는 곳들이 많아 사람들이 너도 나도 부동산 재테크를 한다고 골몰하던 시기였다. 우리도 잘은 몰랐지만 그 재테크 행렬에 합류를 하게 된 것인데 그러면서 눈꼽만큼도 생각해 보지 못한 형님과의 동거가 시작이 된 것이었다. 모든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지게 된 일에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우리 윗 집에는 할머니가 혼자서 사셨는데 옥상을 불법으로 개조를 한 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갑자기 할머니가 안 보이가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서 우리는 할머니의 부재가 우리에게 어떤 재앙이 될지 모르고 잘 생활하고 있었다.

  봄이 오면서 얼었던 얼음이 녹았다. 윗 집 할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할머니가 살던 집 난방수는 보일러를 돌리지 않아 관안에서 얼어 붙어 있었고 봄이 오자 온 돌 밑에 설치된 난방수가 들어있던 관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찢어지게 되었다. 비만 오면 어떻게 빗물이 스며드는지 우리 집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숫대야를 받쳐 놓고 일단, 새는 비가 방안을 흔건하게 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주인에게 상황을 말해보니 윗 집의 문제니까 윗 집 주인에게 가서 따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수소문 끝에 윗 집 주인을 만날 수는 있었지만 그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윗 집에 사시던 할머니는 갑자기 몸이 쇠약해지시며 요양원으로 자식들이 모시게 됐고 갑자기 일어난 일이다 보니 집 주인도 모르게 집은 비워져 있었던 것이었으며 집 주인은 정치에 입문을 하겠다고 전 재산을 전부 날리고 개털인 상황이었고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생활하기에 불편하지도 않은 것이 비가 올 때만 물이 새는 것이었고 봄이라 비가 자주 오긴 했지만 많은 양의 물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 불만 없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형님이 집에 오신 그 날에 물이 떨어지고 있었고 형님은 경악을 했다는 후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은 흘러 인천에 살집이 계약되고 우리도 운 좋게 다른 세입자를 구해 살던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양심에 찔려 천장에서 물이 샌다는 사실을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에게 알렸는데 본인은 집에서 잠만 자면 된다고 괜찮다고 했다. 쿨해도 너무 쿨한 사람이었다.

  서울로 하는 이사는 지난했다. 사다리차를 이용할 수 없는 구조의 옛날 빌라여서 모든 짐을 사람이 지어 날라야 했고 처음 견적을 보신 이삿짐 사장님은 사람과 차가 부족하다며 차 한 대랑 사람 두 명을 더 불러야 된다고 했다.

  그러고도 이사하는 집이 골목이 좁아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사다리차를 다시 접고 잠깐 자리를 피해줘야 하는 상황이어서 난처한 상황은 계속 되었다. 일하시는 분들이 너무 고생을 하니 돈도 돈이지만 진심으로 미안했다. 미안한 만큼 돈을 더 얹어 주었다. 이사는 해가 저물고 나서야 끝이 났다. 대부분의 그림재료에 그간 그린 그림들까지 짐은 점점 늘어 처음 작업실을 차렸을 때의 두 배의 양으로 늘어 있었다.

 

  그 사이 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자가용이 없던 우리는 지각을 해서 졸업식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학사 복을 입고 기념 사진을 찍는 일은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몇 안남은 동기 녀석들과의 사진도 남길 수 있었다.

  돈이 없는 관계로 졸업앨범은 구매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도 졸업이 마냥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졸업을 한다고 바로 취직이 잘 되는 학과도 아니거니와 준비도 미흡한 상황인 친구들이 많았다. 나 역시 뾰족한 수 없이 경륜장 일을 병행하면서 공모전이나 작가 공모를 기웃거리며 기회를 찾는 방법 말고는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른 졸업동기들과는 다르게 같이 일을 해보려는 화랑도 만났고 박 실장님도 내 작품에 많은 응원을 해주시고 계시고 주현이와 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하지만 내 의지하고는 다르게 부모님은 내가 취업하기를 바라셨다. 그림은 취미로 하고 직장생활을 하기를 권하셨다.

  나는 오기가 발동했다. 반드시 그림으로 성공해서 부모님의 생각을 잘못인 것임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의 그림 생존기가 시작되어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청년예술의 힘 전]을 마치고 청년들은 작은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나는 회장이었기 때문에 다음 전시를 기획해 주어야 했다. 그래서 박 실장님에게 의견을 물어보니 부남 미술관 관장님에게 한 번 부탁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34명의 학생들이 전시에 참여 했지만 모두가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 전시 공모를 했다. 전시 기획과 전시 내용 같은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전시를 설명할 수 있는 전시면 된다고 생각하고 의견을 물었다.

  어느 한 회원이 다음에 카페를 만들어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전시 공모도 이 카페를 통해 했다.

  반응은 싸늘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이라도 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주기적으로 작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총무가 정해졌는데 그가 바로 전남대학교 출신의 이승무씨였다.

  승무씨는 나와 동갑이었다. 나는 일에 치여 학교를 3년 휴학 했던 반면, 승무씨는 영국 유학을 갔다 오면서 3년의 공백이 생겼다고 했다. 음악을 좋아했던 승무씨는 영국에서 재즈 작곡을 전공했다고 했다. 재즈하면 미국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공을 하고 왔다고 하니 그저 믿어줄 따름이었다.

  승무씨와는 내가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자주 보게 됐는데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는 나로서는 그 점이 무척 좋았다.

  우리는 동갑이다 보니 친해지는 속도가 무지하게 빨랐다. 성장을 하면서 같은 시간대를 보낸 것 이라는 점이 이렇게 친해지기가 쉬운 조건이라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만화하며 음악, 영화까지 같은 나이에 동시에 접했기 때문에 의사 소통하기가 너무 쉽고 편했다. 그리고 그림을 같이 그리다보니 작업 방향이나 그림 성향 그리고 현재 미술계의 동향 같은 공통의 관심사들이 그를 계속 자주 만나게 했다.

 

  학교를 졸업하는 과정에서 우리 집에는 중요한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엄마가 개인 파산 판결을 받은 것이었다. 2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는데 판결을 받을 때는 주현이와 내가 엄마와 동행해 주었다.

  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은 고통이 많이 따랐다. 그간 채권단에게 받은 수 많은 추심 그리고 협박 이 모든 자료를 증거로 만드는 과정은 지난했다. 25년 넘게 월세를 냈던 사실을 증명해야 했는데 건물주의 아들은 엄마가 월세를 잘 냈다는 인우보증도 서 주지 않았다. 세상이 참 야속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그림을 포기하지 않듯이 엄마는 파산 판결을 받아내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다.

  또 하나의 사건은 큰누나의 출산과 큰 매형의 서울 발령이었다. 첫 조카의 탄생은 부산에서 이루어 졌다. 큰 누나 네가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지내던 전셋집에 부모님이 들어가 살고 있었는데 재건축이 확정이 되면서 갑자기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큰 누나는 아파트 청약을 넣어 당첨이 되어 입주할 아파트가 있었고 안양에 올라오면서 그 집으로 들어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부모님이었는데 전셋집을 얻어야 했는데 돈이 부족했다. 갑자기 처한 상황에 난감했지만 다행히 엄마 아버지가 잘 알고 지내던 보살님이 큰돈을 빌려 주셨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그렇게 부모님은 극적으로 전셋집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졸업을 하면서 두 차례 받은 학자금 대출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종중 땅이 팔리면서 나온 돈들을 자자손손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있었는데 내 몫으로 들어온 돈은 학자금 대출을 갚을 수 있기에 충분했다. 조상도 내가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을 주시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우리가족들은 닥친 위기를 잘 극복을 하고 자신의 일상에서 다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작은 누나는 가베 선생님 자격증을 따서 학생들의 집을 방문해서 교육을 하는 방문교사로 그 사이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의 수학적 두뇌를 발전시켜주는 블록을 쌓는 방식의 교육인데 학부모들 사이에서 제법 소문이 나서 나름 돈을 잘 벌고 있었다. 오뚜기 식품에 다니는 나와 동갑내기와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나름 결혼까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안양과 산본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주중에는 안양 화실에서 작업을 하고 주말에는 경륜장에서 알바를 했다. 주말 같은 경우에는 내가 일을 하니까 주현이 혼자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내가 일을 마칠때쯤 산본역 안에서 만나 같이 집으로 향하기를 반복했다.

  청년 작가들과의 교류에서는 영국의 YBA같이 우리 단체의 명칭도 KYA라는 명칭을 만들어서 활동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영국의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일컬어 YBA라고 하는데 YOUNG BRITISH ARTIST를 줄인 말이라면 우리는 KOREA YOUNG ARTIST를 줄여서 KYA라고 명명하자는 것이었다. 영국의 경우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각 대학을 대표해서 나왔다는 자부심에 제 1회라는 자부심이 더해진 작명이었다.

  전시 준비도 잘 되어가고 있었다. 한 회원이 제안한 전시 제목은 [REMAKE CAN 展 ]이었는데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뜻으로 헤이해진 작가들의 결속을 다지고 다시금 출발하자는 의미였다. 회원들에게 공모를 했을 때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 안건이었기에 채택을 했다.

  여럿이 모여서 전시를 한다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작품이야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일단 전시장을 대관을 해야 하고 도록을 제작해야 하며 제작한 도록을 되도록 각지에 있는 대학교와 미술관 주요 갤러리까지 발송을 해야 하고 오프닝 행사와 저녁 식사 그리고 간단한 뒤풀이까지 준비해야 되는데 해야 할 일이 졸업 전시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같은 학교도 작업장도 서로 다른 작가들을 의지를 모으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선 부남미술관에서 대관은 무료로 해주시기로 했다. 비용적인 부분에서 가장 큰 부분이 해결이 된 것이었다. 박 실장님에게 물었더니 부남 미술관 관장님께 말씀을 잘 해주어 대관을 할 수 있었는데 단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내 그림을 한 점 기증하는 것이었다. 그냥 그림을 가져가는 것이 미안했는지 이사님이 50만원을 챙겨주신다고 했다, 부남 미술관 정도의 갤러리를 대관하려면 250만 원 정도 비용이 소요되는 문제였는데 내 그림 한 점으로 퉁치자는 제안은 나름 달콤했다.

  그리고 다르게 들어갈 부대비용은 참여하는 작가들에게 예상되는 비용만큼 N분의 1로 계산을 해서 걷었는데 이 역할을 총무인 승무씨가 맡았다. 참여 작가는 15명 정도로 작년에 비해 절반 이상으로 줄어 있었는데 그래도 나름 의지들이 뻗쳤다. 다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들이었는데 나와 승무. 그리고 영규 정도만 대학원 진학을 하지 않았다.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준비 기간이 짧다보니 전시와 같이 일을 보는 일이 피곤해 보였다.

  이번 작품전에는 작품 사이즈를 작게 해서 지하철로 옮길 수 있었다. 나름 공모전 생각도 있는 작품들도 있어서 액자도 제작했다. 작가의 길로 한 발 한 발 나가는 것 같았다.

  지인들만 불러 오프닝 행사를 했지만 역시 경험이 일천해서인지 사람들이 많이 오지는 않았다. 공을 많이 들인 것에 비해 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비용만 드는 전시를 계속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회 전시 때는 언론에서도 조명을 하고 해서 나름 야심차게 2회전시를 준비했는데 홍보에 실패한 느낌이었다.

 

  전시 마지막 날 그림을 찾으러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시장 이사님이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누가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며 사고 싶다는 것이 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는 부랴부랴 전시장으로 향했다. 전시장에 들어서 보니 이사님이 조급한 표정으로 나를 반기셨다. 그림을 사고 싶다는 사람은 응접실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님을 따라 응접실에 들어가서 앉았다.

  “ 유주민 작가님이 십니까?”

  “ 네. 제가 유주민입니다.”

  “ 반갑습니다. 저는 작게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민씨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사려고 하는데 괜찮습니까?”

  “ 네. 그림을 구매하신다면 영광이죠. 어떤 작품을 좋게 보셨어요?”

  그가 원하는 작품은 이번 소사벌 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었다. 다른 작품을 샀으면 했는데 소신은 완고했다. 그리고 그림을 한 점 더 사고 싶다고 했는데 전시 후에 부남미술관에서 나에게 50만원을 주고 산 그림을 원했다. 그리고는 자신은 그림을 많이 사봤다며 내 그림 값은 호당 3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을 이어갔다. 당시만 해도 작품 판매를 통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거의 가져 본적도 없었고 내 그림을 그렇게 사고 싶다고 하니 말하는 조건을 모두 들어주고 싶었다. 그림을 가지고 협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분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가 산다는 그림중 하나는 이미 부남 미술관에 소유였던 사실을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 그림의 대금은 부남 미술관의 소유 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그림에 판매 대금도 미술관과 내가 5:5로 나누어 갖게 되는 사실도 잘 몰랐을 것이다. 고로 300만원을 주고 그림을 두 점을 샀더라도 전에 그림 값으로 이미 받은 50만원에 한 점 가격 150만원의 절반 즉, 75만만 내가 손에 쥐는 것이었다. 이것이 갤러리와 작가 간에 공생의 관계라는 사실 또한 잘 몰랐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승무가 옆에서 지켜 보았다. 그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 주민씨. 저 사람 재벌은 아닌 거 같은데?”

  “ 그래요? 작게 개인 사업한다고 하시던데.”

  “ 개인 사업하는 사람이 그림을 사다니 신기하네요.”

  “ 성공한 벤처 사업가 그런 분 아닐까요? 미술품을 좋아하는.”

  “ 아무튼 우리는 내 그림 옮기고 주민씨 그림도 팔리고 했으니까 내가 축하하는 마음으로 소고기 쏠테니 오늘 술 한 잔 합시다. 참.주현씨도 불러요.”

  실은 내가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승무와 빠르게 친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주로 인사동 일대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나중에 알았는데 승무는 기혼자였다. 초등학교 때 옆집에 사는 여자사람 친구와 절친 이었는데 부모님들끼리 커서 결혼을 시키자고 약속을 한 것이 실행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정략결혼 같은 것이었다.

  평창동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승무는 집이 잘 산다. 그러다 보니 친척들 중에 재벌가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옛날에 경상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자가 승무 할아버지였다고 하니 나로 써는 감이 안 오는 부분이다. 승무 아버지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미술품 수집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문화재급으로 보이는 작품들도 많았는데 보존과 관리를 이제는 승무가 해야 할 몫이였다.

  주머니사정이 나보다 승무가 넉넉하다 보니 술을 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우리는 선술집에서 술 잔을 기울이는 걸 좋아했다.

  전화 통화가 자주 오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상무의 장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여서 그런지 장인과의 사이는 눈에 띄게 돈독해 보였다. 상무가 너무 말라서 건강 걱정을 많이 하시는지 산해진미에 한약에 몸이 축나지 않기 위해 많은 애를 쓰시는 것처럼 보였다. 손자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 같았는데 맨날 나를 만나 술만 마시니 어쩌면 내가 거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승무의 장인은 부동산 재벌이라고 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도 부동산 투자도 하신다고 하니 내가 짐작을 할 수 없는 분이셨다. 처남이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딸과 사위다 보니 애지중지 하셨다. 승무의 부인도 미술을 전공해서 물감과 학용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디자인 팀장이라고 했다. 사회 생활을 우리에 비하면 굉장히 일찍 시작한 편이었다. 그래서 도록을 만들 때 궁금한 점이 있으면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하는 모습을 자주 봤는데 어렸을 때부터 친구여서 그런가 말투는 마치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무의 차로 상무의 그림을 옮기는 일을 도와 주었다. 내 그림은 다 팔렸기 때문에 옮기고 자시고 할 일이 없어진 셈이었다. 주현이에게도 그림이 팔렸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녀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승무와의 약속이 있다고 나오라고 했는데 지금 그림을 많이 건드려놔서 정리를 해야 하니 둘이 같이 먹으라고 했다.

  “ 주현씨 못 나온대요?”

  “ 네 그렇다 네요. 정리하는 대만 몇 시간 걸린다고 하네요.”

  “ 그럼 어쩔 수 없죠. 주현씨도 안 나오는데 소고기는 과하고 피맛골 고갈비 집이나 갑시다.”

  이 피맛골 고 갈비 집은 학교 다닐 때 성범이 형과도 자주 오던 곳이다. 고갈비의 맛도 맛이지만 생 막걸리의 맛이 일품이다. 딱 얼기 직전 같이 느껴지는 시원한 막걸리의 온도와 매콤하면서 고소한 고갈비의 조합이 일품이다. 이 가게의 특징은 들어와서 주문을 따로 하지 않으면 그냥 고갈비와 막걸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오는 손님이나 내어주는 주인이나 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 굳이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조합을 먹기 위함이라는 것을 가게 주인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석쇠에 구워져 나오는 고갈비는 고등어의 특유의 비린 맛을 잘 잡았다. 적당한 온도에 잘 구워진 고 갈비는 막걸리를 부르는 맛이다. 살짝 비릿한 느낌에 고갈비와 막걸리의 신맛과 어우러지는 그 맛과 궁합은 더할 나위 없이 일품이다. 나는 이 맛에 이끌려 인사동에 나오는 날이면 일행들과 이곳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은 예전부터 가난한 예술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예술을 논하며 우정을 길렀던 장소이다.

  승무와 발걸음을 옮긴다. 피맛골로 향한다. 오늘은 생각지도 못하게 그림도 팔고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은날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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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42화. 4학년. 2020 / 9 / 29 307 2 13231   
41 41화. 중국집. 2020 / 9 / 29 298 1 7374   
40 40화. 반갑다. 은식아. 2020 / 9 / 29 292 2 5263   
39 39화. 경륜장 알바. 2020 / 9 / 29 319 2 8130   
38 38화. 또 다시. 작품을 하라. 2020 / 9 / 29 310 2 13604   
37 37화. 학교생활. 2020 / 9 / 29 301 2 3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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