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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붓을 들 것이다.
작가 : 번트엄버
작품등록일 : 2020.9.29

평범했던 주인공이 한여자를 만나 화가를 꿈꾸며 겪는 인생 스토리 입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화가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기 입니다.

 
42화. 4학년.
작성일 : 20-09-29 15:21     조회 : 299     추천 : 2     분량 : 1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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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화. 졸업.

 

  나는 다시 경륜장으로 복귀했다. 3주라는 시간은 나에게 긴 시간이었다. 하루 꼬박 13시간의 노동은 나를 더욱 부지런하게 만들어 주었다.

  3 주 쉬는 동안 경륜장 매점에는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던 냉장고 전원이 꺼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 바람에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버린 것이었다. 사모님은 이런 어의없는 일을 겪으실 때마다 의연하게 대처하시는 편이셨는데 이번 일에는 조금 많이 당황하셨다.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다행히 재 개장 전 날에 모여 확인했기에 망정이지 일하는 날 나와서 처음 알았다면 장사를 망칠 뻔 한 일이었다. 일일이 봉투를 까서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큰 통에 담아내고 나머지 껍데기와 나무 바를 타는 쓰레기 봉투에 담았다. 한참을 해야 일을 다 마칠 수 있었다. 그 사이 우동 재료를 납품하는 사장님도 왔다가 가셨고 물도 채우고 자판기도 한 바퀴 돌면서 상태를 점검했다. 이렇게 다시 일할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간에 도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광명에 돔구장을 짓고 있는데 이것이 완공이 되면 이번 겨울 같이 쉬는 기간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모님과의 계약이 내년 6월까지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곳에 들어오는 것은 공개 입찰이지만 힘 있는 사람이 뒤를 봐주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상황이 닥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할 문제였다.

  길었던 겨울 방학도 끝이 났다. 드디어 나는 4학년이 되었다. 3년의 휴학과 군대 2년 그리고 중간 중간 뜬 시간까지 해서 나는 거의 10년 만에 졸업을 하는 것이었다. 졸업 사진을 찍으니까 졸업을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앨범이 비싸서 살지 안 살지 모르지만 실감 만큼은 났다.

  교양 수업을 거의 다 마친 나는 제2 외국어를 한 과목만 들으면 모두 듣는 것이었는데 졸업전시등 모든 것이 끝나고 4학년 2학기 때 들을 참이었다. 성적 장학금을 두 번 타면서 다음 학기 때 3학점을 더 들을 수 있는 혜택 덕분에 학점에 여유가 있던 지라 이번 학기는 전공만 들어도 되는 정도였다.

  다른 녀석들에 비해 작품을 미리 해 놓은 탓에 나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았다. 다른 작품들을 하며 공모전에 집중 할 수 있었다. 일단, 봄에 열리는 경기미술대전에 낼 그림을 보름 만에 완성 했다. 공모전 결과는 다소 아쉬운 입선이었다. 교수님이 내라고 해서 낸 거여서 아쉬움이 더했다. 열심히 준비한 탓에 공모전에 낸 그림까지 졸업 작품 심사를 받을 수 있었는데 다른 녀석들보다 완성도가 높아서 내 작품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교수님들은 거의 없었다.

  졸업 전시에 낼 작품들이 결정이 되면 작품 사진을 촬영해서 도록을 만드는 업체에 넘기는 과정이 필요한데 아직 어느 업체도 선정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학생들을 모아 회의를 열어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었는데 의외로 다른 학생들은 모든 권한을 졸준위에 위임을 해줬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졸업을 한 선배들 역시 계속 선배들이 해왔던 대로 그냥 관행대로 일을 봐왔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수원에서 작품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 작가는 많지가 않았다. 수소문 끝에 남문 쪽에서 사진관을 하는 작가를 섭외할 수 있게 됐는데 장당 15000원을 요구했다. 다른 곳에 비하면 조금 비싼 가격이었는데 이곳과 계약을 했다. 다른 곳과 다르게 필름 카메라로 찍어서 스냅사진 필름을 모두 제공하기로 해서 그 지점이 마음에 들었다. 디지털 카메라가 갑자기 빠르게 보급이 되면서 대부분 디지털 카메라를 선호했는데 이 작가님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이제 도록 제작업체를 선정해야 했는데 교수님에게 자문을 얻으러 갔더니 명함을 하나 주셨다. 우리 학교 2회 졸업생이 운영하는 디자인 사무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약속을 잡고 만나 보기로 했다. 매번 맡기던 곳이 있었지만 퀄리티의 문제와 가격의 문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업체를 만나기로 해본 것 이었다.

  졸준위를 한 사람은 모든 일을 다 치루고 나면 자동차를 한 대 뽑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정도로 남겨 먹을 수 있는 돈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소문일 뿐이고 나는 공정하게 잘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졸준위는 작년과 비교를 해봐도 개인당 20만원을 적게 걷었다. 그 정도의 예산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T.O가 열 명이나 느는 바람에 예산이 더 모이기도 했다.

 

  2회 선배를 교수님과 졸준위 부위원장 미미와 함께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돌아왔다. 처음 뵈는 선배님은 생각 보다 호탕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이동수라는 선배님이었는데 김 교수님과는 동기였다. 교수님이 재수를 해서 동수 선배 보다는 한 살 많았다.

  “ 반가워요. 주민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 저도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작품 좋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 저는 지금 경기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석사 과정에 있어서 학교 매주 가니까 한 번 작업장에 들러도 될까요?”

  “ 네.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주말에 알바를 하니까 그때만 피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제 작업장은 복도 끝이라 언제든지 개방이 되어 있어요.”

  “ 자 선 후배 사이니까 편하게 이야기 잘 하라고.”

  교수님은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뜨셨다.

  동수 선배는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장애가 있는 사람치고 구김살 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화실 선생님 생각이 났다.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일반인과 매번 경쟁을 해야 하는 외로운 인생길. 그 길을 비슷하게 걸어온 사람 같이 보였다.

  모든 조건과 가격을 제시하면 어떻게든 조건에 맞게 조율해 보자고 제안을 하셨다. 작년 졸업생들은 도록을 만드는데 1100만원 들었다는 말씀 드리면서 나는 일 년 전 도록을 보여 드렸다.

  “ 제작업체가 많이 먹은 거 같은데. 종이도 그렇게 좋은 거 쓴 건 아니 구만.”

  “ 그래요? 이쪽에 지식이 미천해서 저희는 잘 모르죠. 근데 비싸다는 생각은 했어요.”

  “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그렇고 나중에 시간 될 때 우리 사무실 한 번 와요. 겉지 와 속지 다 골라야 하고 단가랑 비교해서 값을 산출해야 하니까.”

  뭔가 모르게 전문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냥 종이를 보고 만지기만 했는데 종이의 종류와 원가를 아는 모습이 믿음이 갔다.

  “ 종이가 워낙 다양하니까 와서 꼭 골라야 해요.”

  식사를 하는 자리는 술자리로 바뀌었다. 미미는 학원에 간다며 일어났고 동수 선배랑 나는 술을 마시며 작품이야기며 인생 이야기를 했다.

  “ 주민이 말을 듣다 보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네.”

 1회 선배님인데 나와 이름도 비슷했다. 교수님들한테 개기고 시위에 앞장섰던 기가 굉장했다던 선배라고 했다. 지금은 붓을 내려놓고 택배기사를 한다는 선배님과 전화통화를 시켜 주었다.

  “ 아이고. 반가워요. 학부생인데 개인전도 하고 작품도 좋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 인사동에서 전시도 조만간에 한다면서요? 축하해요.”

  “ 네. 운 좋게 그렇게 됐네요.”

  인사동에서 잡지발행을 하는 편집장과 인사동에 위치한 갤러리 관장들의 도모한 일이었는데 우리나라 각 미대에 공문을 보내 교수님이 선발한 1명들을 모아 전시를 하는 행사가 있었다. 우리학교 같은 경우는 내가 선발이 되었는데 내가 나이가 많아서였는지 일을 추진한 실장님은 나에게 회장직함을 주셨다. 이름 하여 ‘대한민국 청년 예술의 힘’이라는 전시가 올해에 열릴 계획이었다.

  “ 그리고 무슨 공모전에서 대상도 받았다면서요. 축하해요.”

  작년에 내서 입선을 했던 세계평화 미술대전에서 비구상 부분에서 얼마 전에 대상을 받았다. 뛸 듯이 기쁜 일 이었다. 3학년 여름방학 때 식음을 전패하고 그렸던 그림이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고된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상금이 크진 않았지만 그 상금으로 친구들과 회포도 풀었다. 누구 보다 주현이가 기뻐해주었다. 나는 기뻐해주는 주현이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더 좋은 성과로 우리의 미래에 밝은 빛을 드리워 줄게 라고.

  “ 네. 운이 좋았습니다.”

  “ 운칠기삼 이라고 했어요. 운도 실력이야. 아무튼 반가웠고 고마워요. 훌륭한 화가가 돼서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줘요. 나 같이 되지 말고.”

  “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님도 저희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주신 선배님입니다. 동수 선배한테 다 들었어요. 미대 재학시절 누구 보다 뜨거운 사람이었다는 것을요.”

  “ 언제 쩍 얘기에요? 아무튼 동수나 바꿔줘요.”

  1회 선배님하고의 대화는 그렇게 끝 이 났다. 진귀한 경험이었다. 선배님들과의 조우가 처음인 나로서는 신기한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휴학과 띄엄띄엄 학교를 다니다 보니 동기들 과도 서먹한 사이였던 나였다. 보이지는 않지만 같은 동문이라는 이유로 엮여진 끈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동수 선배하고는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는데 시간이 늦었다며 택시를 타고 가라고 택시비를 주셨다. 급구 사양을 했지만 본인이 잡아서 이렇게 늦어 진 거라며 택시비를 택시기사님에게 주셨다. 그래서 편하게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며칠 이 지났다. 임 교수님이 호출을 해서 연구실로 찾아 뵈었는데 레지던스 이사라는 사람이 조금 있다가 온다는 것이었다.

  “ 주민이 네가 만나서 이야기를 잘 해봐.”

  “ 그러니까 그림을 사고 싶은데 연결을 잘 해달라는 거죠.”

  “ 주민이 너 전화번호 알려 줬으니까 아마 전화가 직접 갈 거야.”

  임 교수님은 작년부터 학과장에 취임하신 후로 그 전과는 다르게 학생들과 소통도 많이 하시고 활발한 대내외 활동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계셨다.

  “ 너한테 다 일임한다고 했으니까 일 잘보고. 알았지?”

  대화를 마치고 커피를 한 잔 하면서 담배를 피우려고 9 강의 동 로비에 있는 자판기로 간다. 참, 성범이 형과 많이도 뽑아 마신 자판기 커피. 이제 이 녀석과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커피를 뽑아 현관에 나서는데 날씨가 참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좋은 날씨였다. 학기도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 학교에는 졸업 전시 심사에 통과하지 못한 녀석들만 남아서 작품에 매진하고 있었다. 나도 상황이 되는대로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어서 일을 하는 날 말고는 학교에 매일 같이 나와 작품에 매진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받아 보니 그 이사님이었다. 조금 전에 외제차가 한 대 들어오는 것을 봤었는데 그 차의 주인인 듯 싶었다.

  “ 유주민 학생 핸드폰 맞습니까?”‘

  “ 네. 제가 유주민입니다”

  “ 교수님이 이 번호를 알려 주셨거든요.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어요?”

  “ 안 그래도 지금 로비 앞에 나와 있습니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이사님은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 저희 래지던스는 외국인들이 장기 내지는 단기로 머무는 곳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림 때문에 컴플레인이 많이 들어와서요.”

  “ 무슨 불만들이 그렇게 많은 건데요.”

  “ 출력된 그림들을 걸어놨다고 자기네들 문화 수준을 무시한다고 아주 난리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성 작가 작품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삼각지 그림도 싫어해서 사다가 걸 수도 없습니다.”

  작품 값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으신 이사님에게 작품 값이 매겨 지는 개념에 대해서 조금 설명 드려야 했다. 통상 미대를 졸업한 작가들의 작품가는 호당 5 만 원 정도다. 큰 상을 받거나 대학원에 진학을 하거나 유학을 갔다 오거나 통상 커리어가 올라가면 그에 따라 그림 값이 올라가는데 개인차가 심해서 나중에는 그저 부르는 게 값이 된다. 기준이 있다면 국전 기준으로 특선이면 10만원 대상이면 30만 원 정도 받는 것이 통상 적인 기준이다.

  “잘 좀 부탁 드립니다. 25점에서 30점정도 필요한데. 예산은 250 만 원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레지던스가 방이 그리 크지는 않죠?”

  “ 그렇습니다. 원룸 만 한 크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그러면 그렇게 큰 그림도 필요하지 않겠네요.”

  “ 그렇죠. 큰 그림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통상 학부졸업생들의 가격은 호당 5만 원 정도 하는데 공모전 수상 경력과 전시 경력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그림 값이 올라가지만 학부생들은 아직 학생이기 때문에 그림 값을 많이 받을 수는 없다.

  “ 그러시면 호당 5만원으로 해서 2호짜리로 25점으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액자 비는 저희가 부담하는 것으로 하죠. 1호 크기가 엽서 정도의 크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2호는 그것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액자, 마트에다가 프레임까지 들어가면 아마도 적당한 크기가 될 것입니다. 시간은 열흘 정도 주시지요. 그림 제작하고 말리고 액자 하는 시간까지 그 정도는 걸립니다.”

  “ 정말요? 고맙습니다. 거절당하지 않을까 걱정 많이 하고 왔는데 고맙습니다.”

  실은 수원대에 갔다가 망신만 당하고 왔다고 말하셨다. 내가 중간에서 조율을 잘 해준 거 같다면서 고맙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는데 일단, 나는 선수금으로 50프로를 달라고 요구를 했다. 왁구에 재료비에 액자 공장도 알아봐야 하고 돈이 들어갈 일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후배 녀석들을 섭외를 했다. 손이 적당히 빠르면서 각자의 스타일들이 있는 녀석들로 말이다. 하다 보니 다 남자 후배 들이 됐는데 액자 공장을 알아보고 계약하는 일은 후배 녀석들에게 맡겼다.

  다섯 명이서 다섯 점씩 그리고 50만원씩 가져가면 될일 이었다. 여기서 n분의 일로 액자 비는 내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쉽게 작업하기 위해 비구상 작품을 했다. 오공 본드와 핸디코트를 섞어 두꺼운 질감을 낸 화면에 밝은 배경색을 입히고 물방울이 맺힌 나뭇 잎을 그려 주었다. 각자의 개성에 맞게 그려진 그림들은 다양해서 넘겨줄 때 기분이 좋았다. 액자도 적당한 가격에 할 수 있어서 개인당 40 만 원 정도 씩 가져 갈 수 있었다. 열흘 동안 그림을 그려 받은 돈치고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이렇게도 팔 수 있구나. 라는 교훈을 남겼다.

  그렇게 학기는 끝나고 또 방학이 찾아 왔다. 4학년 1학기는 그림만 그리다가 끝난 학기가 됐다. 대상도 받고 인사동 화랑에 캐스팅도 되고 좋은 일들이 많았다. 대중들이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이 많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여서 졸업과 동시에 작가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되는 시기였다. 경매시장에서는 연신 최고가 기록이 쓰여 지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젊은 작가의 비중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림을 매일 같이 열심히 안 할 수가 없는 시기였다. 물론 경륜장일도 게을리 하진 않았다. 사모님 딸도 어느 덧 입시생이 되어 죽음의 특강을 보내고 있었다. 시각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녀석은 부쩍 실기도 많이 늘어 있었다.

  사모님을 통해 고액 과외 자리가 하나 들어왔었는데 한국예술 종합학교를 희망하는 친구여서 내가 맡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학교에서 만난 성민이 형한테 연결해 주었다.

  셩민이 형은 졸업을 한 후, 내가 일했던 설비 일을 넉 달 하다가 일을 쉬고 있어서 나름 타이밍이 좋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최종 면접에서 너무 솔직하게 말을 하는 바람에 떨어진 경험이 있는 형은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입시생에게 도움을 주기에 적당했다.

 

  순조롭게 보내던 일상이었는데 사건이 하나 터졌다. 우동을 파시는 아주머니 남편이 감기 몸살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는데 알고 보니 간암 말기였고 3일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아주머니 남편은 사업을 하셨는데 평소에 술과 담배는 일절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하셨었다. 업무 스트레스가 암의 원인이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주머니 아들 둘은 둘 다 군대에 가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아주머니도 경황이 없어 보였다. 나와 은식이는 일하는 곳에 메여 있어서 문상을 가지는 못했다. 사모님과 사장님만 갔다 오셨는데 하필 일을 하는 3일 동안에 상이 치러졌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아주머니는 할 일은 많아 지셨다. 공장을 정리하고 밀린 직원들의 월급을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아주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아주머니의 경륜장의 공백을 매워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눈앞이 깜깜했다. 일단, 아주머니의 복귀를 예상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아주머니를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취사반 경험이 있는 은식이가 우동을 맡아서 팔기로 했다. 자판기일은 내가 전담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적당히 카운터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머릿속에 번뜩하고 남원이가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녀석과 통화를 했는데 임상실험 알바를 했다고 녀석은 나에게 고백을 했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학교를 다니는 과정에서 엄마가 김밥 집을 차리셨는데 갑자기 김밥집이 망하는 일을 겪은 녀석은 좋아하던 음악도 접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평범한 4학년의 모습이었다. 이 녀석 역시 휴학과 복학을 반복 하다보니 나하고 같은 학년이었다. 학과 수업을 다 마친 녀석이어서 잠깐 도움을 주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해 연락을 했다.

  “ 남원아. 잘 지내지?”

  “ 잘 지내지. 요즘 취업한다고 토익 공부하는데 안 하다가 하니까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힘드네.”

  “ 너 돈은 필요하지 않냐?”

  “ 돈은 언제나 필요하지.”

  “ 그래서 말인데. 너 내가 일하는 경륜장에서 며칠만 알바 안 할래?”

  “ 며칠? 며칠이면 되는데?”

  “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여기 일하시던 아주머니가 남편 상을 당하셔서 말이야.”

  “ 그럼 상 치르는 동안만 하면 되는 거 아냐?”

  “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다. 남편 사업체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거 같더라고.”

  “ 그렇게 오래하지만 않는 다면 내가 할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금, 토, 일 3일만 하는 거니까 공부하는데 그렇게 방해되지도 않을 거고. 책 가지고 와서 봐도 돼.”

  “ 그럼. 한 번 해볼까?”

  남원이는 전에 화실에서 은식이 와도 한 번 본적이 있어서 불편한 사이도 아니었다. 나로서는 남원이가 와서 일해주면 딱 이었다.

 

  생각보다 남원이는 일에 잘 적응해 주었다. 하지만 녀석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다른 것이 아니라 엄마가 하던 일이 망해서 남원이네 엄마도 개인 파산을 알아보고 계셨는데 그 과정에서 부모님이 이혼하시는 일이 생겼다. 녀석이 언젠가 어렸을 때를 회상하며 말을 해 준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사업이 망하기 전까지는 금호동에 살면서 마당이 있는 2층집에 굉장히 부자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저와 누나는 어렸을 때부터 악기를 쉽게 접 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부유했던 녀석이 현재 처해져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 안타까웠다. 꿈을 접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현실 앞에 음악 평론가가 꿈이라며 반짝이던 눈빛은 이제 그만 초점을 잃어 있었다. 나는 다시 녀석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 남원아. 내가 그림을 포기 하지 않듯이 너도 음악을 포기하지 마.”

  카운터 뒤 에서서 멍하니 서 있는 남원이에게 내가 말했다.

  “ 포기 안 해 인마. 걱정 하지 마. 하지만 일단, 취직은 해야지.”

  “ 그래. 지금은 힘들지 몰라도 나중에 열매는 달콤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예술을 하는 삶이 죄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림쟁이나 딴따라나 주변에 누구하나 성공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 또한 없었다. 그런 무모한 길을 우리는 가고 있는 것이다.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서 힘들지만 꿈을 꿀 수 없는 것 자체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더 지옥과 같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그 길을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방학 기간에도 학교를 나가 그림을 그려야 했다. 졸업전시 작품은 다 완성이 되었지만 공모전과 내년에 있을 작가 공모를 준비해야 할 작품 등 구상했던 작품들을 계속해서 그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여름이라 무더운 날씨에 스쿨버스도 다니지 않는 학교 언덕을 오르내리는 일이 제일 고역이었다. 그나마 같이 그림을 그리는 승완이가 매일 매일 꼬박 꼬박 나와 주어 같이 도시락도 먹고 맥주도 한 잔하며 그 동안 친해지지 못했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외롭지 않은 시간이었다.

  녀석은 입시미술학원 강사를 하다가 졸업반이 되면서 학원을 그만 두었다. 승완이는 결혼식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부인과 자식이 딸린 유부남이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던 녀석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말을 하던 녀석의 표정은 어느새 굳어 있었다.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아는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나이 어린 부인이 애를 데리고 친정집으로 갔다며 맥주를 마시다가 말고 눈물을 쏟는 녀석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는 사뭇 당황을 했지만 녀석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위로를 해줬다. 그러면서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거라면서 졸업전시 그림만 통과되면 지방으로 내려가서 노가다라도 뛰며 일 할 거라고 말을 했다. 아버지 아시는 분 중에 대학 졸업장 들고 오면 현장 소장시켜준다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지방에서 일해서 잘은 못 올라오겠지만 월 300벌이를 하며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녀석은 마음을 다 잡은 것처럼 보였다.

  녀석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내 눈에는 피눈물로 보였다. 언제나 선한 마음과 표정으로 매사를 대했던 녀석이 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녀석이 졸업 후에도 그림을 그리기를 바란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해 보였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사는 녀석이었는데 앞으로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길이 훤히 보였다. 나 역시 설비 일을 하며 여러 현장을 전전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래 보였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던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도피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녀석을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보면 네 옆에 부인과 자식이 다가와 있을 것이라고 녀석을 위로해 주었다.

 

  예상보다 아주머니의 복귀는 요원해 보였다. 사모님과 자주 연락을 하시는 모양이었는데 공장을 정리하고 체불된 임금도 지급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변호사를 사서 일을 보고 계셨다. 아들 중 누구라도 같이 일을 헤쳐나 갈 수 있었다면 큰 힘이 됐을 텐데 군대에 있는 아들들은 별 다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상황이 그렇다가 보니 남원이의 도움을 더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계속 부탁을 하기에도 상황이 애매했다. 녀석은 정식으로 직장에 취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잡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남원이는 취직이 되었다. 안산에 있는 무역회사였는데 영어가 전공인 남원이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얼마 전에 선생님 화실에 갔었을 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다니는 것을 봤는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경제학과 4학년인데 휴학을 하고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림을 전공해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녀석이었다. 영국 어학연수까지 다녀와서 다른 친구들보다 학교를 오래 다니게 된 녀석인데 입시를 다시 해서 미대를 간다니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림 실력을 보니 표현력은 좋았지만 실력은 미천했다. 그래서 그날 기본기를 보여주면서 입시를 할 거 같으면 반드시 입시 학원에 가라고 조언을 해 주었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은선이다. 이 녀석은 담배를 피우는데 담배 필 때 보면 세상의 시름을 다 본인의 어깨위에 올려놓은 것 같아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24세라는 나이에 다시 진로를 고민할 수는 있다. 본인의 끼와 재능을 뒤늦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은 부모님이나 타인의 입맛에 맞춰왔기 때문 일수도 있다.

  녀석의 고민은 2주 정도 갔다. 다행히 친구 아버지께서 투자를 해주신다고 해서 입시미술학원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녀석도 생활비에 용돈도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락을 해봤다. 토요일 오후하고 일요일에만 가능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녀석도 입시를 준비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자리를 비운 비상체제에서 어떻게든 단기 인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매일 매일의 상황을 넘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극적이었던 사모님도 예전보다는 더 일을 하는데 적극적으로 바뀌셨고 은식이도 어느 덧 우동과 짜장을 파는 일에 익숙해졌다. 온전히 자판기는 내 몫이 되어 있었고 그리고 피크 타임에 와서 일해 주는 은선이 역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3 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아주머니는 돌아 오셨다. 극적인 귀환이었다. 여름 방학을 맞아 특강에 들어가는 미술학원의 수업 때문에 은선이가 더 이상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완전체가 되었다. 아주머니가 오셔서 다시 본인의 위치에서 일을 해주시니 모든 것이 수월했다.

  오랜만에 회식을 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활어 회를 좋아해서 언제나 회식 메뉴는 회가 된지 오래다.

  가까운 횟집에서 간단하게 소주를 마시며 회식을 한다. 회 한 접시와 매운탕까지 먹고 나면 아주머니와 사모님은 집으로 들어 가신다. 집에 가서 집안 일도 해야 하고 사모님은 자식들도 챙겨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0 만 원 정도 회식비를 주고 가신다. 그러면 우리는 맥주도 한 잔하고 노래방도 가고 늦게 까지 놀다가 들어간다. 주로 차가 끊긴 상황이기 때문에 오늘 같이 회식이 있는 날이면 은식이는 우리 작업실에서 자고 내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간다. 얼마 만에 평화로운 날인지 모르겠다 싶었다. 평일에는 학교에 가서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없고 주말이면 빡빡하게 일을 하느라 또한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집에서 늘어지게 밀린 잠이나 자야겠다.

 

  4학년 2학기 개학을 하고 두 달 정도 지나고 나면 나는 졸업 전시를 한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 청년예술의 힘’이라는 전시도 준비되어 있어 그 전시 또한 준비해야 한다. 인사동에 위치한 11개 갤러리가 참여한 전시인데 전시가 끝나고 나면 갤러리에서 전시를 지원 할 작가를 선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어떻게 보면 졸업전시 보다 나에게는 더 중요한 전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보니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 중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작품을 한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변변한 카메라가 없어 학교 친구한테 부탁을 했는데 이 녀석도 카메라를 장만한지 얼마 되지 않아 매뉴얼을 잘 모른다고 했다. 전에 졸업 작품 사진을 찍을 때 사진작가님한테 작품 사진 잘 찍는 법을 물어 본적이 있었는데 날 밝은 날에 그늘에서 찍는 것이 제일 좋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실행에 옮겼다. 해가 좋은 날에 그늘이 좋은 곳에 작품을 옮겨 놓고 그간 그린 그림들을 모두 사진에 담았다. 디지털 카메라가 좋은 게 찍은 사진을 바로 바로 화면을 통해 볼 수 있는 점이다. 모두 꼼꼼하게 확인하고 사진 인화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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