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그러는 걸까.
유란이 손잡이 돌리니 전처럼 문이 열려있다.
그렇게 완벽하게 주의를 요하는 상황인데도 이 의사의
지하실은 누군가를 기다리듯 문틈이 벌어져 있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훔쳐봐 주기를 바라는 건지..
갑자기 이 의사에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유란이다.
빠르게 주위를 살핀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잔잔하게 들리는 음악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유란의 귓가를 스친다.
갑자기 짙은 피 냄새가 유란의 코끝을 스치며 그녀의 눈을
빨갛게 물들인다.
자신도 모르게 거칠어지는 유란의 숨소리다.
“뭐야..”
냄새를 쫒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유란이다.
한 남자의 시체가 수술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잔인하게
죽어있다.
환히 보이는 그 남자의 적출된 장기들이 병속에 담겨 나란히
놓여있다.
여전히 박동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갓 빼낸 심장과 자신을 보며
꿈뻑거리는 남자의 눈알이 병속에 들어가 죽은 자신의 몸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치는 유란이다.
“미친 놈.”
의사는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구석 책상에
앉아 와인을 마신다.
빨간 색을 보이는 물결이 와인인지 아니면 남자의 흘러내리는
피 인지.. 도무지 감이 잡이지 않을 정도로 똑같다.
의사가 입가에 묻은 와인을 손으로 닦으며 다시 시체한테
다가간다.
“오늘은 운이 좋았어.. 꽤 괜찮은 물건이야.. 하지만 아직도
찾지를 못하고 있어..신장이 필요해... 인체 조직도 부족해...
그러고 보니 젊은 뇌도 찾아야 하는데...“
유란 말처럼 하는 행동과 말투는 정말 미친놈이다.
지금 이 의사는 자신이 하는 행동을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곧이어 유란이 경악한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의사는 어느새 죽은 이를 산산조각을 내며 작은 박스에
차곡차곡 담는다.
한 두번 한 솜씨가 아니다.
그리곤 그 위에 통에 담긴 약물을 잠시의 멈침도 없이
부어넣는 의사다.
그래... 이 냄새다.
유란이 병원에서 맡은 향은...
순간 번쩍이는 불빛에 의사가 행동을 멈추고 쳐다본다.
“누구야?”
손에 잡은 커다란 톱을 들고 굳은 얼굴로 의사는 주위를 살피며
유란이 서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죽일 수밖에 없다.
만약 자신의 모습을 들킨다면 유란은 그 의사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 절대로 죽이지 마. 상처도 내지 마. 너의 흔적을
남기지 마.”
해주가 몇 번이고 자신에게 당부한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는 법, 점점 가까워지는 의사의
발걸음에 숨겨져 있던 유란의 송곳니가 모습을 보인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나난 고양이 한 마리가 불쑥 의사 앞으로
뛰어든다.
“너였니.. 아가, 네가 날 너무 놀래켰다... 어찌 들어왔을까.”
의사가 고양이 안아들고 주위를 살핀다.
“야용아, 야용아.”
준영이 고양이를 부르며 지하실로 내려온다.
의사가 당황했는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흰 가운을
벗어들고 벽장 문을 닫느다.
준영이 아무렇지 않게 살짝 열려있는 문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고양이 부른다.
“어딨니? 야용아.. 야용아...”
주위를 살피다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서는 준영이를 급하게
나오는 의사가 그를 향해 웃음진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장 너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그새
얼굴색이 확 바뀌는 의사다.
“아이고, 고양이가 저희 사무실로..”
순간 준영을 보고 멈칫하는 의사다.
“어, 안녕 하세요? 여기서 뵙습니다.”
준영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 그러게 우리가..”
“병원에서.. 아버님 수술을 맡으셨습니다.”
“아, 맞다. 그렇죠. 이제야 기억을 납니다. 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마지막 날은 따님이 오셨던 것 같은데...”
의사가 멋쩍은 듯 웃는다.
“덕분에 건강 하십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니, 뭘.. 환자 스스로 이기려는 마음만 있으면 뭐든 병은
낫게 돼있어요. 여기..“
안고 있던 고양이를 준영에게 건네는 의사다.
“고양이가 참 예쁘군요.”
“죄송합니다. 안고 가다가 놓쳤는데 이리로 들어왔나 봐요.
일 보시던 것 같은데 마저 보십시오.”
고양이를 건네받은 준영이 슬쩍 주위를 살피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선다.
의사가 순간 표정이 바뀌며 밖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문을
꽉 닫으며 혹시나 하고 다시 확인을 한다.
“안 되겠어. 자리를 옮겨야지. 지금까지 여기를 들어온 사람이
없었는데..”
의사가 구시렁대며 안으로 들어간다.
어느새 차안에 앉아있는 유란이다.
준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없이 차를 몬다.
“고마워.”
“뭐가?”
“다 알아. 나 때문이잖아..”
“뭘? 아니데, 진짜 고양이까지 죽을 까봐.”
피식 웃는 유란이다.
해주 말이 맞다.
준영은 거짓말을 못하는 녀석이다.
“어쨌든. 돌아버리기 직전이었거든. 이번엔 네가 날 살렸다.”
창가를 바라보는 유란이다.
준영이 거울로 그녀를 힐끔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하루 종일 설찬과 떨어지지 않는 해주다.
그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 하려면 설찬이 불안에
떨며 그녀를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몇 번이고 안심을 시켜도 담아 들으려 하지 않고 그저
해주를 놓칠까 그 생각만이 설찬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넌 더욱 해주를 놓지 않으려 할 거야. 넌 더욱 해주를 탐하려
할 거고, 넌 더욱 그녀와 떨어지려 하지 않을 거야.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해주에게 더 집착을 보일거고 그런 해주에게
더 중독이 되가는 거지.”
맞다.
자신은 이제 해주가 곁에 없으면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자신을 버린다는 그 생각이 아니란 걸 알지만 마음속 분노를
꺼내들어 자신을 괴물로 만든다.
“해주는 인간이야. 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널 얼마나 받아
들일 수 있을까.. 너와는 다른 인간이라고. 널 받아들이는데도
분명 한계가 있을 거야. 혹시 라는 희망도 품지 마. 인간은 절대
우리처럼 될 수 없으니까.”
유란의 말이 맞다. 해주는 인간이다.
분명 자신과는 다른 몸을 가기고 있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몸이 떨려온다.
이젠 해주가 자신을 버린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이 반응을
보여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바르르 떨리는 몸이다.
자신의 품에 등을 보이고 안겨있던 해주가 설찬을 보려 돌아
서려 한다.
“움직이지 마.”
차가운 설찬의 단호한 목소리다.
돌아보려던 해주의 몸이 그대로 멈춰 선다.
“당신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해.
기억에 담지 않았으면 해.”
“알았어.”
해주가 나긋하게 답을 한다.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저 설찬을 이해하려 애를 쓸 뿐이다.
오늘은 계속 해주의 등 뒤에서 그녀를 안는다.
아직까지 자신을 바라 볼 해주의 눈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설찬이다.
자신을 향한 그 눈길이 어떨지 알기에..
불안함이 밀려 와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볼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주와 떨어질 자신도 없다.
해주역시 설찬의 품안에서 그저 그가 하는 대로 자신을 맡길
뿐이다.
지금은 설찬을 달래고 그의 무엇인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생각만이 우선이다.
무엇 때문에 설찬이 이렇게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불안해하는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 화를 삭이지 못하는지..
이해하려고 설찬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사랑하니까 그를
사랑하니까..
벗어나지 않은 채 설찬의 품에 안겨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해주다. 솔직히 자신도 지금의 상황이 싫지만은 않다.
그것도 이상하다.
설찬과 자신 사이에는 분명 알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해주 아니던가...
짜릿함과 야릇한 쾌감은 더 바싹, 더 거칠게 밀어 넣는 설찬의
몸도 해주는 즐길 뿐이다.
좋다.
설찬 만큼 사랑을 나누는 것도 더 없이 좋다.
설찬의 몸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해주가 잽싸게 그에게 입을
맞춘다.
그리곤 눈길을 피하는 그의 얼굴을 돌려 세우며 속삭인다.
“보고 싶었어. 종일 당신이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진하게 입을 맞추는 자신을 힘껏 끌어안는 설찬을 보며 해주가
웃음을 터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