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묵염도(墨炎刀)
태사강은 앳돼 보이는 몽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당히 서있자 코웃음을 쳤다.
“흥! 어디서 무공을 좀 익혔다고 무서운 게 없는 모양이로구나!”
태사강은 조나라 사람으로 조상대대로 조나라에서 살아왔기에 이번 장편대전에서 많은 친인척이 죽어버렸다. 당장 진왕의 궁궐로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무리 자신의 무공이 고강하다고 하더라도 진왕의 궁궐을 지키는 수많은 무사들을 물리치고 진왕을 제거하기란 어려웠다.
다른 나라의 왕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진나라의 왕은 다른 6국의 나라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기에 항상 암살을 대비해 많은 고수들을 궁궐에 두어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사강은 꿩 대신 닭으로 지금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초를 손봐주기로 했다. 물론 그가 직접 죽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고, 절정에 이른 고수인 자신이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자초를 죽인다면 다른 무림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단지 태사강은 남편, 아들, 아버지를 잃은 조나라의 사람들이 자초를 혼내주기 위해 왔는데, 그것을 막고 나서는 표국의 무사들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직접 나섰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새파란 애송이가 감히 천하십걸 중의 하나인 자신을 막아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도제 태사강은 커다랗고 검은 자신의 애도(愛刀) 묵염도를 몽을 향해 겨누었다.
도제의 묵염도는 어찌나 검은지 몽을 겨눈 칼끝에서 시꺼먼 먹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네놈이 나를 상대할 실력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거만하게 말하는 도제 태사강을 향해 몽이 나지막이, 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은 제가 귀공의 상대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아무 상관없는 자초공자에게 이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기에 이러는 것뿐입니다!”
“크하핫! 새파랗게 어린놈이....... 지금 네가 나를 가르치려는 게냐? 잘 듣거라. 애송이 녀석아. 옳고 그름을 따져 행동을 할 때에도 상대를 보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알겠느냐? 오늘 네놈에게 세상을 사는 법을 조금 가르쳐 줘야겠구나. 부디 나를 원망치 말거라.”
태사강의 옷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고 펄럭이는 것과 동시에 들고 있던 묵염도에서 도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것을 보며 표국의 무사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저것이 말로만 듣던 태륜도법?”
묵염도의 칼끝에서 솟아오르는 도강은 신기하게도 먹물처럼 검게 피어올랐는데, 그 검은 도강에서 마치 불처럼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도제 태사강은 조금 전 몽의 실력을 어느 정도 겪어봤기에 처음부터 힘을 제법 실어 공격을 퍼부을 준비를 했다.
“묵염일섬!”
태사강의 외침과 함께 태사강의 묵염도에서 피어오른 시커먼 강기가 몽을 향해 거세게 덮쳐갔다. 몽은 날아오는 검은 강기에서 평범하지 않은, 아주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거기엔 약간의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기분을 무척 나쁘게 만들었다.
- 쐐애애액!!
몽은 이상한 기운을 느끼면서 우선, 공력을 끌어올려 태사강의 첫 공격을 허공으로 튕겨내었다.
- 터엉!
빠르고 거칠게 날아가던 검은 강기는 몽의 손에 의해 너무도 가볍게 허공으로 튀어 오르며 기운이 흩어져버렸다. 태사강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크게 부릅떴다. 자신이 펼친 비전절기 태륜도법. 그 중에서도 섬광처럼 빠르게 날아가 상대를 베어버리는 묵염일섬이 이토록 가볍게 상대에게 막히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묵염도의 검은 강기를 맨손으로 쳐내어버렸기에 태사강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너, 너......”
태사강이 놀라서 몽을 향해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말을 더듬고 있는데, 몽이 태사강을 향해 먼저 말했다.
“특이한 기운을 뿜어내는 칼이로군요.”
몽의 말에 태사강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자신의 크고 검은 애도 묵염도를 슥 한번 쳐다보고 말했다.
“나의 묵염도 말이냐?”
“그게 묵염도라는 것입니까?”
“그렇다. 나의 스승께서 지니고 계시다가 나에게 물려주셨지. 나의 스승 또한 그렇게 물려 받으셨던 것이고.......”
태사강은 말을 하면서 묵염도를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태사강은 자신이 들고 있는 묵염도에서 오래전 과거와 그 과거들이 쌓여 자신에게 이르게 되었을 낭만에 잠시 젖어들었다가 몽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네놈은 어떤 무공을 익힌 것이냐? 보아하니 나이도 어린 녀석 같은데, 상승의 무공을 익혔구나. 사존이 뉘시냐?”
“스승은 따로 없습니다.”
예상 밖의 몽의 대답에 태사강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 그럼 홀로 익혔단 말이냐?”
“그게......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뭐? 아니....... 이놈이........”
태사강은 이번에도 몽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스승이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있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홀로 익힌 것도 아닌 것이란 무슨 말인가? 태사강의 마음속에선 다시금 분노가 치솟았다.
그런 태사강의 마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몽은 조금 전 그 기운이 무엇일까 그것이 무척 궁금할 뿐이었다.
‘묵염도......’
몽이 묵염도에 대해서 생각하자 품속의 천서에서 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 묵염도. 팔천년 전 지옥의 한 야차가 지옥 불을 들고 인간 세상에 나왔다가 실수로 아주 커다란 도(刀) 위에 떨어뜨려 만들어진 칼. 지옥의 검은 불을 이용할 수 있는 도(刀)로써, 도의 주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지옥의 힘에 잠식당하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 인간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신물. 즉시회수.
몽은 즉시 회수란 글이 눈앞에 떠오르자 무척 마음이 복잡해졌다. 도제 태사강의 입장을 고려하여 결투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마무리를 좋게 해보려고 고민 중이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서로 좋은 마음으로 끝내기는 불가능 할 것만 같았다.
‘어쩌지?’
몽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천서에서는 인간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신물은 즉시 회수해서, 궁극의 무의 장으로 넣어야만 한다고 되어있었다. 천서의 지침은 곳 하늘의 치침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몽은 천서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몽은 주위를 두러보았다. 수많은 조나라의 사람들과 표국의 무사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당당히 서있는 도제 태사강. 그는 조금 전 몽의 무공에 조금은 놀란 듯 보였지만, 결코 자신이 이 대결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지 다시 당당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몽은 태사강을 향해 말했다.
“이곳은 사람들이 많아 다칠 수도 있습니다. 자리를 옮기시죠.”
몽은 태사강을 위해 말을 했지만, 태사강은 몽을 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흐흐흐. 왜 그러느냐? 응?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할까봐 두렵기라도 한 게냐?”
태사강은 일부러 주위의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고, 주위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웅성거리기도 하고, 킬킬거리며 웃기도 했다. 몽은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건 말건 상관없었다. 단지 잠시 후 태사강의 묵염도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뿐이었다.
태사강은 주위를 둘러보며 한껏 몽을 조롱하듯 행동하더니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흠. 좋다! 뭐, 그게 네놈의 소원이라면, 자리를 옮겨주도록 하마.”
말을 마치자마자 태사강이 먼저 신형을 날렸고, 그 뒤를 몽이 따라갔다. 잠시 후,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러 태사강이 멈추자, 몽도 그곳에 멈춰 섰다. 태사강이 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면 되겠느냐?”
“좋습니다.”
태사강이 몽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멍청한 놈. 그깟 진나라의 거지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몽이 그런 태사강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조금 전까지는 그랬습니다만, 이젠 한 가지가 더 늘었습니다.”
태사강은 몽의 말이 무슨 뜻이지 몰라 눈썹을 실룩거리며 물었다.
“응? 그게 무슨 말이냐?”
“조금 전까진 자초 공자만을 위해 귀공과 결투를 하려 했지만, 이제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습니다.”
“그게 뭐냐?”
“귀공의 도. 묵염도입니다.”
“뭐? 아니 묵염도가 왜?”
“제가 그 묵염도를 가져야겠습니다.”
“뭐, 뭣? 지, 지금 나에게 묵염도를 달라....... 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태사강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몽을 잠시 바라보다가 크게 웃었다.
“크..크흐흐......하하.....우와하하하하하핫!!”
인적이 드문 산속에 태사강의 웃음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어느새 내리던 비는 그치고, 빗물이 아롱이 맺힌 풀잎은 태사강의 웃음소리에 여린 몸을 가늘게 떨다가 이내 빗물을 떨구고는 위아래로 작은 요동을 쳤다. 한쪽에선 태사강의 큰 웃음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푸드득 거리며 날개를 털어 빗물을 허공에 흩뿌리며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산속에 울려 퍼지는 태사강의 웃음소리는 거칠기도 했고, 서글피 느껴지기도 했다. 풋풋한 풀내음이 가득한 산속에서 몽과 마주하고 한참을 웃던 태사강이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 몽에게 물었다.
“네놈이 정녕 실성을 한 모양이로구나. 그래. 네놈도 이 묵염도가 탐이 나는 것이냐?”
몽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허면?”
몽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을 한 듯 태사강에게 말했다.
“지금 가지고 계신 묵염도는 본래 지옥의 검은 불이 우연히 인간 세상에 나왔다가 커다란 도에 떨어져 만들어진 것으로 칼의 주인에게 결코 이롭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세상에서 당장 없어져야 할 물건입니다.”
“조금 전에는 네놈이 갖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가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세상에서 그것을 없애려 하는 것입니다.”
몽의 말에 태사강이 묵염도를 흔들어가며 몽에게 따져 물었다.
“나 원.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구나! 네놈이 정녕 정신이 완전 돌아버린 모양이로구나! 지옥은 무엇이며 인간세상에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또 뭐란 말이냐? 그럼 이 묵염도를 들고 네놈이 지옥에라도 다녀오겠다는 말이더냐?”
몽은 잠시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태사강에게 말했다.
“사정이 있어 자세히 설명을 드릴 순 없지만 어쨌든 저에게 그것을 주셔야겠습니다.”
태사강이 잠시 몽을 노려보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좋다. 그럼 너의 목을 나에게 다오.”
몽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인(刀人)에게 도(刀)는 목숨과도 같은 것. 그런 도를 달라고 했을 땐, 응당 거기에 걸맞은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 제 마음대로 저의 목을 내어드리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그냥 도를 주시지요.”
“이런.....이런 미친놈. 이거 정말 실성을 한 미친놈이 아닌가!”
“저에게 뭐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그 도(刀)를 주시지요.”
“싫다면?”
“그럼 억지로 뺏을 수밖에요.”
“그거 정말 내가 바라던 말이군. 너는 나의 도를 뺏고, 나는 너의 목을 뺏고 말이야.”
태사강의 말이 끝나자, 그의 몸과 그가 들고 있는 묵염도에서 검은 강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몽은 멀리서도 검은 강기의 화끈거리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옥의 불이라 그런가...... 화기가 엄청나구나! 단지 우사의 힘으로는 화기를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수룡의 힘을 써볼까?’
몽은 수룡의 힘으로 화기를 다스려 볼까 생각하다가, 문득 묵염도에서 느껴지는 화기와 어우러진 사악한 기운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때 품속에서 천서의 글들이 휘리릭 튀어 올라왔다.
- 사악한 기운은 찬란한 황금빛을 지닌 황룡의 기운으로 누그러뜨릴 수 있다.
‘응? 황룡의 기운? 그럼 풍백과 우사의 힘을 함께 썼던 것처럼, 황룡의 기운과 수룡의 기운을 함께 쓸 수 있을까?’
천서는 마치 몽이 생각하기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글을 얼른 펼쳐 보였다. 몽은 글을 읽으며 여의주에서 황룡과 수룡의 힘을 서서히 불러왔다.
“묵염열화!!”
태사강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공격해 들어왔다. 검은 불꽃이 묵염도에서 피어나 몽을 집어 삼킬 듯 거칠게 날아왔다. 몽은 얼른 수룡과 황룡의 기운으로 호신강기를 만들어 몸을 보호했다.
- 치이이이익!!
검은 지옥불의 강기와 용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몽의 호신강기가 맞닿자 보통의 강기들이 부딪칠 때 나는 굉음과는 다르게, 불에 뜨겁게 달궈진 쇳덩이에 물을 부을 때처럼 수증기 퍼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순식간에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쌀쌀한 날씨는 그렇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더욱 하얗게 만들어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몽과 태사강은 절정고수로 둘은 상대의 기운으로 서로를 살필 수 있었다. 몽은 태사강의 묵염도를 취하기 위해서, 태사강은 몽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각자 더욱 공력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