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소꿉친구
나에겐 정말 소중한 소꿉친구가 있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만, 햇빛이 비칠땐 회색빛으로 빛나는. 남에겐 검은색이지만, 어째선지 내 앞에선 흰색이 섞인 회색빛으로 미소 짓는 녀석.
이름은 허민우. 내 소꿉친구.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녀석의 이름을 잘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나만 부를 수 있는 '허스키'라는 단어가 너무 좋아서 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였을까?
나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머리카락이 나보다 부드러운, 갈색 노을을 가진 호박색 눈의 허스키.
남들이 너에게 무뚝뚝하다거나 쌀쌀맞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넌 누구보다 따뜻한 아이 인걸.
있지.
꾸미지 않고 평상시 모습으로 있는대도, 너랑 있으면 시선의 무게 같은 거, 신경 안 쓰이더라.
어떠한 모습이든 허스키 넌, 내 부가적인 것들이 아닌, 나를 바라보고 얘기해주니까.
너랑 있으면 걸어가다 바람이 불어 얼굴 전체가 드러나서 커 보일까봐 애써 옆머리로 가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앞머리가 드러나 운동장 같은 이마가 보일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돼.
야, 그 표정 뭐야?
널 막대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게 아니야.
그 편안함이 너무 좋아서 그래.
난 이 편안함을 당연시 여기고 싶지 않아.
네가 따뜻한 마음 준 만큼, 더 많이 돌려줄 거니까 기대하라고!
길을 걷다 내가 아는 노래가 들려올 때, 자연스럽게 따라 불러도 상관없고..
물론, 넌 뭐 하냐며 비웃지만..
..이내, 같이 웃어버리니까.
그 산뜻하고 소소한 바람 내음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풀게 돼.
난 은근히 소심해서 대화하다가 스마트폰을 만지면 ‘나랑 있는 게 재미없나’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넌 그 조그만 부분도 생각해주더라.
허스키 널 보면 내가 되려 더 많이 돌려주고, 웃게 만들고 싶어.
너라면 또 삐죽대면서 트집 잡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너니까..
..난 네가 나쁜뜻으로 그러지 않는다는걸 잘 알아.
문득 느낀 건데, 음식을 먹을 때에도 안 친한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양념이 입 주변에 묻거나 할 때 그렇게 민망하더라!
그리고 행여 많이 먹는 것 처럼 보일까 싶어서, 편안하게 못 먹겠더라구.
음……
그렇다고 내 돈 내고 먹는데 적게 먹을 생각은 없긴 한데..
아무튼 너랑 있으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배부르면 배부른 대로, 몸이 이끄는 대로 깊이 돌려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달까.
…아 맞다!
그리고 공통 관심사가 없어도, 별 의미 없는 말을 해도,
우린 서로의 말을 나름대로 잘 경청해주잖아.
물론 ‘뭐래’하면서 장난스레 서로를 꼬집기도 하지만,
나한텐 그것도 정말 소소하고 소중한 기쁨이야.
그러고 보니, 매일매일 너에 대한 많은 단어들과 생각이 쌓이는 거 같아.
연필을 들고 간략한 문장으로도 적어봤어.
정적이 어색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
구두보단 운동화 같은 사람.
가끔 재수 없고 툴툴대긴 하지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봐 주는 사람.
“…….”
나는 녀석을 절대 잃고 싶지 않다.
설령,
내가,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 하더라도.
***
‘털털’소리를 내며 나의 추억의 한 공간을 떠나보내는 무언의 감정.
오랫동안 익숙해져 버린 허름한 듯 따뜻한 향기가,
..멀리 사라져간다.
나는 어째서, 좋은 추억밖에 생각나지 않는 걸까.
중간의 무언가가 없어져 버렸음에도, 나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생각 속으로 더욱 다가가려 할 때 즈음, 내 몸은 스스로의 눈꺼풀을 닫아버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느끼고 있었고,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이사 가버린 소꿉친구를 보는구나라는 생각으로 주의가 가득 차버렸다.
내 의지로 바뀐 생각이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긍정한 채, 지금의 주제로 머릿속의 시선을 움직였다.
‘어색하지 않게,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다.’
작은 바램.
너를 바라보는 높이와, 나란히 서있었던 그림자의 크기는 바뀌었겠지만,
..부디 그때처럼 나를 편하게 대해주기를.
차의 창문을 살짝 여니, 어디선가 풀 내음이 들려온다.
코끝을 스쳐가는 간지러움은 어째서 입꼬리까지 간지럽게 만드는 걸까.
내가 생각한 대로라면, 넌 날 보자마자 이렇게 말하겠지.
“누구세요?”
은근 슬쩍 드러나는 미소를 감추며 장난스레,
그리고 퉁명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