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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딱 달라붙는 청색 스키니 진과 하얀 티를 입고, 종아리까지 덮는 롱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한쪽 어깨에는 에코 백이 걸려 있었다.
늘씬하고 건강한 몸매를 적절히 강조하여 맵시 있었다.
그녀의 몸매 비결은 무엇일까? 역시 다이어트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피를 먹는 것도 도움이 되진 않을까?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얀 피부와 크고 예쁜 눈, 작은 얼굴을 가진 유리는 마스크를 써 얼굴의 반을 가렸음에도 반드시 아름다우리라고 상상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녀에게 한 번씩은 시선을 향하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런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유리가 만약 학교에 다녔더라면 나 같은 녀석이랑 이렇게 데이트를 할 일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자신감을 깎으려 들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다.
지금 그녀는 나와 있는 것이고, 내 제안에 응해서 이곳까지 발길을 옮겨준 것이다.
나는 유리를 제대로 마주하고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근데 이 향기…… 내가 준 향수 뿌리고 왔구나.
수많은 냄새 사이에서 은은한 레몬 향이 맡아졌다. 내가 선물한 향수를 뿌리고 와준 것이 왠지 뿌듯했다.
오늘은 어제 진하영과 왔을 때처럼 목적지가 없는 걸음은 걷지 않았다.
어젯밤 나는 데이트코스 같은 부끄러운 단어들을 검색해가며 루트를 미리 짜놓고 왔다. 그러니 적어도 발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근데 데이트코스인가…….
옆에서 또각또각 발걸음을 맞춰서 걷는 그녀를 보니 진짜 연인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우선 카페에 갔다.
카페는 2층 구조로, 외관부터 상당히 고급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외부 테라스 석에선 각종 음식과 커피, 주류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예쁘다. 카페.”
“응. 크네.”
나는 미리 보고 왔음에도 조금 긴장이 됐다. 이렇게 크고 고급진 카페는 처음이며, 그것도 이성과 단둘이 오게 되다니……. 실수라도 할까 봐 심장이 콩닥거렸다.
로맨스 소설에서 이런 비슷한 장면을 읽은 경험이 있지만, 현실은 명백하게 다른 법이다. 머리가 알고 있어도 몸으로는 처음이기에 당연히 떨렸다.
정해진 틀 안에서 결말을 향해 흘러가는 소설은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으며,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나는 가슴 아픈 엔딩을 맞지 않게끔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정문을 넘어 카페의 내부에 들어섰다.
카운터로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니 크고 작은 테이블이 무수히 많았고 소파로 이루어진 자리도 보였다.
내부는 온통 주황색 조명으로 온화한 느낌이 났으며,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운터의 뒤쪽 벽에는 가게 이름이 네온사인으로 멋들어지게 장식되어 있었고, 그 옆으로는 어린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각종 피규어와 인형도 장식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일류급 카페였다.
유리의 표정은 마스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꽤 초롱초롱하게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 같았다. 적어도 싫다는 감상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카운터 앞에 서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메뉴판을 보았다.
브런치 메뉴부터 수프, 샐러드, 파스타, 피자 등 웬만한 먹을거리는 다 있었다.
음료와 커피, 주류 등 마실 것의 종류도 상당했고, 진열대에는 각종 케이크와 빵, 쿠키 등이 줄을 서 있었다.
가격은 일반 카페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음…… 저는 망고바나나 스무디 하나랑, 너는?”
“어…… 이걸로.”
내가 감상에 빠져있을 때 그녀는 이미 주문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의사를 물어오는 바람에 가장 평범해 보이고 위에 있는 아이스 라떼를 가리켰다.
“네, 아이스 라떼도 하나랑…… 디저트는 뭐로 할래?”
“응? 음…….”
보통 이럴 땐 뭘 디저트로 먹어야 하는 거지? 이런 곳에 올 일이 거의 없는 나는 혹시라도 뜬금없는 것을 고르게 될까 봐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젠장, 온라인에서는 사지 못하는 책을 사러 가거나, 아롱이를 산책시키는 것밖에는 외출할 일이 거의 없다고.
내 고민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가 “무화과 브레드도 두 개 주세요.”라고 매끄럽게 주문했다.
조금 부끄러웠다. 분명 ‘얘 이런 곳에는 자주 안 오는구나’하고 생각했겠지.
내가 당황하며 빠르게 눈을 굴리는 모습을 보았을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조여 왔다.
서툰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끄러웠다.
사람의 감정은 그런 거다. 가끔 정론을 들이대도 조절되지 않는 변덕맞은 것이다.
슬쩍 옆을 보자 유리는 내 눈을 보고 있었다. 그리곤 마주치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예쁜 곡선의 눈웃음을 지었다.
그 간드러진 모습에 빠져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그보다 그녀는 이런 곳에 익숙한 걸까?
“아까 당황하는 모습, 귀여웠어.”
계산을 마치고, 주문한 것들을 받아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자마자 유리는 그렇게 말해왔다.
“이런 곳엔 별로 안 와봐서.”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보다 귀엽다니…… 멋쩍은 기분이 들어 한손으로 목을 감쌌다.
“유리 넌 이런 곳에 많이 와봤어?”
“응? 어…… 예전에 좀 와본 편이랄까……?”
그녀가 말하는 예전이란 언제일까? 하지만 더 캐묻는 건 괜한 조사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주제에서 도망치듯 피하는 눈을 보니 물어보자는 생각은 역시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스크를 턱 아래에 걸고 빵과 음료를 먹기 시작했다.
나도 시원하고 달달한 아이스 라떼로 목을 적셨다.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만드는 차가움이었다.
“저기, 주원아.”
“음?”
“너 아까 미소 지은 거 알아?”
“응? 내가?”
“응응. 카운터에서.”
아…… 그런가. 그때의 나의 표정은 미소였던 걸까?
……신기했다.
자연스럽게 웃는다는 것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어느샌가 유리에게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내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 못지않게 나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또다시 느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기에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가 없다는 인간은 나아갈 수 없다.
그리고 분명 유리는 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준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다시 가슴에 어색하고 뜨거운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나는 유리를…….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나는 그녀에 대한 답에서 또다시 도망쳤다.
그녀 본인을 바로 앞에 두고 그런 상상을 하기 부끄럽기도 했고, 가슴은 아직 새로운 감정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얼굴 빨개졌어.”
“더, 더워서 그래.”
그럴 리가 없었다. 그야 아이스 라뗀데.
우리는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음료와 함께 소재가 바닥날 때쯤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나란히 속도를 맞춰 상가의 불빛으로 물들어 어둡지 않은 밤거리를 재차 걸었다.
다음은 어디였더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아! 잠시만…….”
유리가 멈춰서더니 다급하게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왜?”
“아…… 시간 됐어. 음…… 저기로 가자.”
그녀는 팔의 접히는 부분을 잡더니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이끌었다. 그 행동의 목적을 파악하는 데에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 아…… 공급 시간?”
“고, 공급 시간이라 부르지 마! 무슨 기계 같잖아!”
그녀는 그렇게 소리 지르면서 에코 백에서 토마토주스 병을 꺼내 들었다. 자세히 보면 토마토주스보다 진한 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유리만을 위한 특별한 주스가 분명했다. 그녀의 이성의 끈을 잡아주는, 없어서는 안 될 빨간 주스.
“……고개 돌려줘.”
무심코 빤히 쳐다보고 있던 내게 유리가 말했다.
“으, 응…….”
역시 먹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은 모양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를 먹는 모습’이려나.
고개를 돌리자마자 후딱 해치우려는 것처럼 꿀꺽꿀꺽, 빠르게 목구멍으로 흘려 넣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멈추고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휴대용 물티슈로 새빨갛게 물든 입술을 닦는 그녀가 보였다. 바람을 타고 미미한 피 냄새가 맡아졌다.
“다음은 노래방 어때?”
이번에는 유리가 먼저 목적지를 말해왔다.
“노래방?”
“응. 노래방 가고 싶어.”
유리는 노래에 꽤 자신이 있는 듯 의욕이 있어 보였다. 반대로 나는 노래에는 눈곱만큼도 자신이 없었다.
노래를 듣는 건 좋아해도, 부르는 건 경험도 없을뿐더러 흥미도 전혀 없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을 놓을 수는 없었다. 또 유리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기도 했다.
“응. 가자.”
분명 데이트코스 추천 목록에 시설이 좋은 노래방도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단 듯이 눈에 담지 않았었다. 위치라도 알아 둘걸.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유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검지를 내지르며 말했다.
“그럼, 저기로 가자!”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코인노래방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가면서 본 건데 주위에는 노래방 간판이 무지하게 많았다.
우리는 비어있는 방을 골라 적당히 들어갔다.
안은 어두컴컴해 TV에서 나오는 불빛에 눈이 아팠지만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세 명이 앉을 만큼의 의자가 있었고, 두 개의 마이크와 전화번호부를 떠올리게 하는 두꺼운 책, 네모난 무선 리모컨이 작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안쪽 벽에 붙어서 앉자, 유리는 한 칸을 띄우지 않고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선곡할래?”
그녀가 허벅지 사이에 마이크를 고정하고 알록달록한 막을 씌우면서 말했다. 아마 부를 때 침이 들어가지 않도록 씌우는 커버인 것 같았다.
“난 노래 잘 못 불러. 부르는 거 들을게.”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알았어. 다음엔 꼭 들려주기다?”라고 말하면서 기계에 돈을 넣었다. 천 원에 3곡이 들어왔다.
그녀는 리모컨을 익숙하게 다루며 노래를 시작시키고 마이크를 잡았다.
나도 알고 있는 노래였다. 사랑의 아픔을 가사에 녹여낸 노래였다.
음역대가 상당히 높고 가성도 많이 들어가는 어려운 노래로 알고 있는데……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자 나는 저절로 턱이 벌어졌다.
원곡을 잊게 만드는 그녀의 청아하고 매력적인 성음은 가사 하나하나에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
일반인이 듣기에도 상당한 실력이라는 것을 느꼈으며, 이 정도면 가수를 꿈꿔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간도 찌푸려가며 열정적으로 부르는 유리의 모습은 왠지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노래 부르는 걸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고음 파트도 깔끔하고 완벽하게 소화했으며,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노래는 끝이 났다.
망아지경으로 감상하고 있던 난 그때서야 입이 마른 것을 알아챘다. 순간 박수도 칠 뻔했다.
노래를 끝낸 유리는 나를 보며 깜찍하게 윙크를 했다.
“유리 너…… 진짜 잘 부르네. 이 정도면 이미 가수 아니야? 마스크랑 모자 쓰고 온 이유가 설마…….”
나는 너무나도 완벽한 유리의 모습을 숨김없이 칭찬했다.
“그런 거 아니야.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 그냥…… 옛날에 노래 좀 배운 것뿐이야.”
유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역시 전문적으로 배운 거구나……. 그래도 여간 열심히 해선 오를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남은 두 곡도 유리가 불렀다. 나는 앉아서 열심히 감상했다.
유리가 부르는 노래는 왠지 다 슬픈 사랑 노래들 뿐이었다.
“아~! 오랜만에 즐거웠다. 다음에 올 땐 너도 꼭 연습해서 와야 한다?”
유리는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했다.
“그래. 시간 나면 해볼게.”
나는 노래 연습은 솔직히 모르겠지만 그 말을 거절할 리 없었다.
“다음은 음…… 나 노래했더니 조금 출출해진 것 같아.”
“뭐 좀 먹으러 갈까?”
“찬성!”
“근데 유리 너 다이어트, 아니, 저, 저녁엔 뭐 안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
아…… 실수로 다이어트라는 말을 입에 담아버렸다.
“다다다, 다이어트 같은 거 안 하거든?! 그냥, 간식 먹자는 거야, 간식!”
유리는 당황한 채로 언성을 높였다.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보고, 조금 늦게 내가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때 머릿속에, 아니, 입안에 떡볶이의 맛이 회상되며 군침이 돌았다.
생각해보니 이 데이트를 신청하게 된 계기는 그녀에게도 떡볶이 맛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해서였다.
“혹시 떡볶이 좋아해?”
“응? 떡볶이라…… 완전 좋아해!”
그녀는 입술 아래 손가락을 대고 고민하더니, 힘차게 대답했다.
나는 그녀를 지하상가로 이끌었다. 그리고 진하영과 갔었던 떡볶이집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어? 우주원……?”
운명의 장난일까. 만나서는 안 될, 오늘만큼은 더더욱 마주쳐선 안 될 그녀를 만났다.
“진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