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8
도현의 사무실 창 너머로 가을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이따금 창문을 두드렸다. 그 작은 소리에 그의 손에서 돌아가던 볼펜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
땅이 꺼져라 쉬는 그 한숨에 슬쩍 다가왔던 정환이 멈칫했다. 그의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 눈치를 보는 희수와 민후가 있었다. 그리고 누리가 휴게실에서 커피를 타 발소리를 죽인 채 정환에게 가져왔다. 정환의 손에 두 잔의 커피가 쥐어졌다. 정환이 누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곤 다시 무겁게 발을 때었다. 조심스레 도현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자 멈췄던 볼펜이 다시 그의 손에서 휙휙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 때문에 멈춰 있었는지도 모른 채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괜찮아?”
기분을 말하는 거라면 최악이었다. 도현이 볼펜을 놓고 머그잔을 들었다. 아랑과의 회식 이후 출판사에 두 사람이 고교동창이라는 사실이 퍼졌고, 이내 고 대표의 귀에도 들어갔다. 도현은 개의치는 않았다. 방금 전까지 대표실에 불려가 동창 하나 살리자고 한 도박이었냐 욕을 왕창 들었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답답한 그의 가슴에 고 대표가 던진 돌은 튕겨져 나갔다.
“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 아랑 작가님 시 좋은 거 대한민국 사람 다 아는데 뭐. 현 팀장이 개인적인 마음으로 도우려던 것도 아니었고 말이야. 우리 다 아랑 작가님이 으뜸이라고 의견 모았었으니까.”
그러나, 저러나 도현이 의자를 돌려 그를 등졌다. 청량한 여름의 모습은 어디를 가고 바람만 부는 쓸쓸한 가을은 서울에도 외로움을 몰고 왔다. 그녀가 없는 그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
그의 손에서 세 대째 담배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저 멀리 우리 새 까치집의 정원에 불이 들어왔다. 그가 그 조명에 서둘러 태우던 담배를 버리곤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애써 옮긴 걸음이 가게 대문 앞에서 멈춰졌다. 그녀의 아지트까지 빼앗곤 싶지 않았지만 벌써 몇 번이나 가게 대문 앞을 다녀 간 건지. 아직 연결되지 못한 서울의 사랑을 뒤로 한 주인들이 꽤 오래 자신들의 사랑을 견고히 다진 덕에 그 간은 걸음을 물리기 쉬었다. 그래. 여긴 안돼. 가고 싶어도 이 곳까지 침범하는 것은 나쁘다 못해 몹쓸 짓이었다. 그때였다. 대문이 열리며 손님들과 함께 미형이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도현의 모습에 놀란 듯 보였지만 배웅하던 손님들에게 마저 인사를 건네고 그를 돌아봤다. 도현이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가게 안만 빤히 보자 미형이 살갑게 말했다.
“뭘 그렇게 서 있어요. 안 들어올 거예요?”
그녀가 도현을 가게 안으로 이끌었다. 주방에서 나오던 시진이 그를 보자 낮게 신음을 냈다.
“허허. 이 사람들 좀 보게. 술상 따로 챙기는 일 없도록 하라니까. 보란 듯이 엇갈려 오네.”
아랑이 다녀갔다는 소식에 도현의 귀가 움찔했다.
“그래도 이왕 온 손님을 내쫓을 순 없지. 가, 앉아.”
도현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늘 아랑이 앉던 자리 앞에 서서 망설이니 시진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자넨 자네 자리 앉아. 주인 있는 자리 넘보지 말고.”
시진이 그녀의 자리로 자리를 잡았다. 마치 그가 올 거라는 걸 알았던 것처럼 술상이 차려진 테이블에 그가 물었다.
“언제 갔어요?”
시진이 태연하게 손도 대지 않은 남은 음식을 주워 먹으며 말했다.
“한... 한 시간 됐나? 서울로 이사 왔다고 좋아 죽더구만.”
시진이 소주병을 들어보여도 도현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거 참 큰일이구만. 세상 끝나가? 뭐, 이리 심각해?”
여전히 반응이 없는 도현을 두고 시진이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아이고! 맛나다.”
도현이 테이블에 팔을 올린 채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니까. 화해한 지가 언젠데 왜 또 제자리야?”
여전히 말이 없는 도현을 보며 시진이 작게 혀를 차곤 테이블에 올려 진 술항아리를 그에게 돌리며 말했다.
“거, 할 말 없으면 이거나 한 번 봐줘.”
밋밋했던 항아리에 무늬가 생겼다. 자세히 보니 무늬가 아닌 글이 쓰여 있었다.
“좀 괜찮은가? 이렇게 만들어서 팔아볼까 생각 중이야.”
도현이 항아리에 새겨진 시를 찬찬히 읽었다.
‘사계
봄이 되면
바람을 타고 달큰한 꽃내음이 맡아지고
여름이면
굳이 손을 넣지 않아도 물의 온도가 느껴지고
가을이면
하늘이 높아 보이고
겨울이면
밤새 세상을 소복이 덮는 눈 소리가 들려올 때
비로소 세상이 늘 그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진이 그의 시선을 따라 시를 한 번 훑고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시 쓰는 놈이 맞긴 맞나봐? 그 자리에서 뚝딱 지어 주던데? 어때? 우리 가게 기념품으로다가.”
그만한 것도 없었다. 도현이 항아리에서 눈을 때질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것만 같아 귀가 움찔했다.
“이 놈 시가 그렇게들 좋다고 난리던데. 누가 알 거야? 이 가게에 그 놈이 끄덕거린 시가 숨어 있는지.”
시진이 그가 제 말을 놓치지 않게 잘 이야기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있게. 주방 좀 보고 올 테니까.”
그가 가고 도현이 비어버린 제 앞을 보았다. 한숨과 함께 그가 툭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슬며시 돌린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가을의 우리 새 까치집은 여전히 낭만적이었다. 언젠가 이처럼 낭만적인 곳이라면 없던 영감님도 돌아올 거라며 그녀와 왔던 날이 떠올랐다. 테이블로 기울어진 상체와 함께 그의 고개도 숙여졌다. 시진이 따라놓고 간 술을 들여다보다 슬그머니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의 시야에 시진의 멋들어진 테이블에 몰래 남긴 누군가의 흔적이 들어왔다. 도현이 천천히 잔에서 입을 때고 그 흔적을 보았다.
‘나의 안녕
내 몫까지 그대가 행복하길.
내 몫까지 그대가 기쁨에 젖길.
내 몫까지 그대가 사랑받고, 사랑하길.
부디 꼭 그러하길.
그럼 내 마음 달래 볼 수 있으리.’
도현이 울컥 치미는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도대체 그녀의 마음에 저 같은 놈이 얼마나 가득 차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가늠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 아픔이 지금 제 아픔보다 훨씬 크다는 것. 그것에 그는 힘들다 말 할 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