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기일까. 아랑은 눈앞에 보이는 어둠에 잠긴 한강을 보며 그를 원망했다. 그와 좋았던 기억만 가득한 이곳까지, 기어이 가져가야 했을까. 살아가면서 그땐 그런 일이 있었지 웃으며 추억할 그 장소를, 미소 지을 수 있는 미래를 망쳐야만 했을까.
“나 바빠.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애써 무미건조하게 말한 그녀에도 그는 단호했다.
“내려. 좀 걷자.”
먼저 차에서 내리는 그를 뚫어져라 보던 아랑이 화가 난 건지 어깨를 들썩이며 차문을 거칠게 열었다. 신경질을 어디라도 풀고 싶어 온 힘을 다해 문을 닫고는 강변으로 내려가는 그를 가로막았다.
“너 도대체 왜 이러니?”
아랑의 목소리가 잔뜩 격양되어 있었다. 그녀와는 반대로 도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서울로 왔다며.”
“그거 묻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니?”
“어디 사는데.”
그 질문을 한 이유는 소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그게 지난 한 달 동안 그를 미치도록 괴롭혔다.
“내가 이사를 하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왜 나는 상관하면 안 되는데.”
아랑이 그를 쏘아보았다. 그녀가 그리 독하게 자신을 볼 수도 있다는 것. 그럼 그간 얼마나 제게 미소를 보인 건지. 도현은 내심 더 미안해졌다.
“윤소연은 아는 거. 나는 알면 안돼?”
아랑은 처음으로 그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졌다.
“어. 안돼.”
소연이는 친구고. 너는 현도현이니까. 아랑이 숨을 한 번 고르고 침착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 끝났으면 먼저 갈게.”
돌아서는 그녀를 그가 붙잡았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도현은 차게 식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말했다.
“기회를 줘.”
“무슨 기회?”
아랑이 천천히 돌아서 그의 손을 비틀어 쳐냈다.
“들어나 보자. 네가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냥...”
깊게 한숨을 내쉰 그가 되려 그녀에게 물었다.
“넌 이렇게 끝낼 거야? 나 하나 쳐내면 네 마음 편해지는 거야? 아, 혁준이랑도 다시 안녕인가? 그렇게 우리도 안녕이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마주친 시선 속 두 사람의 신경전이 오갔다. 아랑이 그에게 잡혔던 손목이 제멋대로 시큰거리자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또 넌 내게 흔적을 남기는구나.
“너 하나랑 불편해졌다고 내 인간관계 정리해야 하니? 그러기엔 내가 너무 손해잖아.”
그녀는 그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는 게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혁준이랑 불편해질 일 없어. 이사할 때도 도와줬고, 너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 혹여 나 어디 사는지 물어보려는 생각일거든 접어. 비밀로 해달라고 내가 먼저 부탁했으니까. 혁준이, 이젠 내 친구이기도 해.”
도현의 표정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숨어버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끝났는데 뭘 하겠다는 거야?”
그녀가 끝까지 상처를 건드는 그에 아픈 웃음을 뱉었다.
“왜, 사과라도 하게? 내가 너 좋아해서 네가 나한테 사과라도 하게?”
“신아랑.”
“내 이름 부르지마. 너 진짜 미워.”
끝까지 싫다고는 못한 아랑이 그에게서 등을 보였다. 소연이 맞았다. 그녀가 그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한계. 여전히 아랑은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미련한 걸까, 바보인 걸까. 왜 이리 구차해지는 건지 아랑은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도현이 거칠게 제 얼굴을 쓸었다. 여름밤에는 웃음소리 가득하던 한강의 둔치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멀리 자전거를 탄 한 남자가 두 사람을 빠르게 지나치자마자 도현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아랑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그냥 내버려둬. 나 좀 그냥 내버려두라고.”
“어떻게 내버려둬. 내가 네 마음 알았는데 어떻게 내버려 두냐고!”
“그러니까.”
아랑이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 돌아서 말했다.
“그러니까 내버려두라고. 네가 내 마음 알고도 모른 척 했잖아. 그걸로 대답했잖아. 알아들었다니까? 뭐, 다른 거절도 있니?”
애써 뒤돌기 전 훔쳐냈던 손길이 무색하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너도나도 흘러 내렸다. 그 눈물에 도현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랑은 목소리가 떨리고, 목이 아려왔다. 비록 얼굴은 눈물범벅일지라도 말만큼은 똑 부러지게 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쪽팔려서 그래. 내가 너무 쪽팔려서...”
널 마음에 품은 지도 모르고 넌 날 대했고. 그런 너에게 설레이고, 가슴 뛰면서도 부정하면서 곁에 있고 싶어 했던 내가. 그런 내 치부를 들켰는데 쪽팔린 건 당연한 거잖아. 아랑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닦아냈다.
“제발 나 좀 모른 척 해주라.”
가을바람에도 몸이 얼 수 있는 건지 멀어지는 아랑을 그는 잡을 수가 없었다. 한강이 그리도 적막한 날은 없었다.
***
아랑이 떠나가고도 한참이나 멍하니 서있던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뭐가 이렇게 어려울까. 그리 물으면 아랑은 모든 건 자신 때문이라 말하고 홀로 눈물을 훔칠 것이 떠올랐다. 도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리의 고백을 외면하던 것보다 훨씬 아팠다. 왜 그랬을까. 왜 몰랐을까. 어린 날에도, 그녀를 다시 만난 때에도 왜 몰랐을까. 도현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떨구어진 시야에 제 발에 밟힌 들꽃이 보였다.
열아홉, 무더운 어느 여름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 꽃 예쁘지 않아?’
아픔이 오기 한참 전에도 그는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난 이름 모를 이 꽃이 참 예쁘더라. 혹시 이름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무뚝뚝하게 쳐 내었다. 어린 소녀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너무도 매몰찼다. 누군가에게 밟힌 꽃을 울상을 짓고 보던 그녀가 어느 날 그 위에 선 그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듯 말했다.
‘밟지마.’
그 말조차 흘려버렸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엎드려 선생님의 눈을 피해 어렴풋이 잠에 들었을 때 들려오던 그 시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는 알았을까.
‘밟지마.
모르고 지나치는 것은 괜찮지만
알고도 짓밟진 마.
네 발에 밟힌 꽃이
꼭 나 같으니까.’
제 집 아래 지하방에서 들려오는 한 가정의 웃음소리에 삐뚤어진 걸까. 홀로 이른 밤부터 혼자 있는 제 귀에 들어온 그 웃음소리가 부러웠던 걸까. 제가 갖지 못하는 것을 가진 그녀에게 샘이 났던 걸까. 어떤 것이든 열아홉 소년의 괜한 자존심이 지금에서야 후회를 몰고 왔다.
도현은 그 기억이 되살아나며 눈살을 찌푸렸다. 늦게 다가와 의자를 빼 앉은 혁준의 인기척을 알아챘지만 아는 체 하진 않았다. 혁준이 그늘진 그의 얼굴을 힐끔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 있냐?”
일이 있다면 아랑에 관한 일일 것이고, 지금 그가 신경 쓰는 문제도 아랑이라는 걸 알지만 그는 모른 채 물었다. 맥주 넘기는 목울대만 눈치 없이 소리를 내고 있을 때 도현이 말했다.
“신아랑 이사 했다며.”
황급히 입에서 캔을 떨어뜨린 혁준이 애써 태연하게 답했다.
“아, 그래?”
“네가 도와줬다던데.”
혁준의 움직임이 멈췄다. 도현이 태연하게 맥주를 홀짝였다. 여전히 그에겐 눈길 한 번 안 준채 언젠가 보았던 푸르른 나뭇잎의 친구가 바람의 모진 장난에 떨어졌을까 바닥을 응시했다. 혁준이 어색하게 목소리를 냈다.
“아아, 기억이 나는 것 같다. 맞아. 잠깐 뭐 옮겨준 것 같기도 하고... 네가 그 날 바빴었나? 그러고 보니 널 못 본 것 같네.”
“비밀로 하기로 했다던데.”
혁준의 말문이 턱 막혔다. 도현이 말없이 맥주를 홀짝였다. 아랑을 찾아 마음고생을 했던 도현을 알기에 혁준은 괜히 그에게 미안해졌다. 그가 고민하다가 먼저 사과라도 해보려 입을 열었을 때 도현이 선수를 쳤다.
“신아랑이 날 피해.”
혁준에게 섭섭한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가 말했다. 혁준이 한숨을 쉬었다.
“피하는 덴 이유가 있겠지.”
“이유... 있지.”
느릿한 도현의 답에 혁준이 곧장 답했다.
“알면 내버려둬.”
“그러니까... 근데 왜 그게 안 될까?”
도현이 맥주를 입가로 가져갔다 도로 물렸다. 그런 도현을 보며 혁준이 진중하게 말했다.
“마음 없으면 더 이상 얼굴 보여서 뒤숭숭하게 하진 마라.”
“마음...”
도현이 생각에 잠겼다. 마음. 답답한 지금 마음을,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이 마음에 붙을 이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