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작 회의실.
" 자 거의 다 모인 것 같네요.
기획안은 다 읽어 보셨죠? "
" 네. 그런데요. PD님.
일단 기획안 읽어는 봤는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거 뭐 예전
프로그램 재탕하는 느낌이에요."
" 어딜 봐서 그런 느낌이야?"
" 어 그러니까 무속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그 대를 이어 받아서 가끔 귀신도 보고
그 귀신 한 맺힌 거 풀어 주고 뭐 그런 느낌의
프로그램 아니에요?"
" 비슷한데 조금 달라."
" 약간 토요미스테리 극장이나 이야기 속으로 같은
느낌이에요."
" 어 맞아. 비슷해."
" 사실 조금 진부하다는 느낌이……."
메인 작가의 반응에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귀남을 쳐다봤다.
" 그래.
나도 그런 느낌이 있긴 해."
" 요즘 시대에 이런 게 먹힐까요?
" 사실 이게 뭐 꼭 이목을 끌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미신 조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울인데 납량특집을 하려는 것도 아냐."
" 그럼 왜 갑자기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 하시나요?"
" 어 그러니까. 여론들의 추측과 억측들이 난무해서
그걸 해소? 또는 해명을 하고자……."
" 그러니까. 신PD님 그때 그 방송사고 해명하려고
무당들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드시는 거예요?"
메인 작가인 경신은 눈을 부릅뜨며 따져 물었다.
"……."
귀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볼펜만 돌리고 있었다.
" 아이고 작가님. 기획서 제대로 안 읽어 보셨네요."
동일이 나서서 대변하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작가님 말이 맞긴 한데 이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방송국이 정치권과 결탁해서
우리가 원하는 후보자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어요."
" 그렇다면 더더욱 신빙성 있는 기획을 해야죠.
이 기획안대로 만든다면 정말 웃음거리로 전락할 거예요.
그리고 섭외하기도 어려울 거예요. "
" 신빙성은 잘 모르겠는데 섭외는 끝났어."
이미 귀남은 어머니인 정옥과 얘기가 된 상태였다.
어머니는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시다가
결국 아들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 섭외가 끝났어요?
어떻게요?
기획 취지를 말씀 드렸는데도 하신데요?
이거 타격이 클 것 같은데……
촬영지는 어딘데요?"
" 어 우리 집에 갈 거야."
" PD님 집으로요?"
" 어 시골집에 가서 찍을 거야."
" 아 PD님 고향에 유명하신 분이 있는 거예요?"
" 어 우리 어머니가 무당이셔."
스태프들이 일제히 귀남을 쳐다봤다.
" 야야 우리 동네이기도 해.
귀남이랑 고향 같은 거 알지?"
동일이 나서서 분위기를 좀 바꿔 보려 했다.
냉랭해진 분위기는 풀릴 줄 몰랐다.
" 빠지고 싶은 사람들은 빠져도 좋아."
귀남은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편해 보였다.
" 야 빠지긴 뭘 빠져. 우리 회사원이야.
회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동일은 혹여나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 그럼 동일PD님 어머니도 무당이세요?"
" 어? 아니아니 난 아니야.
우리 어머닌 돌아가셨어.
엊그제 이장하셨어."
" 야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 없잖아?"
귀남은 깜짝 놀라 동일을 쳐다봤다.
" 나중에 어차피 그 얘기 촬영해야 해.
우리 엄마 이장한 거."
" 그걸 왜 해?"
" 야 그걸 왜 빼냐?
너희 어머니 능력이 발휘 된 순간인데.
우리 형도 인터뷰 해주기로 했어.
그때 있었던 친척들도 다."
" 그래. 애썼다……."
" 선배님 왜 말씀 안하셨어요?"
" 뭘?"
" 어머니 무속인 이라는 거요."
" 그게 뭐 자랑이라고 하냐?"
" 저 점 보는 거 좋아한단 말이에요.
내려가서 좀 봐 달라고 해야겠다."
" 저도 내년에 결혼해야 하는데
날짜 좀 잡아 달라고 해야겠어요."
" 저도 언제쯤 장가가는지 여쭤 봐야겠어요.
혹시 손금도 보시나요? 꿈 해몽도??"
" 야 그만! 지금 뭐 놀러 가니?
자 이거 장난으로 만드는 거 아냐.
사장님 특별 지시 사항이야.
이거 만들어서 내가 정치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해."
"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하고 가죠?"
" 뭘?"
“…….
“정치권과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느냐고?”
" 네. 진짜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으세요?
저희도 방송 만드는 사람들인데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제작할 순 없잖아요."
" 이야 언제부터 그렇게……
언론인의 사명을 갖고 일하셨나요?
그래 좋아. 한 가지 확실한 건
난 돈이 별로 없다는 거야.
내 모든 계좌를 오픈했어.
그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내가 직접 가서 오픈했어.
아무것도 안 나왔어. 됐지?"
" 사과 박스 이런 거 받은 적 없으세요?"
" 사과 박스?"
" 뭐 5만 원짜리 가득 채워서 줬을 지도 모르잖아요."
“맞아요. 요즘은 마늘밭에 바로 묻는 다던데?”
" 야 내가 그런 돈 받았으면 이 짓을 왜 하냐?"
귀남은 스태프들의 억측에 기가 찼다.
" 알겠습니다. 믿고 가겠습니다."
" 참나, 고맙다 진짜.
그러면 모레 새벽5시까지 집합 해 주세요."
" 그렇게 빨리요?"
" 4시간 정도 가 야해.
서두르지 않으면 길바닥에서 시간 허비해야 해."
" 알겠습니다."
# 이틀 뒤 방송국 앞.
" 야 왜 아무도 없어?"
"……."
" 동일아. 무슨 문제 있어?
무슨 일인데?"
" 아니 그게……."
" 말해 봐."
" 장부장 그 새끼가……."
" 장부장이 뭐?"
" 우리랑 같이 하겠다고 했던 스태프들
전부 나눠서 지원 보냈어."
" 아니 그게 말이 되냐?
우리 기획하는 거 비밀로 했잖아."
" 사람이 몇 명인데 그게 비밀로 되냐?
야, 어떻게 그렇게 하냐?
무슨 억하심정으로……."
귀남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참고 냉정함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 여기서 접자. 귀남아.
사실 그 사람들이 이걸 믿어 준다는 보장도 없잖아.
차라리 지금이라도 장부장한테 붙자 우리."
" 그러면 너도 그냥 발 빼라.
나 혼자 할 테니까."
" 귀남아!"
" 됐어. 화난 거 아냐.
나도 네가 걱정되어 그래.
나 때문에 너까지 곤란해지는 거 싫다. "
" 야 너 어디가?"
" 카메라 챙기러."
귀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장비실로 갔다.
" 아…… 저 고집쟁이를 누가 말리냐."
동일은 귀남을 뒤따라갔다.
" 오지 마."
" 야 나한테 왜 그러냐? 같이 가자."
" ……."
" 야 이거 둘이 촬영하는 거야?
대학교 졸업 작품 하던 거 생각나는데?
그때 생각나냐?"
동일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 보려 노력했다.
" 야 그때 같이 했던 애들이 30명도 넘어.
대학생도 아니고 공중파 방송국에서 이게 말이 되냐?"
" 그러니까 이거 안 되는 거라니까."
귀남은 동일을 흘겨봤다.
" 알았어."
" 조명은 어떻게 하냐?"
" 됐어 필요 없어."
" 작가는?"
" 작가도 필요 없어. "
" 지미집은?"
" 아이씨 무슨 영화 찍냐?
빨리 챙겨.
장부장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 일단 챙겨야 할 건 다 챙긴 것 같아."
" 빨리 나가자."
귀남과 동일은 필요한 장비만 빨리 챙겨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둘이서 가능할까?"
" 방법이 없잖아. "
" 그래. 해보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 야 잠깐만 전화 온다. 어머니네."
" 너 내려간다고 연락 안 드린 거야? 일단 받아 봐."
" 네. 어머니. "
" 아니 딴 게 아니고 어제 온 너희 후배 뭘 좀 두고 간 것 같아서."
" 네? 후배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세요?"
" 어제 네가 내려 보냈다는 후배 있잖아.
그 아가씨가 뭘 두고 갔어.
촬영할 때 쓰는 거 같은데?
중요한 거 아닌가 싶어서 아침 일찍 전화해 봤다."
" 집에 누가 왔었다고요?"
" 네가 보냈다고 하던데?
귀남이 너 바쁘다고 대신 왔다고 하던데."
귀남은 순간 머리칼이 삐쭉 섰다.
" 아 네……
제가 어제 좀 바빠서……
대신 후배를 보냈는데……
뭐 별일 없었죠?"
" 그래. 근데 촬영을 혼자서 왔더라.
이 험한 곳에 여자 후배를 혼자 보내면 어쩌느냐."
" 네. 죄송해요……
지금 직원 부족해서요.……
혹시 어머니 어떤 거 찍어 가셨어요?"
" 뭐 와서 집 주변도 찍고 신당 안도 찍고
네 방도 들어가고 나도 인터뷰하고
동네 사람들 몇 명한테도 하는 것 같더라. "
귀남은 뒤통수를 맞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 잘못된 의도로 기획하고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한다면
그 파급력은 감당이 안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네. 알겠어요. 어머니.
그 두고 간 건 중요한 거 아니니까
다음에 내려가면 주세요."
" 그래. 알겠다.
밥 잘 챙겨 먹고. 수고해라."
" 알겠어요......."
전화를 끊고 귀남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을 음해할 목적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통화 내용을 다 듣고 있었던 동일도
완전히 얼어 있었다.
" 야. 누굴까?"
"그러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 걱정 마. 너 잘못이 아냐."
" 난 괜찮아 어떻게 되도…….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잖아."
" ……."
" 인터뷰까지 다했데."
" 말도 안 돼."
" 동일아. 혹시 모르니까 형한테 전화해 봐. "
" 우리 형? 왜?"
" 너희 친형이니까. 그리고 넌 내 친구니까."
" 야 설마. 우리 형이 뭘 안다고?"
" 빨리 해봐."
" 알았어."
동일은 형인 동석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 어 형……."
"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야?"
" 어 물어볼게 있어서."
" 뭔데?"
" 형 혹시 어제 방송국에서 왔었어? 아니지?
누가 와서 촬영하고 그런 거 없었지? "
" 어제 촬영 왔었는데?
너희 바빠서 못 온다고 보냈다면서."
" 혹시 인터뷰도 했었어?"
" 당연하지. 귀남이 일인데 형이 해줘야지.
지금 귀남이 곤란한 상황이라며?"
" 어……."
" 내가 얼마 전에 귀남 어머니 말 듣고 이장까지 했다고
인터뷰 잘 했다.
야, 너희 아무리 바빠도 여자를 혼자 보내냐?
운전까지 손수 하고 왔더만."
" 우리 엄마 이장한 거 까지 말했다고?"
" 그래. 사실이니까. 네가 그거 꼭 말하라고 했잖아."
"아…… 알겠어 형.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귀남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야 어떡하냐?
누가 선수 친 거야?"
" 누가 찍은 게 문제가 아니야.
그걸 사실 그대로 방송으로 내 보내느냐가 문제지."
" 아무래도 큰 일 난 것 같다."
" 누구 집히는 사람 없어?"
" 한명 밖에 더 있냐……."
" 장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