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또 다른 시작이네요. 최기영을 어디서부터 추적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민서희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안경식은 갑자기 핸들을 손으로 탁 쳤다.
“맞다. 최진철이 그 행사라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안 됩니까? 그 사람이 최기영 사건 때문에 최기영이 주변 사람들 탐문했을 거 아입니까?”
“그럴까요? 그러죠 뭐. 참 그리고 최기영 학생 다이어리도 제가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볼게요.”
“그라입시다.”
하지만 이미 민서희는 어미 잃은 강아지처럼 생기를 잃고 있었다.
홍대 앞은 한 낮인데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잠만요. 쪼매만 물어보입시더. 여가 어덴지 압니꺼?”
“아 뭐야? 짱나게.”
“어디다 들어 밀어.”
손재영이었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이밀자 길을 걷던 화려한 차림의 아가씨 두 명이 인상을 구기며 도망쳤다. 박민용 교수의 집을 나온 그가 겨우겨우 구한 연락처였다.
“아 진짜 뭐야? 재수없게.”
그녀들은 손재영이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덜거리며 뒤를 흘금흘금 돌아보았다. 그녀들이 멀어지자 사람이 북적거리는 길에 홀로 남은 손재영은 또다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차.’
갑자기 손재영은 생각이 났다. 지금은 딸도 그녀들과 비슷한 나이일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나서 자랐다면 지금 저와 같은 모습일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만 원짜리 와 오만 원짜리 지폐가 만져졌다. 박민용 교수가 용돈 개념으로 조금씩 주었던 돈이었다. 그의 집에서 몇 년 남짓 기거하는 동안 적은 액수였지만 모아놨던 돈이었다. 지금은 꽤 상당한 양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두리번거리다 옷집을 발견하였다.
날이 어두워질 때쯤에야 결국 아파트를 찾을 수 있었다. 아파트로 들어서자 현관 입구에 붙은 거울이 보였다.
손재영은 다시금 자신의 모습을 돌아다보았다. 옷은 괜찮았지만 머리도 지저분하고,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아파트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자동식 문이라 열리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살피다 현관 입구에 설치된 벨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한 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는 장치로 되어있었다. 공중전화처럼 숫자로 된 버튼이 있었고, 호출, 경비 이런 버튼들도 있었다.
그는 그 장치에 적힌 글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집의 호수를 누르지 못했다. 아니 누르려고 시도는 하였다. 몇 번이나 손을 댔다가 떼었다가 하는 행동을 반복하였다.
드르륵
현관 자동문이 열렸다. 아파트 내부에서 웬 뽀글머리 아줌마가 한 명 나왔다. 손재영은 괜히 죄 지은 사람처럼 등을 돌리고 밖으로 나가는 척 하며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나 그 아줌마가 사라지자 다시 현관으로 돌아와 한참을 그렇게 망설였다. 다시 그 거울을 바라보았다.
‘머리도 깎고, 몸도 닦고 와야 안 되긋나?’
손재영은 그렇게 애써 자위를 하며,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 다음날 다시 아파트 현관에서 손재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전 날 저녁 찜질방에서 머리도 깎고 목욕을 하였기 때문에 전 날보다는 깔끔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오렌지주스 한 통도 들려있었다.
몇 번을 서성이며 현관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들어갈 듯 말 듯 망설이다가 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면 다시 돌아서 나오곤 하였다.
“어이 이봐요. 아저씨 뭐요?”
아파트 경비였다. 거의 두 시간동안 망설이는 손재영을 보고 아파트 경비가 수상하다는 연락을 받고 온 것이었다.
“아 예. 아입니더.”
손재영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뒤로 돌아 달아나려고 하였다.
“아닌 게 아닌데 뭐요? 당신 도둑이야?”
“아입니더.”
손재영은 뒤를 흘금 바라보고 다시 돌아서서 달아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파트 경비가 더 빨랐다. 어느새 손재영의 재킷을 잡고 있었다.
“아니 당신 뭐냐니까?”
“흠흠 그러니까 여기 이 주소로 친구를 찾을라꼬 왔심니더.”
손재영은 최대한 서울 말투를 쓰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더 이상하고 어눌한 말투가 되어 더 수상하게 보였다. 경비는 손재영이 내민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주소는 여기 맞네. 아저씨가 이거 조작하는 법을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내가 눌러줄게요.”
경비는 시골서 올라온 아파트 주민의 예전 친구라고 생각하고 손재영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띵동딩 띵동딩
맑은 벨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아파트 경비입니다. 여기 시골서 주인아저씨 친구 분이 오셨는데 어떻게 가는지 몰라서 헤매고 있길래 같이 왔습니다.”
“그래요? 누구세요?”
“아저씨 여기가 대고 말하면 됩니다.”
경비아저씨는 마이크를 알려주고 뒤로 빠졌다. 손재영은 망설이다가 앞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접니다. 손재영.”
“예? 손재영?”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뭔가 얘기하는 소리도 들렸다.
드르륵
현관문이 열렸다.
“아이고, 그럼 재밌게 놀다가세요.”
아파트 경비는 그렇게 인사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손재영은 열린 현관문 안으로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느리고 무거운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