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손가락이 하얀 건반을 누르자 한 음이 울리고 이어서 검은 건반을 누르자 조금 더 높은 음이 그 다음으로 따라온다. 텅 빈 강당 안에서 혼자 피아노를 앞에 두고 차례로 건반을 누르는 은지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다. 낮이라도 불을 켜두지 않으면 강당 안은 캄캄하다. 이른 아침시간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그 안에서 건반만 연신 눌러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지치고 힘겨웠다. 본인도 어렵게 발을 옮기는 처지에 민호는 은지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결국 서로의 집 중간쯤 되는 위치에서 헤어지기로 하고 돌아서는 은지의 뒷모습을 민호는 계속 바라본다. 그런 민호를 애써 무시하며 은지는 바삐 골목으로 들어섰다. 옥탑방으로 올라와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만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민호다.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해서.”
은지가 애써 목소리에 힘을 준다.
“이제 괜찮아졌어. 너는?”
“응. 아직 목은 칼칼한데 견딜 만 해. 온몸의 근육이 마구 쑤셔대는 것만 빼고 나쁘지 않아.”
“그런 일, ……, 치렀는데 몸이 힘든 거야 당연하지.”
“그래, 푹 잘 쉬고. 나중에 연락할게.”
“그래.”
전화를 끊고 은지는 한참을 더 그렇게 앉아 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민호가 잘못될 뻔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거의 손톱만큼만 보이는 달이 약한 빛을 뿌리며 하늘 가운데를 지나간다. 그 달이 가장 높은 곳을 넘어가도록 은지는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다.
새벽빛이 어스름한 시각. 은지는 눈을 떠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던 자신을 발견한다. 몸의 어느 한 곳이라도 쉽게 움직여주지 않지만 은지는 이를 악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옷을 갈아입고 강당으로 내려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한숨을 내쉬고 또 내쉰다. 입술에 힘을 줘서 오므렸다 뱉더니 손으로 깍지를 껴서 어깨를 풀어주고 건반 위로 손가락을 올린다. 천천히 건반을 눌러가며 음을 짚어가더니 짧은 소절을 연주한 후 이런 느낌이었나, 라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모든 근육을 이완시키듯이 몸이 늘어지게 만든다. 시간이 얼만치 흘렀을까 상체를 세우고 눈을 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댄다.
“도대체 내 머리에 뭐가 들어있다는 거야?”
이번에는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리듬을 타보다 가락에 맞추어 손과 발을 까닥인다. 끙, 한껏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몸 전체를 흔들어 봤다 춤인지 체조인지 모를 동작을 하며 나아간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보더니 급기야 손을 들어 어깨선에 맞춰 올리고선 마치 앞에 있는 사람과 맞춰 스포츠 댄스를 추듯 다리를 놀려가며 강당 안을 휘젓고 다닌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더니 낙담한 얼굴로 피아노 앞으로 돌아와 의자에 걸치듯 턱, 주저앉는다.
“나보고 어쩌라고. 멜로디는 무슨, 음계 하나도 기억 안 나.”
은지는 건반을 하나씩 짚어가며 음을 들어본다. 이 두 음이 섞였던가? 음계 조합을 해보다 스스로 멜로디를 지어내 연주를 시작한다. 한참 움직여가던 손에 힘을 강하게 주더니 양손으로 건반 위를 때린다. 벌떡 일어나서 강당 한가운데로 가 그 위로 드러눕는다. 이제 정말 지긋하다는 얼굴로 강당 바닥 위에 누워버린 은지는 손으로 눈을 가린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사표시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이 덮어놓은 손을 뚫고 들어오자 손을 내리고 흐릿한 눈으로 그 빛을 올려다본다. 휴, 하고 내쉬는 한숨. 이마를 쓸어 올리며 땅을 짚고 일어나 창 곁으로 다가간다. 닫혀 있던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빛이 더욱 강하게 쏟아지고 갑작스런 공기의 변화 때문인지 싸한 바람이 안으로 휙, 불어온다. 귓가의 머리카락을 흔들며 스치고 지나가 피아노 위에 놓여있는 악보들을 강당 안 곳곳에 날린다.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악보들이 한순간 저 위 공간에 머무르다 서서히 아래로 내려와 강당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한다.
은지는 얼굴에 맞는 바람이 기분 좋은지 잠시 가만히 서서 그대로 있더니 햇빛을 들이키듯 숨을 들이쉰다. 기지개를 켜며 돌아서더니 악보들을 따라 발을 움직인다. 바닥에 놓인 악보들을 하나씩 주워 올려 모은다. 모두 집어 한 묶음을 만들더니 가지런히 피아노 위로 올려놓는다. 그때 은지의 눈 안에 연단 앞쪽에 장식된 십자가상이 들어온다. 그걸 올려보다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기도하듯이 모은다. 숨이 깊숙이 들어갔다 뿜어 나오며 이어서 입술을 뗀다.
“하나님. 제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거지요. 주님 뜻에 맡기겠습니다. 주신 것도 주님이시니까 드러내는 것도 주님께서 해주시리라 믿을게요. 주님 도와주세요. 민호도, 저도,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에 석고상처럼 멈춰 한참을 있는다. 그렇게 은지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이 강당 옆 계단을 통해 표목사가 편한 복장을 하고 아래로 내려간다. 정해진 아침 시간이면 으레 나가는 산책이다.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그 버릇을 지켜왔다. 표목사가 계단을 다 내려와 길로 나선 후에도 은지는 움직일 줄 모른다. 이 아침시간, 누군가는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꼼짝을 않는다. 다가오는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만의 최선을 다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