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점심시간이 가까워져도 누구 하나 여유롭게 밥 먹으러 가자고 하는 사람이 없다. 수지가 일하는 사무실의 풍경은 항상 빠르게 바뀐다. 일이 없을 때는 월급 주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가하지만, 중요한 건수로 떠오를 사건이 터지면바로 전쟁터로 바뀐다. 특종을 먼저 기사화해 사람들 앞에 내어놓는 게 생명인 잡지사의 특성 상 일분일초를 다투는 일이 부지기수다. 거기다 마감날짜가 다가오면 초과근무에 야근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오늘은 그런 바쁜 날이고 밥은커녕 화장실도 마음대로 갔다 올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신수지 씨, 일한 지 지금 몇 년째야? 이거는 수지 씨가 찾아낸 것도 아니고 기사 물어다주고 취재해보라고 시킨 건데 아직 정리가 안 됐어?”
수지를 힐난하는 남자의 얼굴은 성이 나서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그 앞에 선 수지의 얼굴도 어둡다. 사무용지를 둥글게 움켜잡은 손이 앞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탁탁 쳐댄다.
“여기 봐봐. 인터넷 기사에는 이만큼 자세하게 올라와 있잖아. 먼저 앞서가지는 못해도 뒤처지지는 말아야지. 우리 회사가, 뭐, 노는 사람 공짜로 밥 먹여주는 덴 줄 알아. 빨리 가서 초고 만들어 와. 가 봐!”
뭔가 말대답을 할까 하다 그만두고 책상 앞으로 향하던 수지가 방향을 바꿔서 복도로 나서자 그 남자가 뒤에서 소리친다.
“일하라니까 또 어디 가?”
“잠깐 화장실이요.”
수지는 뒤따라올 잔소리를 피해 빠른 걸음으로 복도로 나선다. 화장실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좌변기 뚜껑을 덮더니 그 위로 걸터앉는다. 훅, 하고 입에서 바람이 새어나온다. 에이, 에 이어 욕설이 뒤따르고 머리를 사정없이 긁어댄다.
“어휴! 엄마한테 들은 거 솔깃해서 그거 먼저 하려다 받아놓은 거 잊고 있었네. 아니, 일은 넘치고 하도 정신없게 몰아대는데 머리가 반쯤 나갔다 들어왔다 할 수도 있지. 애들이 물에 빠진 얘기 얼마나 기사거리 된다고. 누가 밴댕이 소갈딱지 아니랄까 봐서. 확 때려치워 버릴까 보다.”
머리카락을 뒤집어 앞으로 늘어뜨리더니 그 안에 얼굴을 숨긴 채 앉아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을 한다. 고개를 들어 올려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더니 빠른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수신번호를 확인한 후 연결한다.
“어, 민호야. 어쩐 일이야?”
편한 자세를 취하려 휴대폰을 든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허리를 편다.
“잘 지내지. 회사 일 스트레스 받는 것만 빼고. 아니, 힘든 일 있다기보다 항상 겪는 그런 것들. 이 일이 원래 정신없이 바쁘고 열심히 해도 깨지고 그렇거든. 괜찮아. 시간 지나면 그런 일 있었는지도 모르게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반대편 손으로 산발이 된 머리를 매만지더니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쉽게 아예 두 다리를 겹쳐 변기 위에서 양반다리를 한다.
“그때 잘 들어갔어? 너도 많이 놀랬지? 나도 좀 황당하더라. 그 아저씨 뭐냐. 대낮부터 술 취해서 가족들한테 행패나 부리고. 딱 질색이야, 그런 술꾼들. 너는 그러지 마라. 아니, 네가 그럴 거라는 건 아니고.”
그만 손에서 미끄러진 휴대폰이 다리 사이로 떨어지자 얼른 집어 올리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 별로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네. 그 아줌마 그다지 좋은 기삿거리 줄 거 같지도 않고. 그 가족 얘기는 빼고 성당에서 미사시간에 부주의하게 일어난 사고 정도로 대강 버무려볼까 하고. 왜? 너는 다시 가야 돼? 아, 그렇구나. 열쇠 다 못하고 왔지? 맞아. 분해만 해놓고 달아놓지도 못하고 말야. 그 할머니 많이 놀라셨을 거야. 어, 그래. 뭐라고? 아, 거기 사고 난 곳. 왜 있잖아, 시내에서 남쪽으로 빠지는 방향으로 고속도로가 놓인 길에 물류창고랑 공장들 많이 들어서 있는 위치 어디쯤일 텐데. 차로 가면 고속도로 들어가서 바로고 완행버스 타도 오래 안 걸릴 걸? 왜, 거기 가보게? 홍민호, 너 완전 그런 얘기에 푹 빠졌구나. 아깝다. 내가 우리 회사에서 높은 자리 있으면 너 같은 애 바로 고용하는데. 누나 승진 빨리빨리 하라고 많이 기도해줘. 또 모르지. 그런 날이 올지. 하, 생각만 해도 기분은 좋네.”
복도에서 화장실로 들어서는 사람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데 수지는 대화에 집중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데 거기 요즘 차들이 안 다닌대. 그 사고 난 후에 근처에서 자꾸 사람들이 헛것을 보고 경미한 사고들도 발생하고 안 좋은 소문이 여러 가지 돌아서 차들이 일부러 돌아간다더라. 오죽하면 버스 기사들도 거기는 피한다던데. 우리 회사는 제대로 건수 잡았지. 얼마 전에 1차 기사 나갔는데 또 후발기사 기획하나 보더라고. 아니, 나는 물에 빠진 애들 기사 쓰라고 닦달이라 거기는 안 나갈 거야. 뭐라고? 그 집 무너졌어? 언제? 불이 나서? 언제 불까지 났대? 물에다 불에다 골고루 하네. 쳇, 들어가 보긴 글렀네. 또 상상력 동원해야 하나?"
휴대폰에 매달려있던 수지는 두꺼운 안경을 낀 여자가 화장실로 들어와 큰소리로 전하는 말에 황급히 민호에게 가봐야 한다, 며 통화를 종료한다.
“팀장님이 만들고 있냐, 고 전해달래요.”
“아, 무슨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 이젠 여기도 감시하냐고!”
“당장 끊고 안 나오면 회사에서 끊어버리신대요.”
말을 전한 여자는 혀를 날름 내밀더니 밖으로 나가버린다. 휴, 그리고 흐, 로 이어지는 숨 고르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문이 열리고 수지가 밖으로 나온다. 거울을 비춰보며 머리모양과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자신을 향해 말한다.
“그래. 오라는데 가준다. 나 없으면 일이 안 되나 보지.”
둔탁하게 울리는 타일 바닥 밟는 소리를 뒤로 하고 복도로 나서자 거의 스칠 뻔하며 한 남자가 서류를 든 채 지나쳐간다. 급한 걸음으로 복도를 왕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지는 창밖으로 눈길을 줬다 어깨를 펴더니 허리를 세우고 걸음을 뗀다. 전쟁터에 나서는 장수처럼 비장함이 서려 있다. 적을 치러가는 데 뒤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