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민호는 한 번 와봤던 길을 다시 오는 게 수월하다.
“사람이 일을 맡았으면 똑 부러지게 끝을 내야지. 넌 뭐하는 놈이냐? 일 마무리도 제대로 못하고.”
“사장님. 그게 아니라, 사정이 있었다니까요.”
지난 번 석재네 대문 자물쇠를 교체하는 일을 미처 끝마치지 못했던 민호는 변명을 해보지만 사장이 하는 타박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허사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과를 건네고 난 후 민호에게 일장 연설을 한다.
“고객에 대한 서비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그 신뢰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땅에서 지진이 나도 약속한 일을 해내는 걸 토대로 해서 쌓이는 거야. 기본이 안 되면 장사 못하지.”
“아니 그 날은요, 고객의 사정으로 일을 못 끝냈다니까요.”
훈시라는 건 주로 일방통행이 되기 쉽다. 훈시 받는 사람이 변명을 하거나 대들수록 훈시하는 사람의 심사는 더욱 뒤틀린다. 민호가 하는 얘기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 말대답을 하면 할수록 허사장의 목소리 톤이 더욱 높아지고 잔소리하는 문장의 길이는 늘어난다. 어렵사리 이어지는 말 고리를 끊어내고 허둥거리며 도망치듯 나섰던 발걸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을 되찾고 가끔 눈을 돌려가며 딴청을 피운다. 아는 길이라 지도를 확인할 필요도 없어 그만큼 시간이 절약되고 여유가 있다.
“여기 이런 것도 있었나?”
첫걸음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와 가다 서다 길에서 시간을 소비한다. 그러다 골목 한쪽에 자리한 금은방에 걸린 시계를 보며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라며 헐레벌떡 걸음을 서두른다. 낡은 담장길을 지나자 자물쇠가 있던 자리가 뜯겨져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대문이 보인다. 인기척을 내며 두드리자 문이 힘없이 안으로 쑥, 밀린다. 민호가 열린 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마루에서 노인의 머리를 빗겨주던 여자가 시선을 맞춘다.
“아, 안녕하세요. 저 다시 왔습니다.”
여자는 반가움과 쑥스러움이 섞인 얼굴 위로 미소를 짓는다.
“아유, 와줘서 고마워요. 두 번 발걸음 하게 만들고 미안해서 어째.”
방금 목욕을 마쳤는지 말간 얼굴의 노인은 눈을 동그랗게 떠서 민호를 바라보고 민호는 그 시선에 할머니 안녕하세요, 라는 말로 답한다.
“엄마, 지난 번에 봤잖아. 대문에 자물쇠 달아주러 왔었는데.”
민호는 대답이 없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서 자리를 잡더니 연장을 하나씩 보기 좋게 바닥 위로 나열한다. 자물쇠를 꺼내서 달릴 장소에 견주어보는데 장석재가 양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왔어요? 조금 전에 엄마 목욕 끝냈거든. 내 얼른 상 준비할 테니까.”
“천천히 해. 아직 참 먹기 이른 시간인데 뭘.”
석재가 민호를 향해 시선을 둔 채 그 옆을 지나쳐 마루에 오르자 여자가 빗질을 마무리 하며 말한다.
“자물쇠 달러 온 총각.”
안녕하세요, 하고 앉은 자세로 인사를 건네는 민호에게 석재는 아, 예, 짧게 답하고 손에 든 봉지를 내려놓는다. 여자는 궁금해 하며 가까이 있는 봉지부터 열어본다.
“이것들은 다 뭐야?”
“이따 저녁에 갈치 좀 구워봐. 물 좋아 보여서 몇 마리 샀어.”
“살이 제대로 오르긴 올랐네.”
여자는 얼굴에 희색을 띄우며 생선을 눌러보더니 그 옆 봉지로 손을 옮긴다.
“이것도 생선이야?”
흠, 석재가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노인을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장모님 신발 밑창이 뜯어졌다며. 노인네 신기 편해 보이는 걸로 하나 샀어.”
“와, 엄마 이거 봐. 사위가 엄마 신으라고 신발을 사왔네.”
봉지에서 한 켤레의 신발을 꺼내는데 그 옆으로 뭔가가 툭, 떨어진다. 여자가 그걸 바닥에서 주워들자 석재는 어색하게 웃는다.
“당신, 장모님 머리 가지고 불평 많이 했잖아. 손 많이 탄다고. 머리핀도 하나 샀어.”
“뭔 일이래. 하여튼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한다니까.”
여자는 손에 든 머리핀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빗겨 내려진 노인의 머리를 틀어 올려 핀을 꽂아준다.
“아이고 예뻐라. 엄마, 사위가 술에 취해 꿈에서 오빠한테 엄청 혼났다더니 사람이 변했네, 변했어. 내가 죽은 울 오빠 보인다고 겁낼 것이 아니라 자주 나타나라고 해야겠네.”
“으흠, 한 번이면 됐지 두 번은 싫어.”
머리를 긁기 위해 들어 올리는 팔 위에는 불에 덴 자국이 언뜻 보인다.
“얼마나 놀랐는지 오줌까지 지려오더니 그게 약이네, 보약.”
“어허, 이 사람이 손님 있는데 별 소리를 다하네.”
민호는 못 들은 척 자신이 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거의 마무리가 끝나고 문을 열었다가 닫아보며 양쪽 문 사이를 가늠하는데 석재가 민호에게 넌지시 묻는다.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던가?”
“네? 지난 번에 열쇠 달러 왔을 때 뵀어요.”
“그게 다인가? 그리곤 본 적 없어?”
“네, 에. 그런 적 없는 것 같은데요.”
민호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문을 잠갔다 열어보기를 반복한다.
“얼추 끝났는데 보실래요?”
여자가 일어서서 민호 옆으로 다가선다. 눈으로 확인하며 열었다 닫아본다. 석재도 그 뒤를 따라 일어서려는데 노인이 석재의 손을 덥석, 잡는다. 석재는 일어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노인에게 손을 잡힌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노인은 손을 꼭 쥐고 민호와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는 새로 단 자물쇠에 만족하며 민호에게 잠시만 기다리라며 지불할 돈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서다 손을 잡고 있는 석재와 노인을 발견한다.
“엄마, 사위가 최고지? 어찌나 좋은지 손을 꼭 잡고 계시네.”
노인의 시선이 방으로 들어가는 여자에게 이르렀다 민호를 지나 새로 달린 자물쇠에 머무르고, 그 모양이 신기한지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황금색을 띤 자물쇠가 햇빛을 받아 빛을 내자 노인은 석재의 손을 잡아끌며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간다. 석재는 잡힌 손을 어쩌지 못해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뒤를 따른다. 민호는 그런 노인의 행동에 따뜻한 미소를 보이며 잘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준다.
청명한 가을 하늘에서 기분 좋은 햇살이 그들 위로 내리쬐고, 그 빛을 받아 노인의 은발과 자물쇠가 반짝인다. 색은 다르지만 그 반짝거림은 함께 어울린다. 돈을 손에 들고 나오는 여자는 문 곁에 선 그들의 모습에 환하게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그 웃음도 빛을 받아 반짝인다. 집 안이 온통 빛으로 채워진 듯하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꽉 들어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