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렸구나.”
천유강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만약 여기가 현실이라면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정도로 온몸에 치명적인 상처가 가득했다. 다행히 사기적으로 높은 체력 재생률이 그의 상처를 서서히 치료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서 있기도 힘들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리는 천유강을 당군명이 안아 일으켰다.
서로의 눈빛이 눈동자를 넘어 심장에 닿았다.
“…….”
“…….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수많은 생각이 흐르고 흘러 마지막에 남은 말은 그저 익숙한 단어였다.
“집에 가자. 배고프겠다.”
“……응.”
하지만 둘의 귀가를 막는 것이 남아있었다. 바로 경악한 표정의 여왕이었다. 그녀를 본 당군명이 천유강의 귀에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줘.”
당군명은 천유강을 바닥에 눕히고 여왕에게로 향했다.
여왕의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전처럼 여유롭지는 못했다.
“넌, 넌 나를 헤치지 못해.”
“그렇지 않을걸? 네 뺨의 상처를 준 게 누군지 잊었어?”
그 말에 여왕은 자신의 뺨을 손으로 훑고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우연이야!”
“맞아. 그건 우연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여왕의 힘의 원천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모든 부정한 감정이다. 그런 감정을 담아 여왕을 상대했으니 그녀를 이길 리가 없었다.
당군명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담은 감정은 희생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이 파멸하는 것을 감수하는 숭고한 일이다. 그것이 여왕의 보호막을 뚫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가슴에 충만한 감성은 그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따스했다. 그건 천유강이 자신의 심장을 녹인 것과 같다.
그걸 느낀 여왕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이럴 순 없어.”
공격이 통하는 여왕은 무력하다. 레벨도 500이고 그녀가 뿜어내는 냉기는 당군명이 지닌 온기에 비하면 봄바람과 같다.
“경비! 거기 아무도 없느냐!”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안 여왕은 성의 병력을 이용하려 했다. 병력들도 레벨이 높지 않지만 일단 수가 많고 성의 버프를 받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여왕의 부름에도 달려오는 병력이 아무도 없었다.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여왕은 급한 마음에 창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상상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힘내! 여길 뚫는다!”
“한국 놈들에게 질 수는 없지! 우리가 먼저 뚫어버린다!”
그건 신지후의 데이브레이커 길드와 당자운이 끌고 온 중국 무림맹의 병력이었다.
“유강이와 군명 양을 구한다!”
당자운의 연락을 받은 신지후가 급하게 병력을 소집해서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당자운도 이곳에 갇힌 사람들의 문파를 중심으로 병력을 구성해서 왔는데 특이하게도 그 안에는 모용이현을 비롯한 이곳에서 도망쳤던 사람들도 참여해 있었다.
“비굴하게 살 수 없다.”
모용이현은 당자운과 함께 최전방에서 막으려는 경비병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활약 덕에 여왕이 있는 최상층에 아무도 오지 못했다.
그들의 음성이 전쟁의 함성을 뛰어넘어 당군명에게 닿았다.
“모두들…….”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 자신을 위해 싸워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도 있다.
숨통을 죄여오던 추위 덕분에 할아버지를 만났다. 자신을 가둔 얼음 덕분에 다른 이들의 진심을 알았다.
자신의 힘이었던 얼음이었지만 적과 함께 자신의 몸도 함께 얼리는 단점이 있었다. 그건 무의식중에 자리 잡은 공포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엇도 자신을 두렵게 할 수 없다.
그 순간 깊은 내면에서 무언가가 새어 나와 몸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세포 곳곳에 남아있던 녹슨 얼음들이 서서히 녹아 맑은 물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달성된 탈각의 경지다.
“자, 잠깐!”
여왕은 뒷걸음질 쳤지만 도망갈 공간은 없다. 단군명의 검이 여왕의 비명을 삼키고 목숨마저 거두었다.
[퀘스트가 클리어되었습니다.]
여왕이 허무하게 쓰러지자 병사들의 움직임이 멎었고 얼어있던 동상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다시 심장이 뛸 거다.
“유강.”
당군명은 천유강을 일으켜 세웠다.
“와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지.”
오늘따라 천유강의 웃음이 많아졌다. 그 모습에 당군명도 애써 미소를 지었다.
“웃었네?”
천유강도 보기 힘든 당군명의 미소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눈가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웃으라고 했잖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쉬운 걸 미련이 남을 정도로 하지 않았던 것이 바보 같았다.
“피 묻었어.”
당군명이 피로 엉기고 제멋대로 헝클어진 천유강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당자운에게는 자주 해주던 일이나 다른 남자에게는 처음 해주는 일이다.
그 순간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
“…….”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서로의 코를 간질였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천유강의 손이 당군명의 허리를 감고 당군명이 천유강의 어깨를 잡았다.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벌컥!
“누나!!!!”
당자운이 문을 박차고 나타났다.
“누나 괜찮아?! 뇌호는 왜 저래? 죽었어?”
그 말에 빠르게 바닥으로 슬라이딩했던 천유강이 주섬주섬 일어섰다.
“……아니.”
“너도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누나, 괜찮아? 얼굴이 빨게.”
“……괜찮아.”
당군명과 천유강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지만 당자운이 그 의미를 알아차릴 정도로 눈썰미가 좋지 못했다.
그렇게 여왕 공략이 마무리되었다.
“카이!!”
“게르다!!”
약속한 대로 카이도 얼음 동상에서 해방되었다. 게르다는 다시 돌아온 친구를 안고 펑펑 울었고 천유강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 뒤로 일사불란하게 뒤처리가 진행되었다. 여기 영지는 중국 측이 가졌고 따로 공문을 보내서 천유강과 데이브레이커 길드에게 감사의 표시를 보냈다.
문제는 당군명이었다. 원래는 이 일이 잘 마무리되면 무림맹에 정식으로 들어오기로 했었다. 결과는 좋았지만 살아 돌아온 쪽의 반발이 심해서 맹에서도 골머리를 앓아야 했는데 덕분에 당군명의 무림맹 가입은 흐지부지돼 버렸다.
하지만 당군명은 개의치 않았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무림맹에 정식으로 입맹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쏟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자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군명은 천유강의 영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녀의 활약이 알려지자 중국인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고 대우고 달라졌다.
처음에는 맹에서도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당사자였던 모용이현이 잘못을 인정하고 버렸던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일이 있고 난 뒤로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얼음 동상에서 풀려난 일원의 가문에서 직접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고 죄를 지은 자들은 그녀의 앞에서 눈도 들지 못했다.
그리고 당군명은 오늘도 천유강과 대련을 했다.
챙!
탈각의 경지를 이루면서 완전해진 당군명이다. 이제는 그녀의 얼음이 본인의 몸을 얼리는 일이 없어졌는데 특이한 것은 원래는 어두웠던 그녀의 얼음이 수정처럼 맑아졌다는 점인데 오히려 위력은 더 강해졌다.
그러니 이제 대련에서 밀리는 건 천유강이었다. 천유강의 기세가 약해졌다고 생각한 당군명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봐주는 거야?”
“네가 강해진 거야.”
“흠~ 원래 내가 더 강했다?”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
대련은 더 치열해졌지만 둘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배연아나 당자운이 봤다면 뒤로 넘어갈 거다.
얼음 성에서 있었던 무언가에서 둘의 관계가 더 진전하지 않았다. 최소한 육체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서로를 위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같이 땀을 흘리며 같이 목표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둘의 첫걸음이다.
“내기할까?”
“무슨 내기?”
“진 사람이 저녁 굶기.”
“……그건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