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힘의 우열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아직 모자라.’
짧은 시간에 막대한 사기를 모았지만 그것으로도 저 강력한 기사와 대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은 이곳이 사기가 가득한 공간이라서 힘이 계속 충전되기 때문이다.
힘으로 되지 않는다면 답은 하나다. 기술로 이겨야 한다.
‘부탁한다, 레오닉의 기억아.’
스켈레톤의 몸으로는 천유강의 주특기인 조공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계속 검을 사용했다. 익숙하지 않은 무기로 이제까지 계속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레오닉 기억 속의 검술 덕분이다.
레오닉은 평민 출신 기사다. 그래서 원래 가진 검술은 보잘것없었다. 처음에는 검을 쥐는 법도 몰라서 손이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휘두르기만 했다.
퇴물이 된 용병에게 술을 사주고 검술을 배웠고 기사들이 훈련할 때 어깨너머로 훔쳐봐 검법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무리 레오닉이 천재라도 해도 여러 가지를 짜깁기해서 만든 누더기 검술로 고명한 기술을 익힌 기사들보다 강해질 수는 없었다.
그건 레오닉이 수년 동안 전장에서 구르면서 깨달은 사실이다. 출신의 한계 그리고 배운 것들의 한계 때문에 강해질 수 있는 실력의 한계가 있었다.
레오닉은 절망하고 식음을 전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목표에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었다.
그렇게 폐인처럼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다가 우연히 작은 벌레가 자신보다 더 크고 힘센 벌레를 사냥하는 것을 보았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작은 벌레는 큰 벌레를 정확하게 노렸고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체구가 상대적으로 작았기에 가능한 사냥 방법이었다.
그것을 보고 영감을 받은 레오닉이 다시 검을 잡았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이기는 법을 익혔다. 느린 자가 빠른 자를 이기는 법을 익혔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는 법을 익혔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보다 강해질 수 없지만 그들을 이길 수 있었다.
더 이상 용병 일이 불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당시 에드워드 백작가의 기사 단장이었던 헨슨의 눈에 들어 영지병이 되었고 백작의 배려로 에드워드 가문의 검술마저 습득하게 되었다.
원래 익히고 있던 검로에 에드워드 백작가의 전통 있는 검술이 더해져 지금의 레오닉이 탄생했다.
지금 천유강은 베나자르보다 작고 느리고 약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움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쾅!!!
천유강의 검에서 검은색의 사기가 피어올랐지만 베나자르의 검강에 안개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흩어져도 다시 채워지는 사기 덕분에 강철도 수수깡처럼 잘라버리는 강기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크크큭! 그래 이 기분이야. 전의 싸움에도 이렇게 내가 당했지.”
레오닉과 싸울 때는 마치 허깨비를 상대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닿을 듯했지만 닿지 않았고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날카로운 반격이 날아와 뒤로 물러서야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에도 자신의 검술이 레오닉에게 밀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패자는 자신이었고 승리한 레오닉이 모든 것을 가져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를 거다!”
몇 날 며칠을 두문불출하며 레오닉을 이길 방법을 강구했다. 스스로 만든 심상 속에서 레오닉과 싸우고 또 싸웠다.
오늘을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오닉도 과거의 레오닉이 아니다.
‘점점 검술이 익숙해지는군.’
레오닉의 기억과 합쳐져 있는 건 고금제일 무학이라고 불리는 천부경의 천유강이다. 레오닉이 강자를 이기는 약자라면 천유강은 강자를 먹어치우는 괴물이다.
강자를 먹고 더 강해진다. 그렇게 천유강은 성장했다.
쾅!!!
양쪽의 기사들은 자신의 대장이 불리해지면 언제든지 참전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오산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 싸움에 감히 끼어들 수 없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그들이 내는 기운에 휩쓸려 가루가 될 거다.
그만큼 천유강과 베나자르의 싸움은 치열했다.
천유강과 베나자르가 지닌 검은 한 손으로 쓰면 한 손 검이 되고 두 손으로 사용하면 양손 검이 되는 바스타드 소드다.
그래서 때로는 한 손으로 때로는 양손으로 바꾸어가며 현란한 검술을 선보였다. 스치기만 해도 팔다리가 잘릴 무서운 기운들이 허공을 수놓았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크하하하! 이게 내 라이벌이지! 레오닉! 더 나를 기쁘게 해다오.”
“집착하는 남자는 인기 없어.”
아무리 강대한 자라고 해도 기운을 끊임없이 사용하면 지칠 수밖에 없다. 베나자르와 천유강도 마찬가지였는데 지쳐갈수록 끝이 가까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느낀 둘은 동시에 모든 힘을 검에 쏟아부었다.
“이것이 내 전부다. 할 수 있다면 받아봐라.”
“얼마든지 덤벼라.”
베나자르의 검이 강기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베나자르의 검은 돈 주고도 사기 힘든 희대의 명검이다. 그런 검이 강기의 밀도를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천유강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가진 사기를 한 점으로 모았다. 몸에 있는 사기만이 아니라 신전에 떠돌고 있는 사기까지 모두 빨아들였다.
부웅!
단 한 수였다. 거대한 기운과 기운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고 그 여파로 대기하던 기사들도 밖으로 밀려갔지만 놀랍게도 어떤 소음도 없었다.
관전하던 기사들도 누가 이긴지 헷갈리고 있을 때, 고요 속에서 베나자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큭큭큭! 내가 이겼다.”
베나자르의 검이 천유강의 가슴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덕분에 천유강의 가슴뼈는 남아있지 못했고 부서진 뼛조각만이 흉측하게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베나자르의 검이 더 빠르고 더 강했다. 레오닉의 기술과 천유강의 천부경으로도 베나자르의 마지막 수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 자네가 이겼어. 내가 졌다.”
“큭큭! 내가 최강이야.”
“.......그래. 자네가 최강이야.”
천유강의 검은 베나자르의 검이 지나간 이후 한발 늦게 휘둘러졌다. 그리고 그 검은 지금 정확히 베나자르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털썩!
베나자르의 무릎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신전을 울렸고 그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조금 아쉽군. 한 번 더 싸우면 더 신명 나게 싸울 수 있을 거 같은데.”
천유강은 베나자르에게 다가가 그를 곱게 땅에 눕혔다. 천하제일의 검수다. 그런 그가 꼴사납게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나도 우리의 싸움이 일승일패, 무승부로 남는 것이 아쉽군.”
“큭큭! 못다 한 승부는 저세상에 하지. 내가 먼저 가 있을 테니. 천천히 따라 오라고.”
“.......알겠네.”
강한 눈빛으로 천유강을 응시하던 베나자르의 손이 툭 하고 떨어 졌다.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던 위대한 기사가 그렇게 천유강의 품 안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천유강은 그의 눈을 감겨주고 대기하고 있던 바르샤 후작의 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정중히 모셔가라. 그리고 그가 승리했고 다시 천하제일의 칭호를 획득했음을 만천하에 알려라.”
베나자르의 죽음을 믿을 수 없는 기사들은 천유강의 말이 끝나고 난 후에야 그의 시체를 수습했다.
에드워드 기사단이 천유강을 믿었던 것처럼 바르샤 기사들도 베나자르를 믿었다. 그랬기에 굳게 닫힌 입술을 열지 않았다.
“내가 스켈레톤이 아니었다면 여기 쓰러져 있는 것은 분명 나였을 거야.”
보통 사람이라면 가슴이 베인 순간 모든 힘을 잃고 검을 놓쳤을 거다. 하지만 천유강을 움직이는 것은 뼈도 아니고 근육도 아니다. 주변에 떠돌고 있는 사기, 죽음의 에너지다.
덕분에 천유강은 가슴뼈가 동강 나도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이 신전에 사기가 충만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그를 쓰러트릴 수 없었을 거다. 그만큼 그의 마지막 수법은 놀라웠다.
하지만 상황은 천유강이 한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거~ 이거~ 놀랍군.”
반사적으로 돌린 곳에 바르샤 후작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분명 바르샤 후작이 맞는데 그에게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천유강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영애다.
“영애는 어떻게 됐지?”
“그건 나도 궁금하군.”
베나자르가 천유강에게 쓰러진 상황이다. 가슴뼈가 모두 부서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이곳에서 천유강을 위협할 인물은 없다. 하지만 바르샤 후작은 묘하게 침착했다.
허세 같은 것이 아니다. 저 후작이 그런 뻔한 수작을 벌일 리 없다.
“무슨 소원을 빌었지? 이 나라의 왕이라도 되려 한 거냐?”
“왕? 큭큭큭! 순진하군. 파르테논 신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주지. 그런데 고작 왕이 된다고?”
바르샤 후작은 손을 들어서 천유강을 가리켰다.
“내가 무엇을 빌었는지 궁금하다고?”
그 순간이었다. 보이지 않은 어떤 힘이 천유강의 전신을 옭매기 시작했다.
“크윽!”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 힘은 천유강을 공중으로 띄웠다.
“하하하!! 보아라. 이것이 내가 얻은 힘이다!”
“큭!!!”
천유강은 가진 모든 사기를 사용해서 그 미지의 힘을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덕분에 대부분의 사기를 잃었다.
“흐음~ 역시 아직은 힘을 다루는데 미숙하군. 좀 더 연습할 필요가 있겠어.”
바르샤 후작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새로 얻은 힘을 만족해했다.
“힘? 힘을 얻었다고? 하지만 당신이 더 힘을 얻어서 무엇을 할 생각이지?”
바르샤 후작은 비록 지금은 후작이지만 왕국 내에서는 공작보다 더 강한 힘과 권력을 지니고 있다. 바르샤 후작이 공작이 되지 못한 것은 그의 힘을 두려워하는 왕과 귀족들 탓이다.
그런 바르샤 후작이 더 많은 힘을 탐한다는 것이 이해 가지 않았다.
“멍청이. 내가 고작 힘을 얻고자 이런 일을 벌인 줄 아냐?”
“그럼?”
그 말에 바르샤 후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난....... 신이 되었다.”
충격적인 발언에 천유강은 한순간 말을 잃었다.
“신? 인간이 신이 되었다는 말인가?”
“세월과 권력은 무상하지 처음에는 불로불사를 원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더군. 바로 내가 신이 되어 모든 것을 통치하는 거지. 이제 모든 것들은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큭큭! 난 지금 신도가 하나도 없는 하급신이다. 그런데 봐라.”
다시 바르샤 후작이 손짓을 하자 천유강이 형편없이 뒤로 물러났다.
“최강이라는 불리는 자를 손 하나로 쥐고 흔들 수 있지 않은가?”
신이라는 존재는 그들을 믿고 떠받드는 신도가 없으면 현세에 미치는 영향이 약화된다. 그런 후작이 지금도 이 정도인데 유적 밖으로 나가서 자신을 따르는 신도를 만들면 얼마나 더 강해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천유강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멈추고 일어서서 검을 쥐었다.
“너의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바르샤 후작!”
“크크크! 내가 아직도 후작으로 보이나? 보아라! 내 힘을!”
그가 손짓하자 이번에는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며 신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일행이 있는 이곳의 천장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지직!!
마치 거인이 산을 반으로 가르는 듯한 모습이다. 이내 파란 하늘이 나타나더니 천유강과 일행들이 서 있는 땅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어?”
그리고 아직 밖에서 싸우던 병사들까지 그 기괴한 광경을 보고 싸움을 멈췄다.
“와하하하!!! 드디어 내가 신이 되었다. 이제 만물이 내 손안에 들어왔어.”
바르샤 후작이 손을 흔들자 천유강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밖으로 떨어졌다.
“네가 첫 번째 재물이다. 처음으로 벌하는 이가 천하제일이라면 나쁘지 않지.”
바르샤 후작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다시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우지직!!!
거대한 압력이 천유강을 짓눌렀다. 사기로 급히 몸을 보호하지 않았으면 온몸이 으깨져 버렸을 거다.
“네가 시작이다.”
한편 바르샤 후작과 같이 들어갔던 영애는 아직도 파르테논 신과 대면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투명한 영상이 띄워져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서 후작과 천유강이 싸우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어서 저놈을 죽여 주세요!!!”
영애는 아까부터 계속 파르테논 신에게 바르샤 후작을 죽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르테는 신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들어주는 것은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다. 네가 가장 바라는 소원이 아니면 들어줄 수 없다.]
“그러면 저도 후작처럼 신으로 만들어주세요. 그래야 저놈을 해치워버릴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 말에도 파르테논 신은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다. 그건 너의 진실한 소원이 아니다.]
“도대체 제가 바라는 소원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그것을 알려주세요.”
[그건 네가 깨달아야 한다.]
그 순간에도 천유강의 몸은 점점 부서지고 있었다. 막대한 사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강림한 신의 신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영애는 절규했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