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관병들이 진광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지 의심이 들었지만, 장소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양허리에 찬 두 자루의 보검 중 하나를 풀어 건네주었다.
"이 검은 제 것이 아니니 진광 스님께 돌려주겠어요. 다만, 자칫 우리 아미파와 내 사매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으니 이를 유념하시기를 바래요."
장소연이 건네주는 보검을 받아든 진광은 걱정말라는 듯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만약 왕부인께서 이 검으로 인해 난처해지신다면 왕부인의 남편이시자 백련교의 총교수이신 제대협께서 거병을 앞당겨 일으키실지도 모르니, 이는 오히려 장낭자께서 바라던 바가 아니겠소?"
백련교 총교수 제림이 거병을 일으킬 것이라는 말은 진광이 유청원에게 들은 말이었다.
장소연은 진광의 말을 듣자 제림이 거병을 앞당겨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바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요. 진광 스님께서 알아서 하시리라 믿겠어요."
이 무렵 왕총아, 요지부, 제국모는 양양성의 성루(성문 위에 있는 누각)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양양성에서 거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호북성의 순무가 관군을 이끌고 오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바로 이때 진광이 허리에 보검을 찬 채 성문으로 다가오자 성문을 지키는 관병이 진광이 찬 보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양양성은 비상사태라 검을 차고 성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 검은 우리 관병이 압수하겠다!"
관병이 손을 내뻗어 진광이 찬 보검을 압수하려 하자, 진광이 피가 흥건히 묻은 자신의 도포를 가리키고 나서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이 몸은 소림 제자로, 양양성 근처에 있던 백련교도의 무리들과 한바탕 혈전을 치른 후에 이를 관청에 신고하기 위해 양양성에 온 것이니, 그냥 들여보내 주시오."
소림 제자라는 말에 관병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관병은 소림 제자인 진광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내, 성문을 관할하는 수문장 나리께 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보고하고 오겠소."
이때였다.
"진광 스님!"
성루에 있던 요지부가 진광을 보고 외친 것이다.
요지부가 성문을 지키는 관병들에게 외쳤다.
"진광 스님은 소림 제자이시니, 어서 들여보내게."
양양 관청의 지현 제림의 대제자인 요지부가 나서자 관병들은 아무 이견없이 진광을 통과시켜 주었다.
"진광 스님께서 양양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요지부가 성문으로 마중나와 인사하자 진광이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지부, 오랜만이오. 내, 왕부인께 전해드릴 것이 있으니, 왕부인을 뵙게해 주시오."
요지부는 진광을 성루에 있는 왕총아에게 안내했다.
진광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왕총아에게 인사한 후 보검을 건네주었다.
"소승은 소림 제자 진광이라 하오. 이 검은 소승이 말과 교환해 맡고 있었던 것이니, 이제 왕부인께 돌려주겠소."
진광으로부터 보검을 건네받은 왕총아는 보검을 쥔 채 두 손을 모아 진광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 검을 맡기고 스님의 말을 빌린 제가 마땅히 소림을 찾아가야 하는 일인데, 수고스럽게 스님께서 저를 찾아오시도록 만들어 참으로 송구할 따름입니다."
왕총아가 고개를 숙이자 진광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송구하긴요, 소승이 허락도 없이 왕부인께서 맡긴 검을 사용하였으니, 소승이 왕부인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리 된 것이니 아무쪼록 왕부인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왕총아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보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용서라니요, 스님께서 저를 괴롭혔던 건달패들을 이 검으로 징계하셨으니, 오히려 제가 스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을요."
왕총아는 진광이 자신의 보검으로 자신을 모함했던 건달패들 중 십여 명을 베어버린 것이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왕총아가 미소짓자 진광도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불문에 몸담은 소승이 살계를 범하였으니 지옥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을 듯하나, 무공이 천하무쌍이신 왕부인을 괴롭혔던 자들이라면 수많은 연약한 여인들을 괴롭혔을 터, 백번 죽어도 마땅한 자들이 틀림없겠군요."
왕총아는 무공이 천하무쌍이라는 진광의 말에는 수줍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백번 죽어도 마땅한 자들이라는 진광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건달패들은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을 일삼으니, 하늘이 스님을 통해 천벌을 내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광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제를 바꿔 말하려는 듯 운을 떼기 시작했다.
"여하튼 소승이 왕부인의 분을 풀어준 듯하여 다행입니다만,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순간 왕총아는 진광에게 중요한 할 말이 있음을 깨닫고 물었다.
"스님께서 우려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왕총아가 진광을 응시하며 묻자 진광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건달패들 중 십여 명이 소승에게 죽음을 당한 것을 앙심을 품고 또 다시 간악한 음모를 꾸밀까봐 걱정되는군요."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하기사, 저 건달패들은 앙심이 없어도 온갖 간악한 음모를 일삼는 자들이니......"
이 말을 하고 진광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왕총아, 요지부, 제국모에게 차례로 인사했다.
"소승은 이만 떠나겠습니다."
진광이 떠나자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제국모가 나섰다.
"그 건달패들은 양양의 곡예꾼들에게 시비를 일삼아 돈을 뜯어낼 뿐만 아니라 미색이 빼어난 여인들을 백련교도로 모함하여 자신들의 종으로 만들고 관청의 포상금을 타내는 천하의 간악한 악당들로, 그렇지 않아도 숙부님께서 이곳 양양 관아에 부임하실 때부터 체포하여 사형시키려 했던 자들인데, 진광 스님께서 관아를 대신하여 징벌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제림의 조카인 제국모는 제림의 최측근으로 관청에서 처리하는 사소한 일들까지 알고 있어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말한 것이다.
제국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총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역시 그 건달패들은 파렴치한 모함으로 연약한 여인들을 자신들의 종으로 만들려 하는 간악하기 짝이 없는 악당들이었군요."
왕총아의 얼굴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건달패들이 자신과 어머니에게 터무니없는 시비를 건 것도 모자라 이들 모녀를 백련교도라 관아에 고발한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연약한 여인들에게 몹쓸짓을 일삼는 건달패들은 관청에서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사모님께서는 마음쓰지 마소서."
이때서야 요지부가 나서서 흥분한 왕총아를 진정시키려 하자 제국모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었다.
마음쓰지 말라는 요지부의 말에도 왕총아는 울분을 참을 수 없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관청에서 그 몹쓸 건달패들의 만행을 알고도 여지껏 처벌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왕총아의 물음에 요지부가 나섰다.
"관청에서 조사한 바로는 화효공주의 시아버지인 화신이 그 건달패들의 뒷배를 봐주는 것으로 드러나 부득이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왕총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화신이 있는 한, 섣부르게 그 몹쓸 건달 패거리들을 처벌할 수 없겠군요."
몹시 분한 듯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왕총아는 뭔가를 결심한 듯 손에 든 보검을 어루만지며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간악한 무리들이 연약한 여인들을 백련교도로 모함하여 종으로 만들고 포상금을 타내는 파렴치한 만행을 막으려면, 하루 빨리 거사를 일으켜야 할 것 같군요."
왕총아의 말에 동의하듯 제국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님의 말씀, 백번 지당합니다. 간악한 무리들이 날뛰는 이 썩어빠진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우리 백련교 형제 자매들이 한마음으로 거사를 일으켜 만주족 조정을 쓰러뜨리고, 새로운 조정을 세우는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왕총아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나의 일생을 바쳐서라도 기필코 거사를 성공시켜 한족이 다스리는 공의로운 조정을 세워야 할 것이다. 틀림없이 지부의 뜻도 나와 같을 것이다.'
이때 왕총아의 시선은 요지부를 향하고 있었다.
요지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왕총아는 자신이 제림과 가혼례식을 올린 이후 요지부의 태도가 예전과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머리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지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다른 것 같은데, 이유라도 알아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구나!'
왕총아는 제국모가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하는 생각에 제국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국모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왕총아의 속내를 짐작조차 못한 제국모는 왕총아의 말에 따르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모님께서 하명만 하시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왕총아는 손에 든 보검을 내밀며 말했다.
"이 검은 사람들의 눈에 뜨이면 좋을 게 없으니 관청의 은밀한 곳에 숨겨 주세요."
제국모가 관청에 다녀올 동안 요지부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으로 궁리해낸 것이다.
왕총아는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제국모가 눈치챌까봐 검집에서 검을 뽑아 검에 묻은 핏자국을 살펴보며 딴청을 부리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주신 소중한 검이니, 검을 숨기기 전에 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피묻은 흔적을 없애버리면 좋겠군요."
검을 은밀한 곳에 숨긴다면 피가 묻어 있어도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만큼 왕총아는 요지부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