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기군 행렬에서 소림 승려들과 북경으로 행군하고 있는 왕총아와 요지부는 마치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떨어져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속삭였다.
요지부가 먼저 말했다.
"그대가 북경에 가봤자 좋을 게 없소. 사부님과의 혼담을 핑계대고 떠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왕총아는 혼담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떨 정도였다.
"혼담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요지부는 좋은 생각이 없을까 생각하다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왕총아에게 물었다.
"허면 이제 어찌할 생각이오?"
왕총아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들 알겠어요?"
요지부는 아무래도 화림이 꿍꿍이가 있는 것만 같아 물었다.
"혹여 화림이 꿍꿍이가 있어 그대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라면 어찌할 생각이오?"
"화림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화림의 속마음을 그대가 어찌 알겠소?"
"일단 두고 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정말 괜찮겠소?"
"소림의 장문인이신 혜명 대사와 함께 있으니 별 일 없을 거예요."
"화림을 믿지 마시오."
왕총아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왕총아가 보기에도 화림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왕총아는 화림이 자신에게 흑심을 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로부터 며칠이 지나 팔기군 행렬이 북경의 성문에 이르자 왕총아와 요지부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꺼운 철판이 씌워진 성문은 대포를 맞아도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왕총아와 요지부가 놀란 시선으로 성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끼익' 하는 쇠소리를 내며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팔기군의 행렬이 성 안으로 들어가자, 소림의 장문인 혜명 대사가 화림에게 작별을 고했다.
"소승들은 이만 떠날까 하오."
소림 스님들과 자신과 요지부를 순순히 보내줄 것이라는 왕총아의 예상과는 달리 화림은 고개를 저었다.
"소림의 승려들이 있었기에 감히 백련교도들이 그들의 수괴 송지청을 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이 아니겠소? 내, 황제 폐하께 소림 승려들의 공을 아뢸 터이니, 북경에 들렸다가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소승들은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니, 공이라 할 것도 없소이다. 이제 소승들은 임무를 마쳤으니 이만 돌아가겠소."
"어허, 이 화림의 체면을 봐서라도 북경에 들렸다가 돌아가시오."
혜명 대사는 화림의 거듭되는 호의를 뿌리칠 수 없었다.
"대장군의 뜻을 따르겠소이다."
왕총아는 돌아가겠다는 소림의 장문인을 거듭 만류하는 화림이 어쩐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지부의 말대로 화림이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이날, 화림은 곧바로 자금성으로 들어가서 건륭제를 알현하였다.
"소신 화림, 황제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서천 백련교 수괴 송지청을 잡아오느라 수고했다."
건륭제는 유지협을 놓친 죄를 문책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화림을 안심시키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림은 건륭제가 자신을 문책할 뜻이 없음을 알자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절을 했다.
"황공하옵니다."
건륭제가 뭔가 생각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물었다.
"송지청을 회유할 수 있겠는가?"
건륭제는 송지청을 죽이기 보다 회유할 생각이었다.
유지협, 송지청을 비롯한 백련교 우두머리들을 회유할 수 있다면, 우후죽순처럼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백련교도들을 회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소신이 이미 송지청을 회유해 보았사오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회유가 불가할 듯하옵니다."
건륭제가 가소롭다는 듯 '흥'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화림에게 말했다.
"짐이 송지청을 직접 만나보겠다."
화림은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폐하......"
결심을 굳힌 건륭제가 화림을 재촉했다.
"어서 짐을 송지청이 하옥되어 있는 곳으로 인도하라."
꽁꽁 묶인 채 감옥에 갇혀 있던 송지청은 화림과 함께 찾아온 건륭제를 보고도 마치 아무 것도 못본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화림이 보다 못해 삿대질하며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어서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추지 못하겠느냐?"
화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지청이 고개를 뻣뻣이 세운 채 위풍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나라 황제를 말하는 것이냐? 나 송지청은 오직 한족의 황제를 섬길 뿐이다."
화림은 송지청이 건륭제 앞에서 순순히 고개를 숙이지 않으리라 예상했었지만, 이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화림은 혹여 건륭제의 노여움이 자신에게 떨어질까봐 안절부절못하며 호통을 쳤다.
"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 따위 망발을 지껄이느냐?"
격노한 화림의 말에 송지청이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응수했다.
"한족의 백성이 한족의 황제만 섬기겠다는 것이 어찌 망발이냐?"
"저런 고얀 놈을 봤나......"
말문이 막힌 화림이 어의없는 듯 멍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건륭제에게 말했다.
"폐하, 이 패역무도한 자는 소신에게 맡기소서."
건륭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 이 자와 독대할 것이다. 모두 물러가라."
건륭제의 명이 떨어지자 화림은 어쩔 수 없이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심복 환관 몇 명만 곁에 남자 건륭제가 위엄서린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내, 너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이냐?"
환관들이 건륭제에게 반말을 하는 송지청에게 호통치려는 찰라, 건륭제가 입을 다물라는 눈짓을 보내자, 환관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건륭제는 어의가 없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짐이 제위에 오른지 60여 년이 되어가건만, 네놈처럼 당돌한 놈은 처음이다."
한차례 너털웃음을 떠뜨린 건륭제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짐이 듣기로, 백련교가 반청복명의 기치를 세웠다 하더구나. 짐은 백련교가 지금이라도 반청복명의 기치를 버리기만 한다면, 포교의 자유를 윤허할 생각이다. 반청복명의 기치를 버릴 생각이 없느냐?"
건륭제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송지청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어리석구나. 반청복명은 하늘과 백성들의 뜻이거늘, 어찌 하늘과 백성들의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느냐?"
송지청의 말에 건륭제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솟구쳤지만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명왕조는 일찍부터 백련교를 철저히 탄압해왔는데, 어찌 백련교가 복명의 기치를 내세울 수 있단 말이냐?"
"우리 백련교는 민심을 따를 뿐이다. 천하의 민심이 반청복명의 대의를 내세웠는데,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건륭제는 코웃음을 치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흥, 네놈들의 생각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짐은 기필코 천하에 창궐한 백련교를 송두리채 뿌리뽑고야 말겠다."
대전으로 돌아온 건륭제는 화신과 화림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소집한 후 칙령을 내렸다.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세운 백련교를 따르는 자는 모두 역적의 무리로 간주하여 즉시 체포하여 구금하라. 짐이 다스리는 이 땅에서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는 사교를 결단코 용납할 수 없으니 조정의 신료들은 총력을 기울여 하루 빨리 백련교 무리들을 뿌리뽑도록 하라!"
화림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화신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백련교 양대 수괴인 유지협과 송지청을 사로잡았다면 곧바로 북경으로 올 것이지, 무슨 생각으로 백련교 소굴인 하남을 경유하여 오다가 유지협을 놓쳐 이와 같은 사단을 만들었단 말이냐?"
화신이 책망하는 말에 화림도 유지협을 놓친 것이 분한 듯 주먹을 불끈 쥔 채 말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전들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다만......"
화림이 말을 잇지 못하자 눈치 빠른 화신은 화림이 하남을 경유해 온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무엇이냐?"
화림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양양이 고향이라는 왕낭자에게 혼담을 청할 생각으로 양양에 들린다는 것이 이런 사단을 낼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혼담이라는 말에 화신의 귀가 번뜩 뜨였다.
"왕낭자가 누구냐?"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화신은 화림이 혼담을 청하려 했다는 왕낭자가 대단한 미인일 것이라는 생각에 호기심이 들어 물은 것이다.
"아미 제자라는 한족 여인인데, 미모가 선녀와도 같사옵니다."
"혼담은 어찌 되었느냐?"
화림이 푸념하듯 말했다.
"양양 지현 제림이 이미 왕낭자와 혼담을 정했다기에 헛물만 켜고 물러났습니다."
제림이라는 말에 화신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천하의 권력을 한손에 쥔 이 형이 있거늘, 제림 따위에게 혼담을 빼았겨서야 되겠느냐? 이 형만 믿거라."
화림은 화신에게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가 싶어 대뜸 물었다.
"형님께서 왕낭자에게 다시 혼담을 청하시렵니까?"
화신은 좋은 생각이 있는 듯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 일은 형에게 맡겨두고 너는 이만 돌아가보거라."
화림은 화신에게 뾰족한 수라도 있는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님만 믿고 이 아우는 가보겠습니다."
화림이 떠나자 화신이 발검음을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화효공주의 처소였다.
마치 대궐처럼 웅장한 기와집에 마련되어 있는 화효공주의 처소에 이르자 청색 비단옷을 화사하게 차려입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화신을 마중나왔다.
화신은 여인이 자신을 마중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오자 황송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마마께서 몸소 마중나오시다니요......"
여인은 다름 아닌 화효공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