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자르가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지르자 중국 경찰은 숨이 막히는 모양이다. 영혼이 신체를 떠난 표정이다. 개미 같은 소리로 말한다.
“싱서오. (가십시오.)”
길을 비켜준다. 세미와 마자르의 표정이 풀어지고 짐꾼들과 그 중에 있는 김원봉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들은 소중히 가방을 잡고 연결계단을 내려간다. 앞서서 내려가는 세미가 뒤를 돌아보고는 김원봉에게 눈을 찡긋한다.
애숙도 남편 용석과 함께 안동현에 도착한다. 안동현 일본 외무성 공관은 상해 못지않게 화려하다. 르네상스식으로 건물이 치장되어 있다.
애숙과 용석이 공관에 들어서서 본 거실은 서양식 파티를 할 수 있을 만큼 넓고 인테리어는 화려하다. 애숙은 입이 벌어진다.
두 아이도 상해 공관보다 더 넓은 집에 놀란다.
“와! 엄마! 상해집보다 더 커요.”
“여기서 축구해도 되겠다.”
큰 딸과 작은 아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신기해한다. 그 사이 침실로 들어간 애숙을 따라간 용석은 아이들이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애숙의 허리를 끌어 잡아당기며 말한다.
“여기선 좀 얌전히 지냅시다! 야학 같은 건 하지 말구. 그림만 그려.”
애숙은 못마땅한 얼굴이 된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는다. 상해를 떠날 때 좌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공을 축하해 준 남편에게 잘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네. 알겠어요. 경성에서 그림 전시회 할 준비도 해야 하구. 아이들도 더 신경 쓸게요.”
용석이 환히 웃는다.
“고맙소.”
그리고 애숙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우리 애도 좀 가져야지.”
애숙은 얼굴을 붉힌다.
***
서경과 세미가 안동현에 모두 도착했으므로 둘이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곧 연락이 닿고 둘만이 아니라 남편과 썸타는 애인과 함께 만난다.
김원봉이 폭탄을 제조할 장소를 마련해 두었고 세미와 마자르는 안동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공장에서 폭탄 제조를 시작한다.
안동현 한적한 외곽에 있는 사기그릇 만드는 공장이 그곳이었고 의열단의 결정에 따라 이한도 그 공장에 합류하기로 된다.
“여기에서 다시 보다니 반가워요!”
서경은 마자르를 포옹하며 눈에 가득 반가움을 담는다. 원래 사기그릇 공장이었던 탓에 폭탄 제조 공장 여기저기에는 깨어진 사기그릇들이 널려 있다.
하지만 서경은 남편과 함께 다시 만난 세미와 마자르가 반가울 뿐이다. 황포항에서 세미를 구해준 마자르가 남같이 않아 스스럼없이 포옹한다.
“반갑다!”
마자르도 폭 서경을 안으며 늘 하던대로 반말로 반가움을 표시한다.
“서경이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요!”
세미도 이한을 거침없이 포옹하며 형부 같다고 생각한다.
“임동지가 하자고 해서 했습니다!”
이한이 한껏 웃으며 세미와 포옹한다.
“잘 하셨어요!”
세미가 포옹을 떼며 옆에 선 서경에게 혀를 낼름한다. 서경이 그런 세미를 보며 귀엽게 눈을 흘긴다.
마자르가 어렵게 가져온 가방을 풀어 상해 아지트에서 폭탄 제조할 때 쓰던 기구들을 작업대 위에 늘어놓는다. 세미와 서경, 그리고 이한이 돕는다.
“또 시작인가요?”
“그렇지”
서경이 분주히 기구들을 들고 오가며 묻자 세미가 당연하게 대답한다.
“그래도 꽤 많이 만들어 놨다.”
마자르가 폭탄을 옮기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당신은 좀 살살해!”
이한이 옆에서 함께 기구들을 나르느라 열심히 움직이는 서경의 팔을 잡고 걱정한다.
“뭐예요? 이 이상야시꾸래한 분위기는?”
옆에서 폭탄을 소중하게 나르던 세미가 눈치를 채고 묻는다.
“이 사람 임신했어요!”
이한이 선포하듯 말하자 세미가 움직이는 걸 멈추더니 눈이 커진다.
“정말? 결혼하자마자?”
“응.”
세미가 폭탄을 내려놓더니 서경에게 달려가 안는다.
“뭐야! 나보다 먼저 결혼도 하고 애도 갖고.”
“널 어떻게 기다려? 언제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이 사랑 허무주의자야!”
서경이 몸을 떼며 세미에게 핀잔한다.
“허. 이 언니한테 사태의 진실을 꿰뚫는 직언을 하다니. 임신 축하해!”
세미가 기뻐서 방글거리며 서경을 다시 안는다.
“고마워.”
이번엔 서경도 세미의 포옹을 기쁘게 받아 준다. 옆에서 마자르가 폭탄을 옮기다 멈추고 서경을 부러운 듯 본다.
“나도 결혼 축하해!”
말하고는 세미를 본다. 하지만 세미는 외면한다.
***
“맛있게 요리 하는 거죠?”
부엌에서는 사각사각 도마에 감자를 칼로 써는 소리가 들리고 화덕에서는 된장국이 뽀글뽀글 끓는다. 이한이 요리하고 있다.
“걱정마! 당신은 임신했으니까 쉬라구!”
이한이 여전히 칼질을 멈추지 않으며 말한다. 처음 이사 왔을 때 황량한 집 안 풍경이 제법 아늑하게 변해 있다.
탁자에는 테이블보가 놓이고 창에는 천으로 직접 만든 커튼이 달렸다. 부엌에도 몇 개 없지만 살림 도구들이 놓여 있고 화덕에는 불이 피어오른다.
“하하. 그건 좋네요.”
서경은 오랜만에 맛보는 안온함에 행복해진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김원봉이 들어선다.
“협두! 어서 오세요!”
김원봉 뒤에서 20대 청년 경호원이 있다. 김원봉이 부엌에서 칼질하는 이한을 보더니 한마디 한다.
“이동지 보기 좋습니다! 하하.”
“좀 그렇지요? 제가 임동지한테 꼼짝을 못해서.”
이한이 칼을 놓더니 돌아서 걸어오며 허허 웃는다.
“그렇지요. 조선 총독한테 총 쏘는 여자한테는 꼼짝을 못해야지요.”
김원봉도 이제는 곧잘 엄혹한 상황을 농담으로 푼다.
“잘 아시네요. 하하. 앉으세요.”
서경이 김원봉에게 탁자 앞 의자를 권한다. 그들 사이에 웃음이 오갔지만 김원봉은 의자에 앉자마자 정색한다.
“내년에 조선에 들어가서 할 거사들 준비를 하셔야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한도 김원봉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심각한 얼굴이 된다. 서경이 옆 의자에 앉으며 귀를 기울인다. 뒤에는 들어온 경호원 청년이 선다.
“마자르 덕에 폭탄은 충분히 준비되었어요.”
“폭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마자르에게 배워서 이곳에서 더 제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다른 작전도 진행해 주셔야죠.”
김원봉이 이한을 진지하게 보며 말하자 질문은 서경이 한다.
“드디어 조선 총독부 홍석원 동지의 도움을 청해야 할 때가 온 건가요?”
이한과 김원봉이 고개를 끄덕인다.
***
세미와 마자르와 이한은 안동에 도착한 뒤에도 폭탄 제조하는 데 전념한다. 내년 조선 잠입 작전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많은 폭탄이 필요하다.
저녁때 이한이 작업을 마치고 작업장을 떠나자 마자르는 아침부터 마음먹었던 고백을 세미에게 하기로 한다.
“세미!”
얼굴에 검은 화약 가루를 묻힌 체 작업하던 세미가 작업하던 손을 멈추지 않고 마자르를 보지도 않은 체 대답한다.
“응?”
마자르가 팔에 낀 토시를 빼며 작업대를 돌아 맞은편에 선 세미 옆으로 온다. 진지한 얼굴이다. 하지만 세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체 작업을 하며 마자르의 기척을 느낀다.
“왜?”
“이제 얘기할 때가 왔다.”
마자르의 음성이 떨린다. 세미가 평소랑 다르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마자르를 본다.
“무슨 얘기?”
마자르가 자신을 보면서도 계속 손을 움직여 작업하던 세미의 어깨를 잡더니 자기 쪽으로 돌아 세운다. 세미의 눈이 동그래진다.
마자르가 세미의 눈을 보며 바지에 손을 넣어 작은 상자를 꺼낸다. 그리곤 상자를 열어 보여주는데 반지다. 세미가 놀란다.
마자르가 멈추지 않고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더니 세미의 손을 잡고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준다.
“결혼하자!”
세미가 당황스러워 멈칫한다.
“결혼?”
“나 너 사랑해!”“알아.”
“이한이 결혼했다. 나도 하고 싶다.”
세미의 얼굴이 굳어진다. 마자르한테 이런 말 듣게 될 줄은 알았지만 오늘이 될 줄은 몰랐다. 듣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나도 당신 임신하고 싶다.”
마자르의 말은 좀 틀렸지만 세미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듣는다. 무슨 마음인지도 안다. 하지만 자신은 준비가 안 되었다.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며 부드럽게 말한다.
“나도 너 좋아해!”
짧은 말에 마자르의 얼굴이 밝아진다.
“동지로서! 남동생처럼!”
세미가 담담하게 말을 꺼낸다.
“동생이 뭐야?”
“리틀 브라더.”
마자르의 얼굴이 다시 흐려진다.
“결혼을 안 돼!”
세미가 냉랭하게 선언한다. 마자르의 얼굴이 검은 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진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세미는 실망하는 마자르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아프다.
애써 마자르의 흐린 눈빛을 피하며 돌아서서 말을 이어간다.
“너 아니라 다른 남자하고도 결혼은 안 해. 난 사랑은 안 해.”
“왜?”
“사랑 따위는 없어. 그런 감정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세미의 결심은 단단한다.
“내가 잘 해 줄게.”
마자르가 애원한다.
“그럴 필요 없어. 그냥 혁명 동지로 지내.”
“아이 캔트 비 캄 웬에버 아이 씨 유. 아이 헤브 노 웨이 낫 투 러브 유. (하지만 난 너만 보면 그냥 지낼 수 없어. 너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마자르가 애타게 말하는데 세미가 다 알아듣지는 못한다. 하지만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얘기인 건 안다.
“던트 러브 미.”
세미가 냉정하게 던지자 마자르의 얼굴은 온통 절망으로 가득해진다. 세미는 마음이 아프다는 생각을 한다.
“왜 날 사랑하는데?”
세미는 마자르가 자기 감정을 떨어져서 볼 공간을 주고 싶고 싶다.
“너 예쁘고 착하고 용감하고 폭탄도 잘 던져.”
“다 맞는 말이네. 그런데 그건 좋은 친구한테도 하는 말이야.”
세미는 동무로 지내자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마자르가 대뜸 목소리를 높여 선수를 친다.
“나 너 사랑한다구. 왜 넌 나 안 사랑해?”
세미가 마자르를 물끄러미 보더니 다가가 지그시 보며 대답한다.
“너 남자같이 안 보여. 그냥 동무야. 아니 난 어떤 남자도 남자로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살고 있어. 넌 그걸 깰 수 없어. 난 조선 독립과 사랑에 빠진 거라구?”
세미가 빠르게 얘기하자 마자르는 기가 막히다.
“왜 난 조선이 아닐까?”
마자르의 얼굴엔 괴로움이 가득 찬다.
***
“잘 지냈어? 안동에 왔으면 당연히 나한테 연락을 해야지 왜 내 인편에 답을 안 해?”
서양식 르네상스식 건물에는 일본 외무성 깃발이 꽂혀 있다. 서경은 대문 앞에서 애숙을 마주보자마자 화부터 낸다.
반가움도 있지만 화난 마음이 앞섰다. 애숙은 여전히 화려하고 좋은 얼굴이다. 하지만 서경을 보면서도 대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는다.
처음 대문을 열고 서경을 봤을 때는 반가워하는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지만 곧 복잡한 표정이 된다.
“그게...”
애숙이 말을 흐린다. 서경은 애숙이 안동에 왔다는 얘기를 남편 이한에게서 들었다. 의열단 정보 라인을 통해 흘러든 소식이다.
“하여간 잘 왔어. 얼굴 보니 좋다.”
말하여 서경이 애숙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애숙이 멈칫하며 뒤로 한발 물러선다. 서경은 당황스럽다. 애숙의 눈빛이 차갑다.
“왜? 애숙아? 나 안 반가워?”
“반가워.”
애숙의 대답은 힘이 없다.
“나 결혼하고 임신도 했어.”
“정말? 축하해!”
서경이 재잘거리자 애숙의 얼굴이 잠깐 밝아진다.
“나 이대로 대문 앞에 세워둘 거야?”
서경이 살짝 화를 내며 대문 안으로 발을 집어넣자 애숙이 슬쩍 문을 닫는다.
“아니. 그러지 마. 나 요새 그림 그리느라 바빠.”
차가운 애숙의 말에 서경이 충격을 받아 말을 못한다.
“나 선전 입선했어.”
“정말? 축하해! 너 대단하다.”
애숙의 소식에 서경은 조금 전의 차가운 말도 잊고 기뻐한다. 하지만 애숙은 여전히 냉랭하게 말을 잇는다.
“앞으로는 그림에만 전념하기로 했어.”
애숙의 말에 서경은 얼굴을 확 구긴다.
“운동은 어떡하구?”
볼멘소리가 삐져나온다.
“그림에만 전념한다구.”
애숙이 말뚝을 박듯이 말에 힘을 주자 화가 난 서경이 대문을 확 열어 젓힌다.
“너 무슨 일 있어? 너답지 않잖아.”
“그림 그리는 게 나다운 거지.”
애숙이 함께 얼굴을 구기며 대꾸한다.
“물론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너지만 운동하는 것도 너잖아.”
서경이 항의하듯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자 애숙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뗀다.
“지난번 황포항에 간 걸 남편이 알았어. 형사가 사무실까지 찾아왔다구 하더라구. 여기도 좌천돼서 온 거야.”
서경은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그... 그래도 감옥 간 아니잖니?”
“나만 문제가 되는 건 괜찮지만 남편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싶진 않다. 나 그림 그리는 거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야. 그만한 사람 없겠다 싶어.”
애숙이 고백하듯이 생각을 털어놓자 서경은 얼굴이 빨개지며 목소리를 높이다.
“그렇지. 그만한 사람 없겠지. 백화점에서 최고급 옷에 최고급 화장을 하고 최고급 머리를 하고 최고급 구두를 신고 최고급 커피를 마실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너네 남편이니까. 넌 그걸 놓을 수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