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현호는 잠에서 깨 천장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못 일어나는 건지 안 일어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제 어떻게 들어왔지. 김 조교인가?”
술집에서 그를 만난 것까진 기억했다.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것도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은 떠올랐다. 근데 거기까지였다.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현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깬 지 20분만의 일이었다.
“아, 머리야…….” 관자놀이를 지압해도 두통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현호는 터벅터벅 방을 걸어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마시면 정신이 좀 돌아올까 싶어서였다.
냉장고에서 물을 집어 꺼내는데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났다. 현호는 인덕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은 열판 위를 홀로 지키고 있는 스테인리스 냄비의 뚜껑을 잡았다. 따뜻했다. 뚜껑을 열어 보니, 노란빛 국물의 북엇국이 먹음직한 모습으로 현호를 반겼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무와 같은 크기로 잘린 두부, 어슷썬 대파와 빨간 고추, 거기에 달걀까지 풀어 해장국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었다.
“…먹는 건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호는 북엇국을 몰랐다. 술 먹은 다음 날 누군가가 차려 놓은 북엇국이 어떤 의미인진 더더욱 몰랐다. 처음 본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킁킁, 하며 냄새를 맡았다. 기분 좋은 냄새에 먹어도 좋겠다, 판단이 섰다.
옆에 있던 국자로 한 그릇 퍼, 식탁에 앉았다. 냉장고에서 꺼내온 찬물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현호는 수저를 들었다. 국물을 조금 떠서 조심스럽게 맛을 보았다. “…맛있어.” 빨간 고추가 있어 맵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담백한 게 입맛에 딱 맞았다. 현호는 수저로 두어 번 더 떠 먹다, 아예 그릇을 들고 쭉 들이켰다. 뒤틀린 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뜨끈한 국물에 정신이 맑아지고 나서야, 현호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북엇국을 만들고 나갔을 우렁각시 생각이 났다. “이다희…….”
“중간고사 대체할 리포트 두 개 나갈 거고, 기말은 문제를 미리 알려줄 겁니다.”
개강하고 첫 주는 대개 강의 계획서를 쭉 훑어보는 걸로 시간을 보낸다. 지각이나 결석을 하면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 시험은 어떤 형식으로 출제되는지, 과제는 팀플인지 아닌지. 학점에 민감한 학생들이 수업 내용보다 더 관심 있어하는 항목들을 하나씩 설명하다 보면 삼십 분이 그냥 지나간다.
“자주 독립이란 무엇인가!”
칠판에 적은 글자를 읽는 선생의 목소리에 학생들이 어우, 하며 곤혹감을 내비쳤다.
“오픈 북인가요?”
“당연히 아니지. 이렇게 문제까지 미리 알려주는데.”
질문하는 학생이 있으면 시간은 그보다 좀 더 지연된다. 3학점짜리 수업은 곧 3시간의 수업을 의미한다. 이 경우, 수업 방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루에 몰아서 세 시간을 다 하든가, 월·수, 화·목 등 이틀로 나누어 반씩 진행하거나.
“그럼 이제 수업 들어가 볼까.”
이따금씩 이렇게 첫날부터 수업을 하는 센스 없는 선생들이 나온다. 그러면 학생들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마음을 돌려주십사 간곡히 청한다. 첫날이잖아요, 가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이다. 다희는 챙겨간 공책의 첫째 장에 <한국사 특강>이라고 크게 적었다. 이 수업의 강좌명이었다. 전공 선택 과목으로 40대 초반의 시간 강사가 선생으로 왔다. 어제 급히 바꿔 넣은 수업이었다. 학교 커뮤니티에 들어가 검색해 보니, 학점 따기가 무난하단 평이 지배적이었다. 덕분에 화요일은 아침 9시에 시작하는 1교시 수업을 듣게 생겼다. 11시로 예쁘게 줄 맞춰 놓았던 옛 시간표가 아까워 죽겠다.
지잉.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유송이 보낸 문자였다.
-다희이~ 학교야?-
다희는 수업 자료를 스크린에 띄우려고 컴퓨터 앞에 선 강사의 눈치를 보며 유송에게 답장을 보냈다.
-응. 수업 중.-
-언제 끝나?-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는지 금방 또 문자를 보내왔다.
-첫날부터 수업할 각. 시간 다 채우면 열두 시.-
-이히익! 선생님 너무 한다~ 설마 세 시간 다 채워서 할까?-
-모르겠어. 왜? 뭐 할 말 있어?-
책상 아래 핸드폰을 숨겨 놓고 양손의 엄지만을 이용해 빠르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응응. 끝나면 연락해, 점심 같이 먹자!-
다희는 유송에게 알겠다는 답장을 끝으로 핸드폰을 가방 안에 집어 넣었다. 선생이 막 수업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스크린에 띄워진 내용을 다희는 공책에 필기했다. 그 한쪽 구석에 조그만 글씨로 낙서가 적혀 있었다. 북엇국, 북엇국. 잘 먹었나……?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온 다희는 인문대 신양 건물 쪽으로 향했다. 유송과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응… 나 지금 가고 있어.”
선생은 기어이 세 시간을 꽉 채워 수업을 했다. 9월 25일, 추석이라 빠지게 될 수업을 나중에 보강하지 않으려면 지금 진도를 빼 놓아야 한다고 학생들을 설득했다. 다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붕대 감은 손을 들어 이마에 묻은 땀방울을 훔쳤다.
관악의 가을 바람은 찼다. 햇볕이 내리쬐도 크게 덥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더워서 흘리는 땀이 아니다. 어제의 감기 기운이 세를 넓혀 식은땀까지 흘리게 만든 것이다. 거기에, 세 시간 동안의 수업이 진을 다 빼놓았다. 흠흠, 하고 다희는 헛기침을 했다. 목이 부은 것 같다. 약을 사 먹을까 하다가 빈속임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현호를 위한 북엇국은 정성 들여 끓여 놨으면서, 시간이 늦어 정작 본인은 아침을 굶었다.
“어, 비켜요, 비켜!!”
그때 오토바이 한 대가 다희 쪽으로 돌진해 왔다. 학생들이 과방에서 시킨 중국 음식을 배달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주행 중에 핸드폰을 보다, 멀뚱히 서 있는 다희를 보지 못했다.
“……!”
사고가 나기 직전, 다희의 몸이 앞쪽으로 훅 당겨졌다. 오토바이를 피해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 끈 것이다. 놀란 눈을 껌벅이며, 다희는 생명의 은인이 입고 있는 검은색 점퍼에 얼굴을 묻었다. 꽈악 잡힌 손목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정신을 얻다 팔고 있는 거야, 위험하게.”
다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현호가 인상을 잔뜩 쓴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맞추고 서 있는데 코끝이 찡해지면서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너… 어디 아파?” 눈시울이 붉어진 다희를 찬찬히 살피던 현호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불덩이였다. “언제부터 이랬어.”
묻는 말에 답을 하고 싶은데 목이 메어선지, 부어선지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어제.”
“이런 몸을 해가지고 요릴 한 거야? 너 정말……!”
현호가 와락 다희를 껴안았다. 살갗이 맞닿는 곳마다 느껴지는 열감에 가슴이 미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이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