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이게 그날 도둑질 장면을 보고 오빠가 적어 둔 글이에요. 소설로 치면 초고에 해당돼요. 제 생각에 일기장에 쓴 그날 현장은 오빠 감정이 들어갔을 거에요. 이게 가장 생생한 그날 현장이죠. 그런데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저는 오빠 사진도 일기장도 절대 손대지 않으니까요.”
은연중에 순희가 물었다.
“왜?”
“초등학교 3학년 오빠 일기장 봤다가 사생활 침해 죄로 종아리 열 대 맞았어요. 피도 났고요. 아주 잔인한 놈입니다. 혹시 결혼하면 사진은 마음대로 손을 대도 되고 팔아도 되지만 일기장은 절대 보지 마십시오. 혹시라도 글을 쓴다고 하면 잘 한다 잘한다만 해 주세요. 혹시 알아요. 엄마처럼 새 언니도 공돈 벌지. 호호호!”
순희가 빙긋이 웃으며 눈을 마주쳤다.
“참! 하나 더.”
그냥 계속 말해주면 될 걸 순희는 이럴 때가 가장 곤란했다. 들을래 말래 선택하라는 말로 들려서였다. 그러나 유익한 정보는 돈 주고도 듣는데 지금은 공짜다.
“뭔데요? 궁금한데요. 호호호!”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 했다.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우리 엄마! 뒤끝 있다. 오빠 카메라 사주느라 제주도 한번도 못 갔다. 그렇게 평생 우려먹는다. 오빠에게만 사용하는 유일한 비장의 무기. 아무리 써도 닳지 않는 무기’
갸우뚱하던 순희가 물었다.
“보내 드리면 되잖아요. 같이 가도 되고.”
지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주도가 아니고 그때 그분들과 같이 가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쉽다는 말이죠. 그때 그분들 중에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분도 많고요. 같이 가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그럴 때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을 엄마는 그리워해요. 아마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그렇지 않나 하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 마음을 오빠가 제일 잘 아니까 제주도 말만 나오면 꼼짝 못하는 거죠”
순희 목이 살짝 미어지면서 한편으로는 지수가 밉기도 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보내는 이 계시(啓示)는 뭐지? 설마 형님 될 분과 손발이 착착 맞는 시어머님을 나한테 떠넘기는 가? 벌써! 무엇 때문에? 일단은 피해가며 동태를 살피자.
“아가씨! 아가씨는 연애 결혼 했어요? 중매로 했어요?”
일단 말려 들었다.
“오빠 감시가 워낙 심해서 남자 구경도 못하고 중매 결혼했습니다. 연애 한번 못해보고.”
“어느 오빠요?”
“누군 누구겠어요. 자기는 깨알 쏟아지게 연애하고 다니는 사람이지요.”
“오빠가 셋이에요?”
지수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오빠가 우리 집에 대해 말 안 했어요? 2남 1녀라고. 우리 집에 자주 들렸다면서요.”
순희는 후회하고 있었다. 피해가려고 선수를 쳤는데 오히려 말려들어 버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머리가 분명하다. 어머니와 형님 되실 분의 비리를 얘기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지? 그래 솔직하게 얘기하자.
“우리 연애 안 하고 있어요.”
지수가 멈칫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말? 안 하면 안 했지. 안 하고 있는 중이라니? 가만! 그럼 오빠가 아직 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집적거리고 다닌 단 말이야? 도대체 다리가 몇 개야? 아! 구제 불능이다. 그래도 맞아 죽을 각오로 몰래 훔쳐 본 일기장을 근거로 하나만 더 확인을 시도한다.
“혹시! 출퇴근 할 때 부두로 지나다녀요?”
“예! 차 막히면…”
안순희! 내가 누군가? 순희가 물었다.
“혹시! 18년이라고 봤어요?”
지수가 입을 꽉 막고 고개를 돌렸다.
“전방 주시!”
“아! 예! 그럼 혹시! 제주도도 같이..”
“예! 제주도뿐만 아니라 휴전선 아래로는 다 같이 다닌 그 18년이 접니다.”
순희는 치를 떨고 있었다. 18년 때문이 아니었다. 가장 기본적인 도리. 남의 일기장을 훔쳐 보면 안되지. 그러나 차마 이걸 가지고 야단 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란 걸 모르면, 그건 순희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청혼은커녕 손 한번 잡지도 못했고, 수리 어머니에게 남이라는 말도 들었다. 만약에 결혼한다면 시누이 눈치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빠 정말 여자 친구 집에 많이 데려 왔어요?”
“어떤 여자가 오빠 같은 놈을 좋아하겠어요. 언니는 좋아요? 오빠 같은 놈?”
순희 콧방귀가 지수 콧방귀보다 더 멀리 날아갔다. 그걸 말이라고 묻냐? 순희가 수리 회사로 가자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엿들은 말을 잊지 않고 알아서 갔다.
“언니! 비밀번호 알죠?”
허! 확실하네. 앞으로 꼭꼭 숨겨야겠다. 순희가 지수가 보지 못하게 몸을 바짝 붙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언니! 1234에요 3456이에요? 맨날 두 개 가지고 너무 자주 바꿔서 이제 짜증나요.”
민망했지만 가만히 있는 것도 버릇이 되면 주도권을 뺏긴다는 경험! 재치 있게 말했다.
“아이! 창피하게. 모른 척 좀 해주지.”
능글맞은 오누이. 그걸 꼭 집어 말하냐? 순희는 징그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었다.
“잠깐! 이 사진을 스캔 해도 될까? 훼손 안될까?”
순희 말에 지수 눈에서 불이 나고 있었다. 저런 걱정은 상품의 가치를 생각한 엄마가 늘 하던 걱정이었다.
“줘봐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데 아무래도 제가 낫죠. 아무 문제 없어요.”
지수가 사진을 나란히 놓고 있었다.
그래도 순희는 걱정이 돼 재차 물었다.
“아가씨! 사진 열 받으면 변하지 않을까요?”
지수는 사진에 대해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와 새 언니의 장난질에 넌더리가 나 있어 사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 변하면 어때요.”
순희는 옆에 서서 벌벌 떨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수가 상품의 가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은 약간 놓였지만 스캔 된 사진을 정렬하는 손놀림이 워낙 능숙해 왠지 불안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정렬된 사진을 스캔 해서, 송차장에게 메일을 보내고, 경찰서로 가는 내내, 사진을 보면서 입 바람으로 불고 있었다.
“언니! 뭐 하세요?”
“예! 사진이 뜨거우면 변하잖아요.”
지수가 한숨을 푹 쉬면서 말한다.
“언니! 보면 볼수록 우리 엄마하고 너무 똑같아. 잘못하면 삼파전 일어나겠는데….”
“그게 무슨 말?”
벌써 편하게 말을 터놓고 나왔다. 지수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좋아! 우리 산적 같은 오빠 책임진다는 전제하에 삼파전이 무엇인지 말하죠. 약속할 수 있죠?”
잠시 망설이던 순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안돼. 나 솔직히 자존심 상해.”
“왜요?”
“아직 손 한번 못 잡아봤어.”
지수 눈이 순희 눈에 딱 붙었다.
“그럼! 그 동안 여행 다니면서 뭐 했어요?”
“오빠- 사진 찍기, 사진만 보고 되지도 않는 글 적기, 나- 항상 뻘쭘한 망부석, 잠- 각 방. 재미있지? 됐냐?”
자기가 얘기하고 우스운 모양이었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헛웃음 소리가 나고 있었다.
“미쳤다. 이불은 따로 덮었다고 하면 믿겠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방 값만 해도 전세 하나는 얻겠다.”
여기서 순희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려가고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데이트의 목적도 여행의 목적도 발정 난 암캐의 욕구 해소가 될 수 있다. 지금 유도 당하고 있다.
“그렇지? 한 이불 속은 나도 절대 원하지는 않았어. 결혼 전까지 지키고 싶었거든. 지금도!”
작전이 딱 먹혔다. 지금까지 당해온 가장 치욕적인 비웃음이었다. 그런데 순희는 통쾌했다.
“열녀 났네. 열녀 났어. 언니! 신혼여행가서 첫날밤! 그거! 다음 날 여행 다니기 힘들어요. 그 좋은 말 뭐하고 그런 고통을 사서 해요. 어리석게.”
“예! 그게 무슨 말?”
지수가 눈, 코, 입 전부 비틀어 한숨만 내쉬면서 한심한 듯 보면서 충언을 했다.
“언니! 연애할 때가 제일 좋아요. 신혼 여행 갔다 오자 마자 그런 맛 못 봐요.”
“아이! 야! 호호호!”
지수도 순희도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둘이 깊은 한숨이 나올 때 경호가 김성태와 마주보며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서 마무리 하죠. 일 크게 키우지 말고.”
김성태가 입 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사진을 획 던지며 말했다.
“새끼가! 이게 뭐라고?”
“후회 안 하죠?”
“새끼가 어디서 협박을 하고 있어.”
김성태가 크게 고함을 지르며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리에게 갔다.
“형님! 질질 끌지 맙시다. 제가 생각해봤는데 형님 회사도 우리처럼 합병하세요. 우리도 처음에는 작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키웠고. 회장님하고 의논도 했고 애들하고도 얘기했습니다. 애들 이번 시험에 무조건 걸리도록 힘쓸 테니까, 일 크게 키우지 맙시다. 몇 달만 참으면 되잖아요. 저런 영감 하나 감방 보내서 뭐 하겠습니까?”
수리도 흥분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 나도 지친다. 이 짓 그만하고 싶다. 더 했다가는 내가 제 명에 못 살던 아니면 또 저런 놈이 나타나면 그 놈이 제 명에 못살던 둘 중 하나는 사단(事端)이 나겠다. 나도 나를 못 믿으니 무슨 일이던 분명히 낼 것 같다. 그러니, 일단은 그렇게 하자.”
경호가 김성태를 따라온 남정네들의 자술서를 수리에게 건넸다. 수리가 씁쓸히 웃으며 말한다.
“이거 비겁하다. 맞지?”
“예!”
“버릴까?”
“아뇨. 저 영감 어디로 튈지 몰라요. 보험용으로 반드시 잘 보관해야 해요”
밖으로 나갔던 김성태가 전화를 한 사람은 이완호부장과 박한철대리였지만 두 사람 다 수신 거부를 해둬 탱크로리 기사인 임운영에게 전화를 했다. 임운영이 전화를 받고 바로 이부장에게 연락해 박한철과 새사람이 모여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임운영은 당연히 동의할 수 없는 말만 나왔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많은 액체가 기체가 돼 하늘로 날아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 부장님이 하는 말은 저하고 터미널에 최동호하고 둘이서만 했다는 말밖에 더 됩니까? 그러지 말고 경찰서가서 김성태를 달래세요. 부장님 말대로 최동호하고 저하고 둘이 했다고 합시다. 그럼 그 화물을 누구에게 팔았냐고 물으면 제가 어떻게 할까요? 괜히 일만 크게 만들지 말고.”
대답은 하지 않고 소주잔만 만지작거리던 이부장이 박대리를 쳐다보며 씁쓸히 웃었다. 박한철이 몇 잔 연거푸 마시고 임운영을 눈을 보고 말한다.
“그 동안 많이 먹었잖아요. 이 정도는 각오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잘리면 갈 때도 없지만 임사장님은 계속 탱크로리 할 수 있잖습니까? 한번 덮어 주십시오. 제가 있으니, 몇 달 살다 오면 챙겨드릴게요.”
임운영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박대리님!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생각 좀 하고 말하세요.”
“뭐?”
박대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야 임마! 앉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부장이 인상을 찡그려 박대리에게 앉으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