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리님! 어제 본사에서 송차장님이 다녀갔습니다. 검정회사에 견적서를 받으라고 해서 대리님과 부장님에게 전화를 열 번은 더 했지만 받지 않아서 제가 보냈습니다. 여기 받은 견적서입니다.”
순희는 의도적으로 당신만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했다는 투로 아주 짜증스럽게, 고개를 박대리 반대쪽으로 완전히 비틀어서, 코를 막은 채로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박대리는 성스러운 자기 권역을 침범했다는 둥, 온갖 꼬투리를 붙여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낸다. 그게 그의 영역을 지키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아예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따끔하게 원천 차단하기 위해 그와 똑같이 짜증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작전이 딱 먹혀 들었다. 술이 덜 깬 탓도 있었겠지만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견적서를 대충 훑어 보면서 부장 자리로 갔다.
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상당히 짜증스럽고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박대리와 달리 그 와중에도 심각한 표정으로 견적서를 보고 있었다. 부장은 견적서에 적힌 돈의 액수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단지 부수입을 벌 수 있는 적당한 회사를 골랐고 그러기 위해서는 김소장처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작은 회사를 선정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부장 눈이 번쩍했다.
“어이! 박대리! 이리 와봐.”
박대리가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공장장 비서실에서 견적서를 빨리 가져 오라는 재촉 전화가 왔다.
“예! 예!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왜?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박대리가 허둥대면서 부장 앞에 섰다.
“당장 올라 오랍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해서 불쾌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한참 동안 책상 위에 펼쳐 놓은 견적서를 보다가 박대리 앞으로 던지면서 고개만 밖으로 까닥한다.
박대리가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 같이 어기적거리며 가던 중에 순희 코에다가 입 바람을 훅 불며 묻는다.
“안주임! 술 냄새 많이 나?”
피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에 대답할 겨를도 없던 안주임 목에서 바로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 뒤로 콧물도 코끝으로 역류해버렸다. 실신이 아닌 실성한 사람의 얼굴이 된 안주임이 도피할 장소라고 화장실 밖에 없었다. 벌써 콧물이 범벅이 돼 있었다. 오수처리장을 지나칠 때 나는 냄새는 상당히 향기롭다고 할 정도로 비리고 역겨운 냄새에 안주임 영혼은 이미 지옥으로 가버렸다.
그 와중에도 박대리는 비겁하게 순희보다 먼저 나가려고 문고리에 손이 가 있었다. 한 손은 입에 한 손은 박대리 허리춤으로 가고 있었다. 잡았다. 그리고 바로 잡아당겨버리고 먼저 밖으로 튀어 나가 화장실로 쫓아간다. 변기통에 머리를 쳐 박고 구역질을 해댄다. 눈물 콧물 모조리 쏟아낸다. 박대리는 그때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바닥에 나자빠져있었다.
극한 상황에 다다르면 연약한 여자도 없던 힘이 불끈 쏟아져 나와 남자 하나 정도는 거든히 해치운다는 걸 증명하는 자리였다. 무방비 상태로 일격을 당한 박대리가 일어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순희는 허기를 느낄 정도로 내장을 깨끗이 비우고, 킁킁거리며 코 속에 남은 잔존물을 모조리 제거하려고 했지만 일부 찌꺼기가 코 속에서 나오지 않아 애간장만 태우고 있었다. 어젯밤 포식만 가스만 얻어 마셨다는 더러운 기분에 억울한 마음까지 가졌던 모양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눈 언저리를 닦고 있었다.
그때 부장이 낑낑대며 일어서 자기 자리가 가서 앉아있는 박대리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흩어진 서류를 주워 담는 다른 직원을 보고 서류를 가져 오라고 했다. 뭔가 심상찮은 부분을 발견한 것 같았다.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로 회의실로 들어가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박대리에게 눈짓을 했다. 엉거주춤 일어난 박대리가 고통스런 몰골로 부장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거 봐! 너무 짜맞추기 했는데. 아무래도 본사에서 입댈 것 같은데.”
회의실이 화장실인양 체내 깊숙한 곳에서 기어 나와 떨고 있는 신음 소리와 수리가 보낸 견적서를 보는 표정이 분명히 통증으로 신음하는 표정인데도 부장 눈에는 심오하게 고민하는 얼굴로 읽혀진 것 같았다. 대답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말이었다.
“부장님! 이 회사는 처음 듣는 회사입니다. 잠깐만요.”
한번 더 살피고 난 뒤 견적서를 부장에게 준다. 박대리 입에서 침이 질 흐르고 있었다. 주둥이를 닦으면서 부장 눈치를 살핀다. 어제 먹은 음식 찌꺼기가 이빨에 끼었는지 부장이 혀끝으로 한쪽 볼을 불룩하게 밀어냈다가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견적서를 다시 확인하면서 김소장에게 당장 전화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그러나 김성태는 회사에도, 휴대폰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단지 출근전이란 말만 들은 부장이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참 좋은 회사네. 지금이 몇 신데. 박대리!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알아봐. 아무래도 신생회사인 것 같은데 여기 일 시키고 김소장도 넣어주면 되겠다. 얼른 알아봐.”
워낙 좁은 시장이라 이 회사를 아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탱크터미널에서 상세히 정보를 얻은 박대리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최적입니다. 사장도 서른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애고 혼자하고 있답니다. 김소장하고 직원들 다 보내도 되겠네요.”
귀가 솔깃해진 부장이 빨리 서두르라고 지시를 하고 다시 소장에게 전화를 하지만 받지 않았다. 박대리는 박대리대로 자리에 앉아 TS검정에 전화를 했다. 수리가 전화를 받았다.
“여기 사도유화입니다. 견적 낸걸 보고 전화를 했는데 지금 우리 회사에 올 수 있겠어요?”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과 훗날을 위해서 견적을 보냈기 때문에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수리가 얼버무리듯이 되물었다..
“저… 우리 회사 혼자입니까? 다른 회사에도 옵니까?”
박대리가 덜컥 화를 내며 제법 큰소리로 다그쳤다.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빨리 오세요.”
부장이 김소장에게 하던 그대로 박대리가 물려 받아 똑 같은 말투를 냈다. 수리 속이 벌써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사도유화에서 발생하는 월 매출이 어느 정도인지는 대충은 파악했기 때문에 머리를 숙이기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아! 예! 바로 가겠습니다.”
서둘러 옷부터 갈아 있고 거울 앞에 서서 마주 보이는 자신을 보면서 씁쓸히 웃으며 내뱉는다.
“공갈 미끼를 던지니 바로 낚이네. 그런데 씹할 새끼가 벌써부터 갑 질 하려나. 더럽게 쓰리.”
중얼거리며 책상에 앉아 깍지 낀 손가락으로 입술을 꾹꾹 누르며 생각에 빠지고 있다. 거래하고 있는 회사 대부분이 무역회사와 선박회사여서 담당자를 만날 일이 극히 드물지만 바로 옆이나 다름없는 사도유화는 다르기 때문에 가슴에 돌덩이가 올려진 것 같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 회사는 언제던 찾아 올 수가 있고 당장이라도 실사를 나올 수가 있다는 불안감과 경쟁사들의 향후 동향도 같이 가슴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벌써 낚시 바늘에 물린 고기 아가리를 벌려 바늘을 빼내 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갑작스런 고민이 벌써 손을 휴대폰에 데려다 놓았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숱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어디부터 어떻게 처리할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손이 휴대폰 위에서 방황하다가 순서를 정한 것 같았다. 무슨 이유로 회사를 바꿨는지 정확히 알아 볼 필요를 느껴 터미널에 가장 먼저 전화를 했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해 나이가 비슷한 또래들에게 전화를 했다.
김성태소장이란 인간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개라는 했다. 여기저기서 하는 말은 거짓말처럼 똑같이 일치했다. 김성태는 형제간에도 잘 쓰지 않는 ‘야! 너!’란 하대하는 말투가 입에 베인 안하무인인 인간이라고 했다. 눈을 마주치고 아래 위부터 탐색부터 한다고 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을 아는 즉시 말을 낮춰 함부로 입을 놀리고 그 입은 신분에 따라 차별을 두고 사용한다고 했다.
물론 농담이지만 이 말도 떠돈다고 했다.
거래처 담당자가 기르는 강아지가 죽으면 문상을 갈 정도의 인간이란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다. 이런 인간이면 혼자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일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고 바로 약점으로 지정해 효과를 얻으려 할 것이다. 이 동네에서는 고발을 식은 죽 먹기 식으로 하는 걸 수리는 너무 자주 봐 왔다. 오히려 들러리로 이번 일이 끝나는 게 롱런을 위해서는 더 이롭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도유화에 가는 걸 망설이며 결정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혼자서 일한다는 사실을 굳이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이 세계에서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는 한, 한번 도장 찍힌 계약서는 백년해로한다는 혼인 서약서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한번 눈 밖에 나가버리면 사실상 이 회사와의 인연은 평생 동안 끝이 났다는 말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선이 가는 대로 눈을 가만히 내버려둔 시선은 스케줄 판에 가 있었다.
게으른 노총각이나 홀아비가 사는 방처럼 누리끼리하게 눈에 들어왔다. 무엇이던 써야 지우기라도 하지. 손때가 묻지 않으면 깨끗해야 할 텐데 완전히 반대다. 계속 저런 상태로 방치하길 바라는가? 정신을 번쩍 차린다. 맞부딪혀 보지도 않고 쓸데없는 걱정만 하는 자신을 비웃으며 까짓 것 죽이 되던 똥이 되던 한판 붙어보기로 마음을 돌려 세운다.
마음을 바꾸자마자 실사를 떠올린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오늘 당장이라도 실사를 겸해 방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무실을 빙 둘러본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저 스케줄 판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질 것이다. 마음이 바쁘기 시작했다. 걸레로 문지른다. 금새 시커멓게 변한 걸레는 씻는 것보다 버리는 게 낫다. 이 판단도 재빠르게 한다.
땀 흘린 대가! 스케줄 판에서 광택이 난다. 이번에는 사무실 바닥에서도 광택을 내려고 한다. 마대 질을 시작한다. 마치 청소용역업체 청소 전문가인 줄 착각할 정도로 빠르게 청소를 마친다. 한번 더 획 둘러보고 난 뒤에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간다. 그래도 불안한 수리는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갔다.
‘제발 방문만은 하지 마라. 특히 실험실에서는.’
사도유화로 나설 때 얼떨결에 넘어진 박대리가 킁킁 앓으며 고통스러워 하느라 공장장에게 가지 못하고, 순희는 화장실에 가서 못 가고, 어쩔 수 없이 부장이 공장장에게 갔지만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투덜거리며 공장장 실에서 나와 박대리와 순희를 불렀다.
“실사하고 오라네. 안주임! 화학과 나왔지?”
“예?”
놀란 토끼 눈이었다. 가슴이 덜컹했지만 순희는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만약에라도 그런 표정을 지었다가는 바로 불호령이 떨어진다. 즉각적으로 대답을 했다.
“아! 예!”
그래도 자기가 원하는 타이밍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못마땅한 심보를 순희는 읽을 수 있었다.
“박대리는 김소장 집에 가서라도 데리고 그 회사에 가서 실사하라고 해. 너무 급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어떤 회사인지도 모르고 계약을 한다며 공장장이 난리야. 이럴 거면 자기가 직접 하지. 더러워 집어치우던가 해야지.”
‘그 마음은 내 마음이다. 그럴 거면 네가 실사하러 가지.’라며 순희가 피씩 비웃었지만 천만다행이 부장이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