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입장에서는 시댁에 얹혀 살기로 한 주제에라고 할 수 있겠지만 분가한 자식이 귀중한 물건을 본가에 놔둘 리가 만무해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사진 관리인만 되기로 했다. 이러한 합의를 가져 오면서 어머니도 내민 비장의 무기는 세탁은 각자, 밥상 차리는 건 며느리, 설거지는 어머니, 여기서 어머니의 실수는 순희가 제일 잘하는 게 요리인데, 어쩌면 그건 살아보면 바뀐다는 어머니의 덫인 줄도 모른다. 그 다음 핵심은 손주였다. 기저귀도 채워주지 않는다고 했다. 당연히 울어도 엎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도 순희는 설마! 실수를 하고 도장을 꽝 찍었다. 그 말을 듣고 수리는 제주도를 떠올리며 순희를 비웃었다. 어머니의 뒤끝은 잘라도, 잘라도 또 생긴다는 걸 순희는 간과해버렸다.
결혼식 하루 전날,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무렵!
‘내일 주말이네요!’ 또는 ‘내일 빨간 날이네요!’ 이런 말을 선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면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또는 ‘내일 돼 봐야 알지’ 이런 눈초리나 대답을 받게 되고 자칫 잘못하면 애송이나 멍청이로 취급된다.
TS 검정도 마찬가지다. 이 말 이 회사에는 경사와 흉사가 겹쳐져버렸다.
“축하한다. 어떻게 한방에 다 붙어버리냐? 고생했다.”
수리도 순희도 직원들과 얼싸안고 악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장 어렵다는 감정 시험에 전부 합격을 해버렸다. 순희도 물론 합격했다. 다같이 둘러 앉아 샴페인을 터트릴 일만 남아 있었다. 결혼 준비에 순희만큼 바빴던 경호가 내일, 그러니까 영악한 순희가 굼벵이인 수리에게 시집 가는 날 선박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스케줄 판에 일정을 적으면서 서너 명은 참석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미간을 좁혀 다시 일정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순희도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고 옆으로 가서 씁쓸한 미소를 주르르 흘려 내리고 있었다.
“사모님!”
옆에서 천지개벽할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한 순희가 ‘사모님!’이란 말에 기분 맞춰줄 상황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경호가 혹시 라는 기대를 하며 물었다.
“아직 사도유화 직원이죠?”
약간 들뜬 음성! 이 상황을 즐기는 듯 했다.
“그래”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수출할 물량 모자란다고 선박회사에 연락해 25일 일정 저~~~ 뒤로 조절해주십시오.”
손가락이 간 건 2003년 달력이었다. 헛웃음이라도 웃는 직원도 없었다. 머쓱해진 경호가 일정을 줄줄이 읽고 있었다.
“사도 유화 수출 1건. 수입 2건. ISO Tank Container (액상 화물을 약 24톤 정도 운송하는 장비) 5대, H통상과 C 화학 화물 3개. 분석이 필요한 배 총 5척. S해운 벙커 3척. 사모님 회사 제품만 7건입니다. 지원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수리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대며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긴급 SOS. 자격증 빌려준 어르신들 번호를 찾고 있었다. 그때 순희가 수리 옆으로 가서 수리 휴대폰을 뺏으며 수리 팔을 잡아 당겨 의자에서 나오게 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야단을 치고 있었다.
“저리 비켜봐. 또 쓸데없이 돈 쓰려고..”
USB을 꼽자마자 신들린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내일 시집갈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함빡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됐어! 걱정 마! 그까짓 요식행위 안 하면 어때. 자기도 그런 거 귀찮아 하잖아. 잘 됐네.”
이건 또 무슨 말? 놀란 토끼 눈들이 순희를 향했다. 바로 결혼식장에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급하게 취소해서 죄송합니다. 신랑 될 사람이 바다에 빠져서요. 예! 지금 혼수 상태입니다. 예! 위약금 요? 이런 18! 아! 미치겠네. 신랑 될 사람이 지금 혼수 상태라고 했잖아요. 뒈지기 직전이라고요.”
나이가 들수록 사람도 가려서 만나야 한다고 순희 귀가 닳도록 말했던 사람인 수리의 단골 메뉴인 ‘뒈지다’을 순희가 어느 새 따라 하고 있었다.
그때 경호가 급하게 귓속말을 했다. 완벽한 서양식 팔등신에 애교 만점 동양적 이목구비를 겸비한 안순희의 눈물 연기. 수리가 지금 계좌이체로 받은 축의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면 안순희를 즉시 할리우드 행 비행기에 태웠을 것이다.
‘대한민국! 짜짜짜 짝짝’의 환호와 갈채로는 절대 성이 차지 않을 여자였다. 전 직원이 무장 해제하고 제 자리에 앉았다. 안순희의 화학과 직속 후배인 막내가 미안한 얼굴로 순희 옆으로 왔다.
“저! 사모님! 저… 신혼 여행 갔다 와서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이 상황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신입 사원이 해버렸다. 전 직원이 순희 눈치부터 보고 있었다. 물론 귀도 막은 채였다.
“뭐?”
앙칼졌다.
“저~~~ 칼럼(순도기 핵심 장비. 최저 가격: 100만원)… 제가 깜빡 하고 찔러버렸습니다.”
“야! 벌써 몇 번째야? 이달 월급에서 퉁! 알았어? 너는 정신 차려야 해! 어이 씨! 앞으로 너! 내 후배라 하지마”
그러나 누가 채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전 직원이 반대했지만 순희는 완고했다. 전공한 사람이 분석을 해야 한다며 우겼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견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순희가 말 실수를 했다. 저 놈은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평생 취직을 못한다며 도와주자며, 서로 돕고 살자고 했다. 덩치만 좋지 여린 가슴을 지닌 깡패들의 심금을 울렸다. 어느 누구도 순희의 깊은 의도인, 인적 쇄신을 감지하지 못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긁어 부스럼 만들 시점이 전혀 아니었다. 수리 무릎이 순희 후배 똥 방지로 갔다. 수리가 눈짓을 줬다. 순희 대학 후배가 수리를 따라서 실험실로 들어갔다.
“아세톤 찔러서 밤새도록 돌려…”
“안됩니다. 그렇다고 점성 높은 화물이 안 날아갑니다.”
“해!”
“안됩니다.”
“그럼! 어떻게 할거야?”
“버리십시오.”
그때 하필 수리 가슴에는 자격지심이 이글거렸다. 이 놈이 나를 분석에 대해서는 개뿔도 모르는 놈으로 취급하는구나.
‘새끼! 더럽게 잘 난척하네. 그래! 비 전공자란 말이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자네 선배님에게 나는 말을 못하니까 자네가 얘기해.”
그때 안순희가 들어왔다.
“찔러! 너! 퇴근하지 말고 밤새도록 정상으로 만들어. 가스와 전기세는 월급에서 삭감. 알았어?”
‘더러워서 정말!’을 뇌까리며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 수리가 컴퓨터로 총알처럼 날아갔다.
“형님! 벌써 은행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렇게 당하고도 기대를 하다니 참 한심합니다.”
안순희의 공개되지 않은 축의금을 낸 사도유화 울산 공장 임직원만 700여명과 본사에 300여명과 계열사 등 어림잡아 1000 곱하기 30만원. 그리고 갈취. 수리는 3억 이상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안순희의 영역은 수리가 잘 알고 있었지만 수리의 영역은 안순희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세히 알게 되었다. 한가지 수리에게 혜택이 있었다면 Give & Tank(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준다) 을 지켜야 할 수리의 불편이 덜어졌다. 수리 휴대폰과 전화번호부에 있는 번호를 순희가 불굴의 의지로 자기 휴대폰에 전부 입력해 뒀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선박 일정 때문에 오후 3시에 순희 집에서 전통혼례를 하기로 급하게 바꾸었다. 목이 닳도록 수리와 순희는 물론이고 조카들까지, 계좌이체 하지 않은 친인척과 지인들에게 장소 변경을 알렸다. 그렇게 드디어 예식이 시작할 때 신랑 각시가 나타나지 않았다.
간혹 이런 경우는 있다. 신혼 여행 갔다 올 때 기상악화로 비행기가 연착할 때, 신혼부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가까운 친인척들. 염장이 뒤집어질 경우가 종종 있다. 축하객들이 딱 그랬다. 결혼식 당일이라 그래도 직원들이 수리와 순희에게 배려를 했다. 가장 간단한 일인, 왕복 3시간정도면 끝날 일인 샘플을 채취하러 통 선을 타고 바다에 나갈 때 순희가 허겁지겁 쫓아 수리 차에 탔다.
“둘이 하면 아무래도 낫겠지. 정면 주시. 직진!”
“안돼! 위험해. 내려!”
“내 몸 하나 정도는 나도 잘 간수할 있어. 너나 잘해.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빨리 출발해.”
그렇게 옥신각신 30분 허탕 세월. 순희의 고집은 어떤 식으로든 합의가 있어야 꺾을 수 있기 때문에 수리는 자신이 없어 그냥! 같이 갔다. 작은 통 선을 타고 먼 바다로 가, 순희 배가 아닌 쇠 덩어리 배에 올랐다. 거기서도 안순희는 자기 몸뚱이를 과신했다.
“차!”
반항아의 눈초리를 수리를 노려보며 구명조끼를 거부했다.
“여긴 자기 의지대로 몸뚱이를 간수되는 데가 아냐. 시간만 자꾸 지나가잖아. 빨리 끼어 입어.”
어르고 달래 겨우 구슬려 끼 입히는 데 20분. 그 다음 줄 사다리. 몸매만 보려고 수영을 가리킨 걸 수리는 엄청 후회를 했다. 줄 사다리 앞에서 계속 투덜대고 있었다.
“나! 수영할 줄 아는데. 이거 안 껴 입어도 되는데..”
그렇게 겨우 줄 사다리를 잡는데 30분. 다행히 줄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건 출신 성분의 혜택을 봤다. 감 따러 감나무 타본 실력과 전국방방곡곡의 산을 기어 올라 쫓아 다니며 아궁이에 불을 댕길 솔가리 긁어 모은 실력이 나왔다.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면 수리의 정수리가 순희 엉덩이를 떠받쳐 밀고 올라갈 뻔 했을 것이다.
그 다음 수리가 형님이라 부르는 배의 일등항해사를 만났다. 항해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야단을 쳤다.
“이 위험한 데 여직원을 데려오면 어떻게! 빠지기라도 하면 나도 책임이 있는데..”
안순희의 똥 씹은 인상이 또 나왔다. 양 주먹을 옆구리에 딱 붙이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저! 수영할 줄 압니다. 여자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백인들. 민망할 때 얼굴. 타오르는 태양과 같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사나운 안순희의 눈초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수리는 망설여야 했다. 이렇게 사나운 여자와 오늘 결혼한다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울상이 됐지만 그래도 말은 해야 했다. 듣자마자 항해사의 얼굴은 여명이 사라진 새파랗게 질린 푸른 바다가 돼 버렸다. 침묵 뒤에 비친 오직 근심뿐인 얼굴. 안순희가 알아듣지만 못했다면 아마 항해사는 ‘오 마이 갓’을 외쳤을 것이다. 둘이 오가는 눈치를 보고, 눈치 빠른 안순희의 급변한 근심뿐인 얼굴. 항해사와 똑 같은 새파란 바다로 변해 있었다.
“어떤 사이야?”
“응! 형님!”
사도유화에서 보고 터득한 처세술을 바로 발휘했다. 경호보다 허리가 더 숙여졌다. 코를 바닥까지 내려 놓고 머리만 돌려 물었다.
“자기야! 아주버니를 영어로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아주버니라 부를 일이 있었어야 외웠지. 몰라! 나 원! 씨! 허접스럽게(one's husband's older brother)떨지 말고 그대로 올라 보고 미안하다고만 혀!”
외국인을 만나 한마디라도 말하고 싶어 안달인 저 표정. 수리는 이 와중에도 눈에 콩깍지가 씌어 있어 웃으면서, 으스대고 싶은 거만! 에라 모르겠다. 대충 짜깁기를 해 절반의 힌트를 주고 샘플 채취하러 유조 탱크로 가고 있었다. 당연하게 전혀 이해를 못했으니, 쪼르르 수리 옆에 붙어 살짝 상한 자존심을 역공으로 덮으려고 했다. 경험을 깡그리 무시한 주입식 교육의 병폐. 자기 후배와 똑같이 무시하며 잔소리를 해댔다.
“영어 좀 하는 줄 알았더니 뭐 별로 네. 그리고 바로 채취하면 어떡해! 화물로 병을 열 번은 헹궈야지.”
수리 치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여기가 싱크대냐? 둘이 죽이 착착 맞아 무시하는 꼴을 못 보지. 결혼식 마치자마자 바로 잘라 버린다. 그 사이 바다 날씨가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너울이 점점 거세 지고 있었다. 순희가 바다의 변화를 알지 못하듯이 내가 자연의 마음을 어찌 아오리까! 수리는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순희가 원하는 대로 샘플을 채취를 마치고 내려 올 때 항해사가 결혼 선물이라도 줘야 하는 데 줄게 없다며 양주를 순희 손에 올려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