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퇴직한 상사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없는 상사들과 같이 손발을 맞춰 이익을 챙긴 일들까지 무슨 옛 시조 읊듯이 줄줄 낭송하면서 부장을 압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듣기 거북한 말만 쏙쏙 골라네 오금도 저리게 하는 말만 서슴없이 해댈 때 박대리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부장도 소장도 챙길 것 다 챙겼기 때문에 지금 퇴사를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박대리는 이제 막 첫발을 디뎠기 때문에, 소장이 발설하는 순간에 해고는 물론이고 쥐꼬리만큼 챙긴 돈과 만약에 회사에서 고발이라도 하면 등등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소장이 하고 있는 말들은 전부 날카롭게, 뾰족이 날이 선 경고의 칼끝이었고 바로 목젖에 붙어 있는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말밖에 없었다. 칼날이 아래로 내려 놓을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부장은 한숨만 내쉬며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궁리에 빠져 들어가 있었다.

　드디어 부장을 입을 열었다. 박대리가 꺼낸 의견을 조금 수정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제의를 했다.

　“소장님! 소장님 같은 회사 중에 조그마한 회사 없습니까? 이 참에 작은 회사 이름 빌려 우리회사 일 가지고 가세요.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서둘러 이름 하나 빌리세요. 그래야 제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소장 회사 이름은 절대 안 되는 건 아시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니 서두르세요.”

　그때 박대리가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벌써 김소장이 회사 이름을 빌려 사장이 된 듯이 격식을 차린 말을 하지만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

　“그 새끼는 절대 데려오지 마십시오. 부탁합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김소장 화색은 그리 밝지는 않았다. 무슨 고민이 빠진 듯이 어두워 보였다. 표정에 어울리는 말이 나왔다.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이 바닥에서 제일 큰 어른인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여기저기 검정회사에 전화를 해 엄포를 놓은 걸 후회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말을 뒤바꾼다면 얼굴 들고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건 불을 보듯이 뻔하기 때문에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박대리가 며칠 뒤에 배가 들어오기 전에 빨리 회사를 찾아보라고 채근하고 있는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미 김소장 회사와 사도유화와의 거래는 끝났고, 또한 본사에서 김성태 회사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공문도 빠른 시일 내에 내려 질 거라는 짐작을 이 세 사람이 동시에 하고 있는 터였다. 김성태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 박대리의 말대로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회사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김성태가 직원들 걱정을 할 사람이 아니란 것도 두 사람은 훤히 알고 있었다.

　 단지 요식행위로 뜸을 들이고 있는 중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비겁한 짓을 해. 더럽게. 그래도 이부장이 그렇게 하라니… ”

　은근슬쩍 부장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소장 말에 두 사람은 속으로는 비웃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고 의리가 있는 척 할 뿐이란 걸 훤히 알기 때문에 안쓰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존경의 메시지를 보내주고는 남은 소주를 남기고 자리를 옮겼다. 이들이 몇 십 년 동안 궁합을 맞춰 다니던 룸살롱이었다. 마치 입영전야처럼 달래고 위로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술이 들어가면 갈수록 부장 입에서 위풍당당하게 나오고 있었다.

　박대리는 이 두 사람에게 관심을 끊은 지 오래되었다. 옆에 앉은 아가씨에게 백년해로할 듯이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말씨로, 돈만 주면 하룻밤은 쉽게 불태울 걸 가지고, 배우자가 될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안달이 난 놈처럼 일명 ‘작업 걸기’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탱크터미널에서 또는 납품회사 직원이나 사장에게 했던 말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나긋나긋했다. 그날 밤 박대리는 노력의 대가로 소망을 이뤘지만 파헤쳐보면 그 노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소장 주머니를 털어내느라 가슴 졸이며 어르고 달랜 노역의 결과였다.

　그 시각에 수리는 배에서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에 기름을 넣듯이 배에도 마찬가지다. 배에다가 넣은 연료용 기름(fuel oil, marine gas oil)을 주로 벙커(bunker)라 한다. 이 연료용 기름인 벙커는 운송하는 배가 따로 있어 그 배는 먼 바다 위에서 연료를 필요로 하는 배에 공급을 한다.

　수리가 하는 역할은 선박회사와 연료를 공급하는 회사간에 주고 받기로 한 수량이 정확하게 전달되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주로 500톤에서 1,000톤을 공급하기 때문에 한번 바다로 나가면 거의 12시간 이상은 배에 있어야 했다. 그것도 바다 날씨가 좋을 때만이지 파도가 심하게 치는 날에는 잠잠해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했다.

　오늘은 다행히 잔잔한 호수 같은 바다여서 햇빛에 반짝이는 하얀 수정 알 같은 파고를 사진에 담으며 무료한 시간을 유익한 시간으로, 늘 그렇듯이 활용하면서 복귀했다. 보고서를 작성해 팩스를 보내고 창가에 둔 선인장으로 가던 중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와 집어 들어 대충보고 책상에 두고는 가던 길로 갔다.

　7월의 뜨거운 햇살에 게 발 선인장 마디 몇 개가 누렇게 변해있었다.

　“아차!’하며 자책했지만 이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 누렇게 변해버린 불쌍한 선인장을 들고 책상 위에 올려두고 또 간청을 한다.

　“올해는 제발 꽃 좀 봅시다. 너무 값 튕기지 말고 한번 봅시다. 아무데서나 잘 자란다 드니 자라기만 하면 뭐합니까? 꽃이 피워야죠.”

　물뿌리개로 제법 선인장 티가 날 정도로 자란 마디 마디에 물을 뿌리고 책상으로 돌아가 앉아 던져둔 서류를 본다.

　“어떤 등신 같은 놈이 이런 걸 공문이라고 보냈어. 이 회사는 서식도 없나?”

　다시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떤 놈이 이걸 작성했지? 여기가 무슨 자재 납품 회사인 줄 아냐?

　누가 봐도 수리 표정은 어이없어 웃는 얼굴임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업무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 보낸 게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기에 딱 어울리는 공문이었다.

　어떤 개구쟁이가 장난으로 보낸 팩스인가? 발신번호를 확인했지만 장난은 아니었다.

　이런 멍청한 놈이라면, 장난끼가 살짝 발동했다. 건당 천 만원 해버려? 만약에 그랬다가는, 빙그레 웃으며 생각을 이어갔다. 발 없는 소문이 거래하고 있는 회사에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아무 관련도 없는 회사 때문에 꼬리 문 소문 때문에 이미지만 나빠질 뿐. 덕이 될 건 하나도 없다.

　만약도 생각해야 한다.

　훗날에 회사가 성장하고 난 뒤에 혹시라도 운 좋게 이 회사와 만난다면. 들러리는 확실하지만 성의 표시는 정성껏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다른 회사에 보냈던 견적서 파일을 열어 회사 이름만 바꿔 팩스를 보내려고 하다가 다시 한번 확인을 하면서 석유화학단지 내에 있는 공장들과 거래했던 때를 떠올린다. 물론 그때는 직원이었다.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 거래하는 회사와 만약을 대비해 비교를 한다.

　일 욕심에 낮게 냈다가는 지금 거래하는 회사의 귀에 들어가 항의 또는 거래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불쑥 든다. 최대한 성의 있게 많지도 적지도 않은 가장 적절한 금액을, 견적서를 내라고 보낸 담당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제법 시간을 투자해 보내고 손을 털털 턴다.

　사도유화에서 꼼꼼히 살려봐 줄 거란 기대 같은 건 하나도 없다. 들러리고 분명하다. 그래도 모처럼 견적을 냈다는 생각에 개운한 마음으로 집으로 간다.

　출근하기 싫은 날이 셀 수없이 많았지만 오늘처럼 짜증이 나고 아무데나 대고 앙탈을 부리고 싶은 마음 때문에 회사에 가기 싫은 날은 처음이다. 어깻죽지부터 시작해 어느 부분이라고 꼭 집어 여기라고 지정할 할 수 없는 체외가 아닌 체내 어딘가가 몸살이 난 것처럼 근질근질하고 욱신거리며 열기도 올라온다. 찬물 속에 들어가던가, 밤새도록 운동장을 뛰던가, 베개를 쥐어박던가, 그러면 이런 증상이 없어지지 않을 까, 갑갑한 채로 밤을 보낸 순희가 출근한다.

　회사가 가까워질수록 본사와 송차장과 공장장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견적서를 제출하라는 공문을 작성하고 보내라는 하명을 충실히 따른 대가가 너무 잔인했다.

　눈에 가시처럼, 벌레처럼 대하고 있는 부장의 부라린, 멸시하는 눈초리와 괴성. 밤새도록 순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디던 넘기 어려운 문턱도 한번 넘으면 쉽다는 말이 있듯이 경비실을 통과하고 사무실 문턱을 넘어 책상에 앉아 아무 서류나 보는 순간에 밤새도록 잠을 못 잔걸 후회한다.

　그리고 어제와 밤새도록 고생과 고민한 보람이 있는지 궁금했다.

　팩스기 앞으로 간다.

　주먹을 불끈 쥐고 뿌듯한 성취감에 쾌재를 부를뻔한다. 팩스기에는 몇 장의 견적서가 밤새워 순희를 기다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견적을 보낸 회사가 순희가 보내라고 한 회사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대 여섯 회사뿐이었다.

　오전에 더 들어오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아 밤새 온 메일을 확인하고 있다가 잠시 고개를 갸웃한다. 견적서를 제출해달라고 작성할 때 메일 주소는 넣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부서 공용메일로도 견적서가 와 있다.

　거래하지 않는 회사에 공용메일이 한번 오픈 돼 버리면 업무와 관련이 없거나 아니면 이런 견적과 관련해 질문들이 쏟아져 업무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팩스로 보내라고 했는데도 메일로 보낸 회사들을 보면서 어떻게 알고 보냈는지 궁금하기도 한다.

　매일로 보내온 견적서를 일일이 프린트도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짜증도 났지만 대신 해 줄 사람은 없다. 어쩔 수 없이 프린트를 하고, 보내온 견적서를 검토하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획일적이었다. 몇 천원 사이의 견적들뿐이었다. 팩스를 보낸 시간들도 거의 비슷한 걸 보고 서로 머리를 맞대 가격을 맞춘 게 아닐까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서류함에서 얼마 전에 받은 보고서와 계산서를 비교하자마자 피씩 웃음부터 나온다. 몇 천원 차이만 아니면 담합이라 생각하지 않고 대부분 이 정도의 용역 비를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김성태소장 회사보다 두 배나 높게 견적을 보낸 금액들이 일괄적으로 몇 천원 사이다. 순희는 여기까지만 생각했다. 순희가 할 일은 차곡차곡 정리해 박대리 책상에 올려다 놓는 일이었다.

　박대리도 이부장도 출근 시간을 맞추지 않고 아주 조금 늦게 들어왔다. 박대리는 파김치 공장에서 불량품으로 처리된 파김치처럼 너덜너덜한 상태였고 이부장은 술독에서 갓 기어 나온 성난 불독같이 팅팅 부은 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지나간 뒤로 풍기는 썩은 내장 냄새에 전 직원이 헛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