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한 여자라는 약점을 빙자해, 스스로 몸을 지켜야 하다며 샌드백을 주먹으로, 발로 가격하는 훈련을 시켰다. 거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발이 샌드백에 닿지 않는다며 가랑이도 찢었다.
더 가관인 건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는다고 한쪽 발은 말뚝에 묶고 한쪽 발은 저 영악한 할망구가 꼼짝도 못하게 못 잡았다. 그리고 우악스런 놈이 배 위도 아닌 허리에 올라타 누르기 시작했다. 그때 순희는 처녀성이 터질듯한 통증을 느꼈다. 남의 귀한 처녀의 처녀성을 터트려놓을 작심을 해놓고도 아들은 다른 데 장가를 보내는 저 영악한 할망구. 그렇게 찢어버린 가랑이가 쭉쭉 뻗어 질 때 둘이 마주 보고 앉으라고 했다.
그때 순희는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순희 손은 수리 엉덩이를, 수리 손은 순희 엉덩이를 바짝 잡아 당겨, 똥구멍도 바닥에 바짝 붙여, 다리를 양쪽으로 쫙 벌리게, 엄지 발가락까지 딱 붙이게 해 놓고선, 둘의 다리 길이를 비교해 재고 있었다. 수리 사무실에 줄자가 그렇게 많은데도 둘이 한 몸이 되게 꽉 붙여 놓고 길이를 재는 괴이한 짓까지 시켜 놓고 장가는 딴 년에겐 보낸단 말인가?
순희 기억으로는 양쪽으로 벌어진 다리 길이가 거의 같았는데 마지막에 조금 더 벌리려고 힘을 꽉 줄 때 그 놈의 거시기가 구멍에 부딪히는 바람에 무릎을 움츠렸다. 그때 젠 길이로 짧은 걸로 판명이 나버려 억울해했다.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시키고 어이가 없게, 너는 다리가 짧으니 혹시라도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다리를 너무 치켜 올려 차지 말고 방금 부딪힐 뻔 한데로 차버리라고 했다. 말하자면 고자로 만들어버리라고 했다.
지금 순희 마음이 딱 그 마음이었다.
할망구가 마루에서 내려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며 수리 방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주머니에 뭔가를 넣으면서 나오고 있는 모습이 순희 레이저에 딱 걸렸다. 그냥 넣으며 나왔다면 레이저는 가동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힐끔거리는 눈. 의심사기에 충분했다.
그 모습을 보고 뭔가 께름칙해지면서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역겹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면서 발이 자동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은행나무로 날아갔다. 처녀성이 터질뻔할 정도로 단련된 가랑이의 위력이 발바닥에까지 전해지면서, 은행 잎이 처녀 성이 터진 것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순희는 바로 쪼그려 앉을 수밖에 없었다. 수리 어머니가 주머니를 꽉 쥐고 뒤 돌아보고 있었다.
포탄이 쏟아질 때 하는 자세인 귀도 막고 눈도 막고 코도 막아 거의 엎드리듯이 쪼그려 앉는 바람에 수리 어머니는 순희를 보지 못했다.
일단 오늘은 거사를 치르기에는 부적절한 날이라고 판단한 순희가 맥 빠진 초췌한 모습으로 집으로 갔다. 그때 올케가 놀란 눈으로 다가와서 팔을 잡고 이유를 물었지만 씁쓸히 웃기만 했다.
옷을 갈아입고 씻으려고 했지만 그럴 힘도 없어 벽만 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벌써 탈곡을 끝낸 볏단과 벼 베기를 기다리는 노랗게 익은 벼에서 구수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순희 코끝을 스쳐 지나가 버린다.
이놈도 나를 외면하나?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온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나는 게 그리 슬픈가?
나는 풍미해보지도 못했는데. 순희 눈에서 눈물이 난다. 코스모스 앞에 앉았다. 가을 들녘이 저물어가는 석양에 비쳐 노랗고 붉게 칠해진 도화지 같다. 쪼그려 앉는다.
남들은 연애 기간이 얼마나 될까? 시작점과 끝점이 있나? 그럼 우린? 아니지!
참! 그 사람! 아니! 그 새끼는 결혼 한다고 했지. 그랬구나. 그래서 가까이 오지 않았구나.
그런데 나는 왜 그에게 마음이 가 있었을까?
산적 같은 놈이 현명한 구석은 있었구나.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한 배려였구나. 눈물 나도록 고맙다. 등신. 머저리. 새끼야!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오지랖을 떨었던 한심한 자신이 꼴 보기 싫은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빨리 넘어가라. 순희는 기도하고 있었다. 길가에서 살랑거리는 코스모스도 들국화도 잡초도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실컷 울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길가에 떨어진 눈물에 잡초가 다시 무럭무럭 자랄 것만 같았다.
‘엉! 엉! 엉! 등신아! 등신아!’
이렇게 가슴을 치며 울고 싶었지만 남들의 이목과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도 없던 순희는 이를 꽉 깨문다. 그런데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은 나오고 말았다. 멈추도록, 닦으면 닦을수록 더 쏟아지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얼른 흘리고 눈물 샘을 바짝 마르게 해버리자. 두 번 다시 절대 눈물이 못 나오게 사막으로 만들어버리자. 오아시스 자체를 없애버리자. 더러운 놈! 장난 칠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쳐? 그런데 이상하다. 순희가 고개를 갸웃한다. 잊으려고 하면, 버리려고 하면, 왜 생각이 더 나지. 눈물은 왜 더 나지. 아예 생각을 말자. 그때였다.
“어! 누가 우리 아가씨 눈에 눈물 나게 했어? 그 놈이야? 그 놈을 내가 가만히 놔두나 봐라. 아가씨 울지 마세요. 남자가 지천에 깔려는데 뭐 그런 놈 때문에 울어요.”
하필이면 눈치 백 단인 새 언니 퇴근 길이란 말인가? 항상 책잡히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막내 동생이 되기로 한다. 콧물 눈물 전부 새 언니 가슴으로 찔찔 새어나가고 있었다. 새 언니는 오래 전부터 시누이가 수리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 놈이 집 앞에 태워다 준 후 시누이 대화 속의 주인공은 항상 그 놈뿐이었다.
이전에는 이부장과 박대리가 주인공이었고 그들은 항상 악당이었는데 그 놈은 정반대의 역할을 했다. 대화 속 주인공이 바뀌면서 시집왔을 때 본 밝은 순희로 되찾아 온걸 보고 새 언니는 그 놈이 어떤 청년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들었던 그 놈 주위 사람들을 생각하면 공존공생을 기대 하면서도 소름이 오싹 끼치던 중이었다. 그래서 새 언니는 다행이란 생각도 하고 있었다. 새 언니 손에서 나온 따듯한 열기가 등을 통해 눈물샘으로 전해진 것 같았다. 새 언니는 눈물 샘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눈물 샘에 눈물을 공급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고! 그 놈을 내가 혼을 내줘야겠다.”
순희 가슴과 눈만 혼이 나고 있었다.
“아가씨! 솔직히 아가씨가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가씨는 부잣집 며느리로 어울리지 그런 깡패하고 전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다행이다.”
새 언니가 말은 다행이라고 했지만 절대로 다행이 아니었다. 차라리 수리라는 사람 자체를 모르는 게 오빠 입장에서 이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히려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순희 오빠는 TS건설의 하청을 오래 전부터 받고 싶어했지만 그 회사의 구조는 이미 오래 전에 완공한 피라미드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틈새가 전혀 없다는 말을 새 언니는 오빠를 통해 숱하게 들어왔다. 그런 연휴로 그 집안 사람들이야 깡패던 살인마 집단이던 그 사람만 괜찮다면 아가씨가 그 집안과 연을 맺어줬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지만 반대의 상황도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눈물 콧물을 쏟아낼 정도라면 아가씨는 연인 사이에 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점을 벌써 넘어 갔다. 그런데 헤어진다. 뜨겁게 불붙는 사랑을 하다가 헤어진 사람들. 뜨거운 사랑을 했듯이 가슴에 불을 붙여 치고 박고 싸우다가 헤어지는 경우와 한 순간에 뜨겁게 불이 붙였듯이 한 순간에 차갑게 식어버려 헤어지던 말던 제 각각의 이유는 있겠지만 이별은, 서로에게 부담으로 남는다. 그리고 사회 통념상, 여자라는 이유로 여자가 피해를 본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오빠에게 온다.
조카며 동생인 그 놈과 염문이 난 여자의 오빠에게 과연 일감을 줄까?
그들은 후환의 소지를 절대로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가차없이 주먹을 휘두른다고 들었다. 그 놈이 아가씨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TS건설이 알게 되면 당연히 오빠도 부담스러워하는 건 불을 보듯이 뻔하다. 드러내 표시는 내지 않겠지만 가능한 한 배제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가씨가 힘이 있어서 TS검정이 일을 못하게 할 수도 없는 입장이란 정도는 새 언니도 잘 알고 있었다. 이래저래 안타까운 마음만 있지 달리 위로할 방법이 없던 새 언니가 한숨을 내쉬며 한번 더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를 한다.
“아가씨! 좋은 남자 지천에 깔렸어요. 힘내요. 그 사람은 아가씨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말은 순희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지만 편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데만 위안을 삼았다.
순희는 며칠 뒤에 중요하지는 않지만 실험실에 둔 소지품을 찾으러 살짝이 TS검정을 찾아갔다. 그 사이에 직원들이 검정을 마친 보고서를 회사에 가져다 주며 요즘 왜 오지 않느냐고 묻기도 해 난처할 때도 많았지만 바빠서 그렇다고 에둘러 피하기만 했다. 매정한 놈. 직원들처럼, 죽었는지 살았는지, 묻는 전화 한 통 없었다.
문은 언제나 활짝 열어두라고 명령하듯이 말한 그대로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경호는 물론이고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딱 한 명. 네까짓 것 정도야! 어깨에 힘을 주고 배에도 힘을 잔뜩 주고 의기양양하게 들어갔다. 이런 젠장 어깨와 배에만 힘을 줬지, 요염한 아가씨의 씩씩한 발걸음은 나오지 않았다.
“어험! 어험!”
내가 왔노라. 칸막이너머로 누군가의 정수리만 보인다. 헛기침을 두 번이나 해도 아무런 효력이 없다. 김샜다. 그런데 순희의 헛기침이 바깥에서 효력을 발휘했다.
‘어험!’을 한번 더 하려고 배에 힘이 들어갈 때 책상에서가 아닌 밖에서 거대한 덩치들이 몰려 들어 왔다. 뒤따라 달려와 호통을 치고 있는 사람은 김성태 소장이었다.
“시건방진 새끼! 야! 이 새끼 앞으로 부둣가에 얼씬도 못하게 발모가지를 작살내버려. 뭐해! 빨리 해 치워.”
순희에게 이런 식의 위압적인 고함소리는 이부장에게 워낙 많이 들어서 어느 정도는 숙달돼 있어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뒤따라오는 남정네들이 문제였다. 만약에 김소장 혼자 저렇게 고함을 질렸다면 얼싸! 얼싸! 하면서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중 한 올도 틀리지 않고 고함을 질러주는 김성태가 눈물 나도록 고마워 얼싸 안고 펑펑 울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순희는 지금 그럴 감사를 표시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맞아 죽을 놈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앞에 덩치 큰 남정네들이 버티고 서 있어, 밀쳐내 찾으러 갈 수 없는 입장이었다.
실망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잘난척하면서 모자간에 똘똘 뭉쳐 가랑이까지 찢어가며 호신술을 가르치더니 막상 그런 상황에 닥치니 그 놈의 잘난 머리 꼭대기인 정수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책상 속에 숨었다는 것으로밖에 순희를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야 임마! 책상 속에 기어들어가서 뭐해. 빨리 기어 나와 새끼야!”
순희 예상이 맞았다. 지금 상황에서 놀란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는 건 당연하지만 어찌 된 판인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저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어.
‘야! 허풍 떨듯이 사내답게 나와! 거기서 뭐해.’
순희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뒤로 물러서 경호에게 이 상황을 열심히 문자로 생방송하고 있었다.
“뭐 그리 급해요. 이렇게 기습적으로 오면 어떡해요. 한판 붙으려면 나도 장전은 해야 할 거 아니오. 조금 기다려 봐요. 병사도 많은데 내가 어디를 도망칠 거요. 10초만 기다려요. 다 돼가니.”
마음이 급한 순희의 손에 경호에 대한 존칭은 사라지고 손만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호야! 회사에 총도 있어? 총알 넣고 있데. 총 쏘려는 같아. 빨리 와!’
본인이 생각해도 대단한 안순희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철자하나 틀리지 않고 광속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