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가 할 일인 분석을 해주고 귀가를 했다. 주말에도 수리를 놀라게 했다. 실험실이 순희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졸지에 급여도 주지 않고 화학을 전공한 직원 한 명 채용한 셈이 돼 버렸다. 게다가 게발 선인장이 비로소 아무데서나 잘 자라고 있었다. 순희가 야무지게 잘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수준 차이를 느끼게 해주었다. 수리가 비애를 느낄 정도로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리에게 분석하는 방법을 배웠고 얼마 지나지 않자 기억 상실 증에 걸린 사람이 기억을 되찾은 듯이 분석에 대해서는 펄펄 날았다. 그러면서 시건방지기 시작했다.
수리가 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맞벌이 부부 같이, 퇴근 후에 자기도 피곤한데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고 잔소리를 늘여놓듯이 분석을 둘째치고 자기가 소비한 가스나 전기세를 가지고 이것도 못하느냐, 아껴 쓰라는 등 구박까지 하게 되는 관계로 발전해버렸다. 게다가 수리 일거수일투족도 감시하는 안방 마님으로 변해 버렸다. 그건 본인도 인식 못하고 있었다.
“이대리님! 이 인간 또 어디 갔어요? 어찌된 판인지 올 때마다 없어요.”
TS건설에 출근하지 않고 TS검정 직원이 돼버린 이대리를 노려보고 또 닦달하며 물었다. 이름도 성호라고 부르지 말고 경호로 불러 달라는 이대리가 눈을 꽉 감아버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아~~ 예…. 형님! 외근 중입니다. 오늘은 배타고 멀리 가서 늦을 겁니다.”
‘아차!’ 할 겨를도 없었다.
“사장님보고 형님이 뭐예요? 앞으로 사장님이라고 부르세요. 밖에서도 그렇게 불러요?”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이렇게 노려보기까지 할 때는, 바깥 살림은 정수리가 하고, 안 살림은 안순희가 하는 구도로 가닥이 잡혔고 또한 회사도 안순희에게 알게 모르게 벌써 점령당했다고 경호는 확신하고 있었다.
여기는 TS건설이 아닌 TS검정이지만 어차피 TS는 같다는 생각을 경호는 늘 하고 있었다. 구도가 바뀌었다. 개 버릇 남 못 주고 고스란히 간직하는 짓인 구십 도로 허리를 굽히며 시정하겠다고 한다.
“예! 죄송합니다. 사모님! 조심하겠습니다.”
그러나 순희에게는 이 자세에서 첫 대면을 떠올렸다. 공포 그 자체였다. 자동적으로 똑 같이 허리가 굽힌다. 그런데 말이 조금 이상하다. 갸우뚱한다.
‘사모님! 내가 왜?’
조직에서 하던 그대로 경호는 아직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순희가 허리를 펴야만 펼 수 있는데 순희도 이부장에게 배운 그대로 경호가 허리를 먼저 펴주기만을 기다리며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경호가 턱을 약간 치켜 올려 쳐다봤지만 순희 시선은 바닥에만 가 있었다. 눈이라도 마주쳐야 허리를 펼 수 있는데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순희가 허리를 숙인 채 머리만 까닥 들어 물었다.
“방금 뭐라 했어요? 사모님?”
그때서야 경호가 손바닥으로 두 눈을 막았다. 여기에 오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인사하지 마라고 수리에게 누누이 들었는데도 깜빡 해버렸다. 머쓱하게 허리를 펴자 순희도 같이 펴면서 같은 질문을 똑같이 또박또박했다.
“사모님이라고 했어요? 제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요?”
이 말로 따지려고 한 게 아니었다. 순희가 따지고 싶은 말은 ‘시집도 안 간 년에게 사모님이라니. 누구 혼사길 막을 일 있어?’ 중 혼사에 대한 말만 빼고 따지려고 했지만, 워낙 시집갈 나이라는 말을 많이 듣다 보니 은연중에 엉뚱한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그것도 앙칼진 목소리. 시집이란 말이 스트레스로 잠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경호가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싸움이라고는 주먹으로만 했지 입으로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백전백패다. 어떻게 대처할 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경호가 눈만 멀뚱히 마주치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 없이 눈만 보고 있는 경호에게 순희도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따져본 것도 처음이지만 특히나 직장에서, 그것도 남자에게 이런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우악스럽게 생긴 남정네에게,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과감한 말이 나왔을까? 짜릿한 희열과 쾌감 뒤에 따라오는 공포. 꽁무니 빼는 게 최상책이다. 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형수님들을 부를 때 이렇게 불러서 자연스럽게 사모님이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형수님!”
갈수록 태산이었다. 내가 왜 너 형수냐? 차라리 그대로 사모님으로 불러. 아니다. 사모님도 격이 있다.
이 아름다운 이름. 순희! 순희가 왜? 깡패 새끼의 마누라가 돼 어쭙잖은 사모님이란 호칭을 달아야 하나? 사모님이라고 불러 놓고 돌아서서 비웃을 뒷담화가 왜 하필 이 순간에 떠오르나?
맞다.
그런 경우를 숱하게 보아왔다. 부장 부친의 칠순 잔치가 가장 최근의 사례다. 전부 아버님, 아버님이라도 했다. 그렇게 불렀던 사람들이 잔치를 마치고 나오자 마자 전부 화장실로 들어가 입부터 헹궜다. 장래가 훤히 보인다.
저 놈! 경호도 만약에 수리와 원수가 돼 돌아서면,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눈으로, 제 주제도 모르고, 네 년이 언제부터 사모님이었나? 깡패 새끼 마누라 주제라고 뒤돌아서 비웃을게 뻔하다. 제 주제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사회적 관습에 저 놈도 분명히 물들어 있을 것이다. 아이고 불쌍한 수리야. 어쩌다가 그 주제가 되었냐?
내까지 쑤셔 넣지 마라.
손가락질 당하는 더러운 사모님이 되느니 깨끗한 거지 마누라가 되련다. 그런데 이 놈의 거지 새끼는 또 어디 갔어? 일은 내팽개쳐버리고 어디를 싸돌아 다녀? 정말로 내까지 거지로 만들 속셈인가? 순희는 심히 염려하고 있었다.
“몇 시에 들어와요?”
물어놓고 바로 후회했지만 벙어리 냉가슴 앓느니 잘 물어봤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을 기다린다.
수리는 오늘 배에 갔다가 바로 결혼사진을 찍으러 간다고 했다. 이대리가 여기로 출근하기 전에는 수리는 잘 알고 있었지만 취미가 사진 찍기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 기술로 결혼 사진을 찍어주고 아르바이트 한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
“오늘은 늦을 겁니다. 결혼 사진 찍으러 갔습니다.”
경호가 서너 달 동안 지켜 본 두 사람의 관계로는 각자의 취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순희 얼굴은 하얀 백지장으로 변해버렸다. 몸도 가누지 못해 책상 한 켠에 의지한 채로, 눈동자 또한 풀린 채로 경호를 보고 있었다.
직원들 중 어느 한 명도 책상에 머리만 박고 있지 순희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대리도 고개만 갸우뚱하며 약간은 귀찮아하는 표정을 순희에게 보냈다. 순희는 무슨 의미인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공부에 방해가 되니 빨리 나가달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얼핏 눈에 들어온 책은 순희가 보고 있는 선박구조 책이었다. 다른 직원도 마찬가지였다. 순희가 공부하는 시간을 뺏었던 한 녀석은 분석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분석을 하고 있었다.
긴 말이 필요 없는 상황. 순희가 설 자리도 앉을 자리도 없다는 말이었다. 나가 달라는 말이었다. 이제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다행히 전 직원이 책상 머리에 머리를 쳐 박고 있어 차갑고 사늘한 시선은 없었다. 오히려 이게 더 순희에게 공허함을 가져다 주었다.
이런 느낌을 받은 배부른 사모님을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궁궐 같은 정원에서 벌어지는 파티장이었다. 서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전부 다 화려하고 값비싼 드레스만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서열이 있었다. 한 사모님을 중심으로 에워싼 화려한 드레스들. 화려했지만 똑같아서 빛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한 여자만이 빛이 났다. 그들 부류에 어울리지 못한 화려한 드레스 하나가 외딴 구석진 자리에 웅크려 서 있었다. 혹시라도 틈새가 있으면 들어가려고 눈치만 살폈지만 그녀가 들어 갈 자리는 없었다. 순희는 그때 측은한 마음을 가졌다. 지금처럼.
‘내가 왜? 여기 있을까? 딴 년의 아지트가 될 곳에.’
한마디로 주책이다. 그 놈도 저놈들도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게 무슨 주책이나? 억울하고 분통도 터졌지만, 직원들이 틀린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그 놈이 손이라도 한번 잡자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난리를 부렸다. 아~~ 창피해.
문득 사모님이나 형수님이란 호칭이 그립다는 생각도 이 와중에도 하고 있었다.
이 놈들이 대우하는 모습은 사모님이나 형수님이 확실했는데 어찌하여 결혼 사진에 나오는 얼굴은 본인이 아닌 다른 여자란 말인가?
직장에서도 여기서도 자신이 앉을 자리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비애도 몰려 왔다. 어느새 눈가가 젖어졌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배웅하러 나오는 놈이 한 놈도 없다는 게 지금의 현실이었다.
가로수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가로수에 등을 기대고 싶었지만 초라해 질 것 같아 차에 탔다. 차도 마찬가지였다. 가능한 한 멀리 벗어나 눈물을 흘리든, 이 새끼! 저 새끼! 개 새끼! 하면서 분통을 터트리고 싶다는 마음밖에 없어 차도, 인적도, 드문 장소를 골라 갔지만, 으쓱한 곳이라고 곳이란 데는 전부 그 놈과의 추억이 베여 있는 곳뿐이었다. 엉큼한 새끼. 이런데 만 데려오면 뭐해! 장소에 어울리는 짓도 한번 못하는 놈이. 미련은 이미 사라졌고 흔적을 없애고 싶어 다시 차를 돌려 찾아 간 장소는 당연히 제 집 드나들듯이 드나든 수리 집이었다.
순희는 수리 방을 자기 집과 마찬가지로 제 집 드나들듯이 드나들어 어떤 소지품을 흘려 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데로 거두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차를 세우고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골집이 대부분이 그렇듯이 수리 집이나 순희 집에나 구조가 쌍둥이처럼 돼 있었다. 마루에 앉은 수리 어머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보자마자 순희 영혼에서 울화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사나운 이빨을 바드득 갈고 있었다. 연세는 둘째치고 시어머니 될 분으로 지정을 해둬 함부로 이런 표현은 쓸 수 없어 주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영악한 년! 며느리는 따로 지정해두고 나를 데리고 놀았어. 으악! 자존심 상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농락해’ 이 생각을 하면서 치를 떨고 있었다.
뒷마당으로 가는 옆에 자두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뛰어가 걷어 차버리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자두나무가 아닌 매달려 있는 샌드백이 타깃이었다. 샌드백을 자신을 농락한 모자(母子)로 삼아 실컷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 뿐이었다. 이 생각을 하자마자 울화통이 또 터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농락에 덧붙여 희롱까지 당했다는, 모자간에 벌인 엉큼하고 영악한 짓도 떠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