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살같이 차에 오른 박대리는 고개부터 숙인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라. 빨리. 빨리. 그가 외는 주문이 아니었다. 본능이 재촉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텅 빈 머리였다. 본인이 생각해도 줄행랑이 틀림없었다. 어느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디까지 갔는지 모를 때쯤 잇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체 이가 갈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일만 시작하면 오늘 수모의 몇 천 배는 갚는다.

　다짐 또 다짐을 한 그는 죄 없는 운전대를 두르려 패고 또 한참을 달리다가 그때서야 지금 몰고 있는 차가 순희 차라는 걸 알게 된다.

　 ‘아차!’ 그 사이에 김소장에게 전화가 줄기차게 오고 있다. 순희에게 전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휴대폰에 불을 낸다. 차를 돌려야 할 상황이지만 길 가에 서있던 그 회사 직원들이 먼저 눈에 아른거린다.

　일단은 회사에 가서 마음을 추스르고 순희는 다음에 생각하자는 마음만 가지고 회사로 간다. 회사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수치심이 다시 그의 정신에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회사 정문에 차를 세우자마자 이마부터 운전대에 박는다. 박으면 박을수록 분통만 터진다.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너무 얕잡아본 자신의 과오도 같이 떠올린다.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난 놈이란 생각도 한다.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까지 시건방질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신중하지 못한 자신의 과오라며 자책을 할 때 박대리는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란다.

　부장이 창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기습공격을 하러 갔다가 기습 공격을 당해 서늘해진 간담에 또 한번 놀란 박대리가 동공이 풀린 채로 부장을 쳐다본다.

　“안 들어오고 뭐해? 거긴 어떤 회사였어?”

　차에서 내리는 그의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린다. 당했던 그대로 말을 하려다가 멈칫한다. 실태를 확인한 결과로는 김소장이 말한 자격조건은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 놈과 직원들. 후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김소장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직원들도 많고 전국에 사무소도 있었습니다. 실험실은 안주임이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험이야 우리 회사에서 하는데 그것까지는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젊은 사장은 어떤 애였어?”

　아직도 박대리 머리는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몹쓸 놈이라고 했다가는 부장 입을 통해 김소장을 통해 그 회사 직원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그 놈 귀에 들어가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그 후가 문제다.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일을 주면서도 괜스레 도망자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 이런 훗날이 불현듯이 떠올라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부장이 차에 오르는 바람에 생각할 시간은 할애를 받았다.

　“뭐해! 빨리 안타고?”

　그 놈에 대한 생각은 둘째치고 급하게 내리느라 시동도 끄지 못했다. 차 안으로 머리를 쑤셔 넣어 시동을 끄고 차 키를 경비실에 맡기려고 뛰어가려고 할 찰라 귀청이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박대리 정신을 또 혼미하게 한다.

　“뭘 그렇게 꾸물거려?”

　이부장 비위를 건드리면 어떤 참변이 벌어지는 지 모르는 사람은 이 회사에 아무도 없었다. 쏜살같이 조수석에 앉았다. 그때 박대리 휴대폰이 또 요란하게 울렸다. 순희 전화가 확실하다는 생각에 얼른 전화를 받았지만 김소장이었다. 고함 소리에 귀청이 찢어지는 통증을 느낀 박대리가 인상을 찡그렸다. 부장이 성난 호랑이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왜?”

　“김소장…입니다.”

　“끊어. 속 시끄럽게.”

　부장 지시에 어떤 토를 달수 없는 건 불변의 법칙이다. 부장이 자기 휴대폰을 박대리에게 던지듯 건네주었다. 지금부터 속 시끄러운 전화는 받기 싫다는 의사였다. 지체할 겨를 없이 전원을 다 꺼버린다.

　“마음 편히 한잔하자.”

　“예!”하며 대답은 했지만 안주임이 계속 신경을 쓰이게 했다.

　“부장님! 안주임 차 키를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참 말 많네. 안주임이 어린 애야? 알아서 하게 놔둬.”

　물론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찜찜한 구석이 있어 문자를 보내려고 휴대폰에 손을 댔다가 내려 놓는다. 부장이 앞으로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노려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전원을 꺼버리라는 신호다. 머뭇거렸다가는 들어도 되지 않을 소리를 듣게 된다. 그건 박대리의 마음이기도 했다.

　순희에게는 부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버리면 충분히 이해하는 건 당연하기 때문에 더 미적거리지 않고 휴대폰을 전원을 꺼버린다.

　비록 부장이 옆에 있지만 후련한 기분도 같이 들고 있었다. 부장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김소장도 부장의 심복인데 그 놈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돈이란 무기 앞에서 심복될 거란 청사진도 아른거린다.

　일이 시작되면 그 놈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졸개가 돼 굽실거리는 건 불을 보듯이 뻔한 사실이다. 박대리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실룩거리고 있었다. 부장 없이도 어깨에 힘을 주고 양주와 아가씨들이 있는 술집을 활보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들뜬 기분에 넌지시 고개를 돌려 부장을 쳐다본다. 세대교체를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걸 부장도 어느 정도 감지를 한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먹구름 같은 어둠이 깔려 갔다.

　“벌써 어두워지네. 지금 몇 시냐?”

　회사에게 퇴근한 당신이 더 잘 알지 내가 어떻게 아냐? 정신이 하나도 없구먼. 아직은 해가 조금 살아 남아 있었지만 부장 마음이 어두워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박대리는 아니었다. 속이 후련한 중이었다.

　수리도 속이 후련하면서도 찝찝한 뭔가에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래도 밝은 척은 해야 했다. 터줏대감의 강력한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불시에 습격해 사찰하려고 했던 소장도, 갑의 특권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김소장을 데려온 박대리도, 이 친구들이 없었으면 수리는 내일 당장이라도 입 소문으로 사업을 접어야 할 위태로운 날이었다. 어울리지 않으려고 했던 이들과 이렇게 또 어울려야 하나. 그러나 표현할 수 는 없는 수리가 손바닥을 한번 세게 친다.

　“자! 자! 고맙고 고생했다. 이대리! 애들 맛있는 거 사줘.”

　박대리가 가는 걸 보고 우르르 몰려 들어온 동생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부둥켜 안았던 수리가 두툼한 봉투를 경호 주머니에 푹 쑤셔 넣는다. 멋쩍게 웃는 경호를 있는 힘을 다해 어깨를 쳤지만 팔목만 뜨끔할 뿐 경호는 꿈쩍도 하지 않고 화장실 쪽으로 눈만 찡긋한다. 이순간만큼은 수리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누구 탓도 못한다. 다된 죽에 코를 푸는 짓을 수리가 자처하고 있었다. 경호가 또 한번 기치를 발휘하면서 들통을 모면했다.

　“사장님! 저 진급시켜주세요. 대리가 뭡니까? 대리가.”

　수리가 화장실 쪽을 힐끔 쳐다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자! 자! 다들 고생했다. 이대리! 오늘 배가 없고 내일은?”

　눈치 빠른 경호가 화장실 근처로 가서 큰소리로 대답한다.

　“없습니다. 오늘 난데없이 무서운 사람들이 와서 굉장히 피곤한데 일찍 퇴근하면 안되겠습니까?”

　“그럼! 당연하지. 한잔하고 내일은 푹 쉬고 이대리만 출근하면 되겠네. 실컷 마셔도 되지만 직원들은 꼭 챙겨라. 한 명이라도 길바닥에 흘리면 안돼.”

　“그 참! 사장님!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씀을 하십니까? 비록 대리지만 제 책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총알 맞은 졸병을 어떻게 두고 갑니까? 염려 마십시오. 사장님도 같이 한잔 하시죠?”

　순희를 두고 간 박대리를 겨냥한 경호의 재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순희는 나오지도 못하고 화장실에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수리는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눈치보기 싫습니다. 제가 안주될 테니 여러분이나 실컷 드세요.”

　“그러면 감사하죠. 사장님도 좀 쉬세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우르르 몰려 나가는 동생들을 배웅을 해주고 들어온 수리가 화장실을 입구를 힐끔 쳐다보며 실험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사무실과는 제법 떨어져 있어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 수 없지만 그래도 목소리가 워낙 커서 혹시나 듣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수리 가슴에 찌꺼기로 남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수리가 실험실에 들어가서 놀고 있는 분석 장비들에 손만 올려 둔 채 순희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볼일을 마치고 나오던 순희 눈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는 텅 빈 사무실만 보였다. 변기통에 앉아 깜빡 졸았나? 방금 들리던 요란한 소리는 꿈결에 들은 소리인가? 놀라고 있었다. 접견 실 말고 사무실이 또 있나? 그러고 보니 문이 하나가 더 보였다. 살짝 열어 안을 쳐다보았지만 검정색 커튼을 쳐 두어 컴컴하기만 했다. 왜 검은 커튼을 쳤지? 별 희한한 사람이네. 불을 켰다. 컴퓨터가 놓인 작은 책상 주위로 5단 책꽂이가 책상을 감시하듯이 서있었다. 들어갈 까 하다가 예의가 아닐 것 같아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로 하고, 앉는 순간 불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일어섰다.

　뒤꿈치를 들고 칸막이 너머를 살폈지만 쥐새끼가 있을 리는 없지만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우악스럽게 생기기지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손님을 혼자 두고 퇴근할 막되 먹은 인간들은 아닐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칸막이 너머 보이는 책상으로 갔다.

　순간 이것들이란 말이 순희 입에서 튀어 나왔다. 책상 위에 널려진 책 하나라도 치우고 간 놈이 없어서였다. 박대리가 여기서 근무하는 줄 착각할 정도였다. 자연스레 입술 한쪽이 삐죽 올라가고 콧방귀도 튀어 나왔다. 책상에 놓인 책들이 하나같이 널브러져있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더 가관인 건 한 권이라도 앉아서나 서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 꺼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읽어야 하는 책으로 착각할 정도로 배열 자체를 무시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아무 책이나 한 권 들었다. 선박 구조론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가 무슨 조선소인가? 의자를 뒤로 밀치고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한 장이라도 깨끗한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빨간 줄을 찍찍 그어놓고 옆에다가는 뭔가 깨알같이 적어두었다.

　적어두면 뭐하나? 순희는 하나라도 이해되는 부분이 없어 던져버리려다가 물구나무 서서 보지 않게 가지런히 정리하고 다른 자리로 갔다. 꺼꾸로 놓여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해상보험이라 쓰여 있었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깨지는듯한 통증. 바로 덮어버린다. 그렇게 시작한 책상 정리가 마칠 때쯤 뜬금없는 소리에 눈만 마주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배탈 난 모양이죠?”

　침묵이 흘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그 순간에 순희의 뇌기능이 정지되어 버렸다. 탈이 난 책상을 깨끗하게 정리 해줬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배탈? 이런 된장! 어디서부터 탈이 난 인간일까? 아니! 내가 어디서부터 탈이 났을까? 순희는 이 생각부터 하다가 묻는다.

　“박대리님은요?”

　“방금 가셨습니다.”

　“예? 혼자요?”

　“예!”

　이 사람 말을 의심해야 할 지 귀를 의심해야 할지 선택을 못한 순희가 물끄러미 쳐다 보고 있다.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마주치고 있다. 순희는 어이가 없어 그렇게 쳐다보고, 수리는 이 사람이 갑인, 업무 용도가 아닌 데이트 용도, 이것도 아니! 파트너로 만났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